전국 곳곳에 ‘노근리’가 있다

 

노근리 쌍굴다리·노근리평화공원

 

한국전쟁 당시 1950년 7월 24일 미군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의 통신일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어떤 피난민들도 미군 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 전선을 넘으려는 사람은 모두 사살하라. 어린이와 여자의 경우에는 재량권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1950년 7월 25일 미군 제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이런 명령을 했다. "어떤 피난민도 미군 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가면 일명 '노근리 사건' 현장인 '쌍굴다리'와 '노근리평화공원'이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남쪽으로 피난하던 우리 피난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처음에는 철로를 따라 이동하던 피난민들을 향해 미 공군기가 기관총을 쏘아댔다. 많은 사상자가 났다. 놀란 피난민들은 인근 철로 아래 쌍굴다리 밑에 숨었다. 미 공군기는 왔다 갔다하면서 쌍굴다리 아래에 숨은 피난민들을 향해 무수한 총탄을 쏘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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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일행은 노근리평화공원 추모탑에 참배하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 조재영 기자

 

쌍굴다리 앞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등록문화제 제59호 1934년 건립. 이 다리는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개근천 위에 축조된 아치형 쌍굴 교각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인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후퇴하던 미군이 영동읍 주곡리·임계리 주민과 피난민들을 굴다리 안에 모아놓고 집단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총탄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상황을 그래도 전해주고 있다."

미군들은 왜 피난민들을 학살했을까?

미군들은 피난민들 틈에 북한 인민군이나 첩자가 포함되어 있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고한 주민과 피난민들을 그렇게 학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은 1999년 AP통신에 보도되면서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그 전에도 이 사건에 대한 일부 언론의 보도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주요 언론과 정부가 관심을 두지 않다가 AP통신 보도를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되면서 국민적 관심을 모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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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노근리 쌍굴다리는 한국전쟁 때 미군이 우리 피난민들을 공군기에서 총탄을 쏴 학살했던 현장이다. 외벽에 무수한 총탄자국(동그라미 또는 세모 표시)이 보인다. / 조재영 기자

 

이후 한미 양국 합동조사단이 조사에 나서 2001년 노근리 사건이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임을 확실히 밝혔다.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했다.

 

이후에 쌍굴다리 보존대책이 마련되고 인근에 노근리평화공원이 만들어졌다.

노근리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노근리만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 '노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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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평화공원 안에 있는 노근리평화기념관. / 조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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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평화공원 안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상 ‘시선’. / 조재영 기자

 

내가 살고 있는 경남만 해도 여러 군데에서 노근리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 함안군 군북면 장지리 일대와 군북면 원북리 경전선 원북터널에서 노근리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장지리에서는 미군기가 늪에 숨어있던 피난민들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고, 원북터널에서는 노근리 쌍굴다리 아래 피난민들에게 총탄을 퍼부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찻길 터널 속에 숨어있던 주민들을 학살했다. 지금은 해당 구간 경전선이 복선화·직선화되면서 다른 곳으로 이설되고 원북터널 구간은 폐선이 되었다. 예전에 나는 노근리 쌍굴다리에 나 있는 총탄 흔적이 그곳 원북터널 입구 벽에도 있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옥과 같은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서 당시 상황을 들은 적도 있다.

함안뿐만이 아니다. 창원시 합포구 진전면 곡안리에서도, 의령군 화정면 보천마을에서도, 창녕군 창녕읍 초막마을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곡안리 사건은 재실에 모여있던 마을사람들을 미군이 총탄을 쏘아 학살한 사건이었다. 곡안리 사건은 내가 일하고 있는 <경남도민일보>의 김주완(현 이사·출판미디어국장) 기자가 당시 집중 보도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경남의 다른 사건들도 하나둘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조명되지 않았을 뿐, 아마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전투를 벌였던 지역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과 우리 정부는 영동 노근리 사건 외에는 제대로 된 진실규명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 흔한 위령비 하나 변변하게 세워진 곳이 없다. 그간 유족과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매년 지역별로 위령제를 지내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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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영동 곶감 생산 농가 앞에 쌓여 있는 감 수확용 상자. / 조재영 기자

 

영동

충북 영동 삼도봉 아래 물한계곡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고 수도권 라이더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가 노근리평화공원이었다.

경남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점심 무렵에 영동에 도착했다. 영동은 포도와 곶감이 유명한데 음식은 어떤 좋은 것이 있는지 몰랐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 맛집 블로그 포스팅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행 중에 대형 트럭으로 화물운송업을 하는 후배가 있는데 이 후배가 올갱이국을 먹자고 제안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뒤를 따랐다.

식당은 시골마을 한쪽 귀퉁이에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식당 앞 공터에 차가 많았다. 제대로 찾아온 듯했다. 공터 귀퉁이에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동네를 한 바퀴 둘러봤다. 한쪽에 색색깔 플라스틱 상자가 사람 키보다 높게, 그리고 길게 쌓여 있었다. 살펴보니 감을 수확해서 곶감을 깎을 때 사용하는 상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영동의 특산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많이 생산하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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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 월류봉과 그 아래 절벽 위에 세운 한천정사, 그리고 그 아랫자락을 휘감아 도는 초강천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조재영 기자

 

식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보호대가 들어있는 라이딩자켓을 입고 부츠를 신고 헬멧을 든 모습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다. 이제는 좀 익숙할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약간은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행동도 더 조심스럽다.

