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의 <금강> 제7편

날이 갈수록 / 세상인심은 / 스산했다. … 봉건사회의 / 마음은 / 걷잡을 수 없이 / 동요되기 시작했다. // 대구 팔공산에선 / 이름 모를 새들이 나타나 / 한 달 동안 / 하늘의 해와 달을 가리고 / 싸웠다. … 이상한 소문은 꼬리를 이었다. // 오대산 속에선 소나무에 꽃이 피었다. … 수덕사(修德寺)에선 / 겨울인데 / 복숭아꽃이 만발했다. // 6월 초열흘날 밤에 / 불비가 오리라. / 그 불비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 흙에 발붙인 사람과 / 손에 흙 묻힌 사람뿐이리라. // … 1893년 11월 / 전주 익산 등지에서, 또 /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 오지영(吳知永)을 선두로 / 삼천명의 농민이 / 익산 관아에 모여 / 시위했다. // 고부군에선 / 전창혁(全彰爀)을 필두로 / 오천명의 농민이 / 관아에 쇄도하여 / 시위했다. // 조대비의 심복 / 고부군수 조병갑은, / 소원 들어줄 테니 전체가 해산하고 / 대표자 세 사람만 나와 / 협상하자고 제의했다. // 나이 많은 세 사람이 / 지원하여 동헌 마당으로 들어갔다. /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 / 김도삼(金道三), 정일서(鄭一瑞). // … 조병갑은 세 농민을 / 전주로 압송했다 /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께, / 민란의 장본인을 보내오니 / 엄치해달라는 편지와 함께. // 전라감사 김문현은 / 세 농민대표를 / 형틀에 올려 반죽음시킨 뒤 / 고부로 되돌려보냈다. // 조병갑은 이미 반죽음된 / 세 사람을 다시 / 새 형틀 위 묶어놓고, 밤새도록 / 불로 지지고 주리를 틀었다. // 그날 새벽 / 매에 못 견뎌 / 급기야 전창혁이 죽었다. // …

봉준은, / 후취 부인과 아들, 딸 / 사랑방으로 불러놓고 / 조용히 / 마주 정좌했다, 남매의 머릴 / 쓰다듬었다, // "얼마 동안 태인 친정집 / 가 있어주오, … 무슨 일 혹 있더라도 / 너무 놀라지 말며, / 경우 봐서 / 애들 데리고 / 해남 땅으로 가 / 변성명시켜 // 때 기다리도록 하오."

- <금강> 2부 15장 중

인심의 동요는 집단적으로 정신적 공황(恐慌)을 일으키고, 이러한 가운데 정치는 더욱 혼란하여 바야흐로 반란의 기치는 연주창(連珠瘡)처럼 번진다. 동학과 천도교 운동사를 그린 <동학사>의 저자 오지영이 그의 고향에서 시위를 이끌었다. 시인은 농민대표로 전녹두의 아버지를 내세워 고부군수 조병갑과의 대를 이은 악연을 말하려 했을까? 여하튼 끝내 선비로 살던 녹두가 드디어 장군으로 일어선다. 녹두는 '내가 죽더라도 놀라지 말고 먼 오지의 땅 해남으로 숨어들어 성과 이름을 바꾸라'는 유언을 남긴다. 때를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 '때'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세상의 / 어지러움은, 그 까닭이 / 외부에만 있는 거, 아닙니다, / 손짓 발짓은 흘러가는 물거품, / 우리의 내부가 더 문제입니다, … 외부로부터 다스려 들어오려 하지 말고 / 우리의 내부에 불을 지릅시다." // 태인 최경선(崔慶善) 집의 사랑채, / 충청도서 달려온 / 하늬의 말이었다, / 봉준은 고개를 저었다, // "요원한 이야기요, / 물론 옳은 생각이긴 하지만, / 석가가 죽은 지 이미 삼천년 / 노자 죽은 지 이미 이천 수백년 // 그분들은 하늘을 보았지만 / 그분들만 보았을 뿐 // 삼십억의 창생은 / 아직도 하늘을 보지 못한 게 아니오? / 아직도 구제되지 못한 게 아니오? // 동학은 현실개조의 종교요. / 자기혁명, 국가혁명, 인류혁명, / 이게 바로 동학의 / 삼단계 혁명 아니오? //