올갱이국에는 올갱이와 야채가 가득 들어있었다. 먹음직스러웠다. 다만 매운 고추를 넣었는지 톡 쏘는 매운맛이 섞여 있어 내게는 약간 부담스러웠다. 일행들은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이라며, 맛있는 점심이었다고 칭찬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우리는 샛노란 점 같은 것이 모터사이클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이건 뭐지?"하고 의아했다. 의문은 곧 풀렸다. 인근에 꿀벌통이 있었는데 노란 꽃가루를 묻혀온 꿀벌들이 똥인지, 분비물인지 모를 어떤 물질을 묻혀놓고 간 것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도 꿀벌을 몇 통 키웠는데 그때는 이런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샛노란 색이어서 배설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물수건으로 쓱싹 닦고 노근리평화공원으로 달렸다.

노근리평화공원에서 수도권 라이더들과 합류한 우리는 쌍굴다리와 공원을 둘러보고 추모탑 앞에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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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영동 삼도봉 아래 물한계곡 핏들오토캠핑장에 도착한 일행들이 짐을 부리기 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조재영 기자

 

월류봉·물한계곡

우리는 노근리평화공원을 떠나 월류봉으로 이동했다. 월류봉은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에 있다. 해발 400m 정도의 여러 개 봉우리가 잇닿아 있고 산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처럼 경사가 급하다. 산자락 아래로 초강천이 휘돌아 흐른다. 그리고 바위 절벽 위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산과 강, 정자(한천정사)가 어우러진 모습은 산수화에서 꺼내놓은 듯 아름답다. 아마도 그곳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름답다' 혹은 '수려하다'는 말에 동의할 것이다.

월류봉은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이름을 보면 틀림없이 월류봉 일대는 낮보다는 밤에 더 아름다울 것이다. 특히 보름달이 뜨는 밤.

기회가 되면 보름달이 뜰 때 월류봉을 꼭 한번 보고 싶다.

오후 4시가 지나 우리는 먹을거리를 사서 나눠 싣고 물한계곡으로 달렸다. 물한계곡은 삼도봉으로 오르는 골짜기다. 삼도봉은 경상도(김천), 전라도(무주), 충청도(영동)가 만나는 봉우리라고 해서 삼도봉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묵을 준비를 해야 한다. 더구나 초행길을 밤에 달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예약해놓은 핏들오토캠핑장은 물한계곡 깊숙이 들어가 있었는데 나중에 지도로 확인해보니 상류와 중류 중간쯤이었다. 그만큼 물한계곡은 깊은 계곡이었다. 펜션에는 손님이 좀 있었지만 야영장은 우리뿐이었다. 마음씨 좋은 주인 내외분이 대형모터사이클 10대가 들어서자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이렇게 큰 모터사이틀과 이렇게 많은 모터사이클이 이곳 캠핑장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 곳이나 마음에 드는 곳을 쓰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남자 사장님은 젊은 시절에 창녕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분이었다. 우리 일행 중 일부가 경남에서 왔고, 그중에 2명 고향이 창녕이라고 했더니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우리는 드넓은 야영장을 전세 낸 것처럼 각자 마음에 드는 곳에 텐트를 치고 일행이 한꺼번에 모여서 놀 자리에 큰 천막을 쳤다.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는 모터사이클에서 시작해 여행을 지나 역사, 사회, 정치로 이어졌다. 자정을 넘겼을 무렵 각자의 텐트로 들어갔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이고 추위를 제대로 막아주지도 않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 누우면 아늑하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그런 공간에 홀로 누워있다는 것이 어떨 때는 기쁘고 어떨 때는 울적하기도 하다.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새벽 한기에 깨어났을 때 날은 이미 밝아있었다.

옷을 입고 천막으로 가서 원두커피를 내렸다. 갓 내린 따끈한 커피를 형님·동생에게 배급하고 마지막으로 나도 한 잔을 마셨다. 야외에서 맑은 아침에 진하게 내린 따끈한 커피를 빈속에 흘려 넣는 것은 그야말로 작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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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영동 도마령 전망대에서 본 무주 방향 전경. / 조재영 기자

 

가파르게 올라간 산 너머에서 곧 해가 떠올랐다. 안쪽에 습기가 찬 텐트가 잘 마르도록 널어놓고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다른 일행들이 쉬는 사이에 나는 널어놓은 텐트를 걷어서 짐을 쌌다. 텐트가 아직 제대로 마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가면 반드시 짐을 풀어서 눅눅한 텐트를 다시 널어 바짝 말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넣어두면 100% 곰팡이가 핀다.

내가 일행보다 먼저 짐을 싼 것은 출근 때문이었다. 그날 하루 휴가를 내면 되지만 그날은 그럴 사정이 못됐다. 그래서 국장에게 미리 보고를 하고 대략 250km 거리 출근길을 서둘렀다.

물한계곡을 빠져나와 도마령을 넘고 전북 무주로 넘어간 뒤 무주에서 신풍령을 넘어 경남 거창으로, 거창에서 산청 진주를 거쳐 창원 회사까지 국도를 따라 달리는 길이다. 도마령을 넘을 때 도로에 모래가 많이 깔려 있었다. 이런 길은 무조건 천천히 달리는 것이 정답이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모랫길에 미끄러져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도마령에서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은 뒤에는 산청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산청에서 멈춰 선 것은 휘발유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타는 BMW R1200RT는 연료탱크 크기가 24리터다. 연료를 가득 넣으면 400km 이상 달린다. 주유소에서 연료를 가득 넣은 뒤 다시 출발했다.

회사까지 논스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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