- <금강> 2부 16장 중

혁명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그들과 같이 참수당한 최경선 장군의 집에서, 시인 신동엽이 픽션으로 만든 인물 신하늬. 전봉준의 의형제답게 그는 봉준에게 '손짓 발짓 같은 행위로써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내면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 세상을 바로 잡는 근본이 된다'고 간곡히 역설(逆說)한다. 그렇지만 녹두는 무턱대고 세상을 바꾸려는 급진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하늬의 생각이 옳다고 먼저 인정하면서, 다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님을 덧붙인다.

여기서 또 이 서사시를 떠받치고 있는 '하늘'이 녹두와 시인의 사상을 웅변한다. '하늘'은 <금강>의 굽이굽이마다 금빛으로 빤짝인다. 하지만 석가와 노자가 보았던 하늘, 그 하늘빛은 중생계의 인간들 모두에게 굽이굽이 금빛으로 반짝이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전녹두는 동학이 종교이면서 혁명이라고 말했다.

참된 종교는, 참된 지도자들은 '몸나'의 껍질을 벗고 부활한 '얼나'를 깨우친 어른들이라서 '하늘'의 명령인 천명(天命)에 따라 살고 죽었다. 하늘에서는 우레와 질풍이 노도를 일으키다가 어느새 아지랑이 타오르고 붉은 노을이 함께하는 장엄의 세계가 펼쳐진다. 혁명이 인고(忍苦)라면 종교는 사랑이다. 아니 혁명도 사랑이며 종교도 인고이다. 이게 바로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일이 하나라는 인내천(人乃天)일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후, / 1894년 3월 21일, / 전봉준이 영솔하는 / 오천 농민이 / 동학혁명의 깃발 / 높이 나부끼며 / 고부군청을 향해 진격했다. … 하늘에서는 까마귀떼 / 참새떼 까치떼도 신바람이 났음일까. / 날개를 가슴 끝 휘저으며 / 동학군의 머리 위, 설레발쳐 / 따랐다. <중략>

용서… …, 이 뒤, 전주성 입성까지의 / 상세한 영웅적인 전투 이야긴 / 다 기록할 수도 없지만 / 생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 다만 … 전라 땅 곳곳에서 농민들, 말단관리들이 벌떼 같이 / 일어나 관아를 점령하고 농민군 주력부대에 / 합세하여와, 한달 후 전주성에 무혈입성할 때엔 / 농민군 총수 십이만명이 되더라는 이야기, //

- <금강> 2부 17장 중

미움의 난간을 끼고 / 조심조심 / 열두 굽이 돌아도 / 연민은 끝나지 않는다, // … 연민 // 누가 누구를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 … 사랑은 끝나도 / 연민은 남는다, // 미움은 끝나도 / 연민은 남는다, // 속리산 문장대 위 올라 / 은실같은 낙동강 줄기 보았는가, //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보았는가 / 노고단 상상봉에서 활개 펴고 / 그 꽃밭 / 그 하늘 보았는가, // 금강산 비로봉 / 밤하늘의, 사발덩이 같은 물먹은 별 / 마셔 보았는가 / 그 밤하늘 마셔보았는가, // … 그래서, 보았는가 / 무엇을, 너는, // 없음이어라 / 없음이어라 // 그러나 어찌하랴 / 그래도 여전히 / 남는 건 / 연민임을, // <중략>

- <금강> 2부 18장 중

연민(憐憫).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인 연민은 미움에 닿아 있다. 억울한 인생살이를 연민하지 않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다. 연민은 또 사랑과 맞닿아 있다. 불쌍한 처치에서 살아가는 누군가를 차마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구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연민은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사람을 가린다. 누군가는 구제받아야 하고, 누군가는 처단해야 한다고. 그러나 어찌하랴! 연민하면서 사는 게 인생인 것을.

그러면서도 시인은 연민을 다시 묻는다. 금강(金剛)의 지혜를 품은 산에서 비로자나불의 화신인 비로봉의 밤하늘과 하얀 백자 사발덩이 같은 물먹은 별을 보았으며, 그 밤하늘을 마셔보고는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하고. 천지가 한 물 덩어리이고,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는 해월의 법문을 '물먹은'이라는 단어로 녹여내는 시인의 깊은 이해는 철학의 지평으로 우리를 이끌기에 충분하다. 천지간 만물이 한 덩어리의 물처럼 무분별(無分別)하고 무차별(無差別)한 존재이지만, 시간과 공간에 갇혀서 분별하고 차별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연민의 존재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석림은 시의 서정과 골계(滑稽)의 미학,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상상력으로 동학혁명을 서술한다. 그러다간 때론 위 구절같이 동학의 정신으로 시를 풀어놓아, <금강>은 마루의 가르침인 종교(宗敎)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십이만 농민군이 호남 가렴주구의 소굴인 전주성을 수복(收復)하였던 그 날, 만약 우리에게 버틸 만한 주권이 있었다면, 농민혁명군본부가 성을 내어주며 관군과 맺었던 '전주화약'의 요구와 주장은 시대를 뛰어넘어 사회민주주의의 씨앗을 이 땅에서 꽃 피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라도 53주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민정에 참여 △모든 토지의 농민에 평등분배 △횡포한 부호, 지주, 불량한 유림과 양반족속의 엄징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무명잡세 징수 금지 △ 외세와 잠통(潛通)하는 자 엄벌 등, 혁명이 아니면 바꿀 수 없는 약속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도 않다. 불연기연(不然其然). 혁명의 불길을 빌리지 않더라도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마땅한' 일이 동학농민본부가 만들고자 한 세상인데, 그럴 듯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게 모두 연민처럼 사람의 눈으로 보고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서 하는 일인데, 그래서 수운은 불연기연의 가르침을 말년에 우리에게 던져놓았다.

임오년, / 군부 쿠데타에 쫓겨 / 다락방으로, 여주 논길로 / 치맛자락 끄을며 / 헐떡이던 뒤꿈치, // 방방곡곡의 이름난 무당 불러들여 / 아들의 장수무강, /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마다 / 쌀 한 가마, 비단 한필씩 걸어 / 푸닥거리 들리던 왕비, // 오늘은 / 민영준(閔泳駿)을 불러 청나라 / 원세개 앞으로 / 파병 요청서를 썼다, // … "소국 전라도 땅에, 태인 고부 고을이 있사옵니다, / 원래 습성이 고약한 게 우리나라 백성들입니다마는 / 이 고을이 유독합니다, // 요즘엔 동학당이라는 비적들과 / 배가 맞아 … 이미 임오, 갑신, 두차례의 / 내란 때 귀 대국의 군대의 힘으로 / 명맥을 유지한 우리 궁중의 일가친척// … 소국의 내란을 대신 소탕해주심과 …"

산에선 / 원추리가 피기 시작하는 / 6월 초순 / 아산만 / 야포(野砲) 4문 / 87밀리 대포 4문 이끈 / 엽지초(葉志超)의 청군 육천명이 / 양총 들고 상륙, // … 남진(南進)! //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 재빠르게 / 등덜미 잡는 / 손, // 인천 가두에 / 오천사백명의 / 까마귀떼 같은 / 일본군이 상륙 / 차렷 행렬로 / 점호, / 왕가와 아산만의 눈치를 살폈다. // … 청일전쟁, //

- <금강> 2부 18장 중

임오군란, 명성황후 민비, 이미 침략 전쟁에 눈이 뻘게진 제국주의자들에게 '비적들과 배가 맞은 우리의 고약한 백성들이 벌이는 내란을 토벌해 주십사'하고 손수건을 흔들었으니… 청군이 상륙하자 약속이나 한 듯이 뒤이어 상륙한 일본군벌은 대륙진출을 갈망하던 풍신수길의 후예, 청일 두 나라의 제국주의가 조선 땅을 빌어 벌인 전쟁은 이 강토를 또 한 차례 뜯어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산야에선 원추리 그 이쁜 꽃 너울이 하염없던 시절이었다.

556060_424328_2804.jpg
▲ 신동엽 시인.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