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의 <금강> 제6편

1888년/ 전봉준은, 서장옥의 소개로 / 동학에 입도(入道)했다. // 태백산 속 / 은신해 있던 해월이 / 보은(報恩)으로 나왔다. / 나흘을 걸어 보은 땅 / 속리산 기슭 초가집에서 / 전봉준은 해월을 만났다. // … 쑥 냄새 풍기는, / 해월이 묵고 있는 / 초가집엔 하루에도 / 수십명씩, / 멀린 황해도, 평안도에서까지 / 농사꾼 교도들이 / 괴나리봇짐 얽매고 / 드나들었다. // … 한 달을 묵으면서 / 각지의 농민 지도자들과 사귄 / 전봉준은 자기가 / 외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 그리고 합천 해인사 / 경주 토함산 / 마산 / 진주 촉석루 / 여수, 순천, 화엄사를 거쳐 / 고향에 돌아왔다. //

- <금강> 2부 12장 중

수운과 해월의 만남, 그리고 최해월과 전녹두의 만남은 국운(國運)이 이울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民生苦)를 동학을 통해 건져보려는 시절 인연으로 이뤄졌다. 보은 땅 속리산 기슭에서 그이들의 아호(雅號)인 녹두(綠豆), 해월(海月)처럼 '강남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으로 둘은 만났다. 쑥 냄새 풍기는 초가집에 괴나리봇짐을 진 교도(敎徒)들이 개미집에 나고 드는 먹먹한 개미 떼처럼 이어졌고, 전녹두는 저 혼자의 깨달음이 아님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충북 보은에서 전라도 고부로 돌아가면서 전녹두가 군데군데 들른 곳을 가만히 살피면 거룩한 불국토(佛國土)이고 혁명의 땅이며 호국의 성지다.

팔만사천법문을 판각하여 모신 장경각의 합천 해인사, 신라 때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 은혜를 못 잊어 세운 경주 토함산의 본존상, 열아홉의 나이에 불사(佛事)에 참여한 목수가 금강석같이 견고한 신심과 원력으로 불사를 다 이루고 나니 일흔아홉이 되었다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또한 잘 알다시피 마산은 역사의 도시다. 그러나 김주열의 주검이 낳은 이름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마산은, 그 60년 뒤 우리가 마산, 창원, 진해시를 통합하면서 마산의 '역사와 얼'을 버리고 창원의 '자본'에 손을 들어 통합 창원시로 개명했다. 3·15혁명, 부마 민주항쟁으로 기억되는 마산이 창원으로 이름이 바뀐 일은 참으로 안타깝다. 마산에는 마산의 다른 이름인 '혁명과 항쟁의 도시'처럼 마산만의 얼이 있기 때문이다.

촉석루는 곧 논개와 진주대첩의 호국현장 진주성의 상징이다. 여수와 순천은 한때 이념투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여순사건의 고장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통시(通時)적인 이들 성지(聖地)를 돌며 실제로 녹두장군이 머물렀는지, 아니면 시인 석림이 시적 상상으로 만든 노정인지 알 수 없으나 거룩한 사람들의 생각과 움직임은 한가지라서 함께 손잡고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후, 봉준은 / 가끔, 두루마기 빨아입고 / 서울을 다녀왔다. // 밤길, / 새벽길, 소맷자락으로 땀 씻으며 / 그의 집 드나드는 / 사람의 수도 많아갔다. // 남원(南原) 사람 김개남(金開南), / 그는 이미 열세살 때 / 세미 받으러 와 / 늙은 아버지께 행패하는 / 관속 두 사람 / 한아름에 몰아 / 수챗구멍 쑤셔박은 일로 / 곤장 백개 맞은, 그리고서도 웃으며 일어났다는 / 팔척 장사. // 얼굴이 흰, 칠보(七寶) 사람 / 손화중(孫化中), 그는 임진왜란 때 / 전주성의 이조실록 / 내장산으로 묘향산으로 끌고 다니며 / 보전케 했던 / 손홍록(孫弘錄) 장군의 후손, / 가녀린 미남으로 / 일찍부터 해월의 감화 받은 / 그러나 뛰어난 전략가였다. // …

- <금강> 2부 13장 중

전녹두(1855~1895)와 함께 동학혁명 농민군을 진두지휘한 김개남(1853~1895)은 기질이 불꽃 같아 부패한 관리를 가차 없이 응징한 강경파 장군으로, 전북 고창 무장이 고향인 손화중(1861~1895)은 지주의 아들로 글을 익힌 총명한 인재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세 지도자가 나란히 이름을 걸고 갑오년(1895년) 3월 20일 의병의 궐기를 외친 창의문(倡義文)에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을 해치면 나라는 필연적으로 쇠잔해지는 것이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평안케 할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제 몸을 온전히 보전할 계획만 내며, 녹봉과 벼슬을 도둑질하고 있으니… 보국안민을 위해 죽음을 맹세하노니,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랍다 해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말고…"라고 적어 그들이 일어서는 이유와 결의를 표명했다.

예나 이제나 / 식민지하의/ 관리들이 배우는 건 / 오직 하나 / 아첨과 비겁. // <중략> 이조 말의 / 반도는 흡사 / 접시 위 올라앉은 / 벌거벗은 생선, // 멀리는 불란서, 미국, 영국, / 러시아, / 가까이는 중국과 일본, // 마치 그들은 / 내기라도 하려는 듯, / … 접시 위 생선을 두고 / 한 발 한 발 / 접근해오고 있었다. //<중략> 이천만의 농민이 / 제주에서 두만까지 사이 / 뜨물처럼 엎디어 / 땅을 갈고, // 이천만의 농민이 엎디어, 이루어놓은 / 육체의 / 산더미 위 // 왕권은 대초롱을 / 깊이, 깊이 박고 / …

- <금강> 2부 13장 중

그 나라의 정신이 독립을 하지 못하면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식민(植民)상태에 들게 된다. 홀로 서지 못하는 국민정신을 가진 관리는 외세에 맞서려는 용맹을 버리고 떳떳함보다 알랑거림을 되레 자랑으로 여긴다. 접시에 올라 스스로 벌거벗어버린 생선은 임금과 관리들이 만든 제물인 셈이다. 그 제단(祭壇)을 쌓기 위해 이천만 농민이 제주에서 두만까지 뜨물처럼 엎디었다고 표현한 신동엽의 시재(詩才)는 비유와 은유가 아닌 직유법으로 말한다.

광화문 앞 광장 / 삼천의 군중이 / 바둑판처럼 / 땅을 짚고 / 엎디어 있었다. // 1893년 2월 초순 / 제2차 농민 평화시위운동. // 입에 물 한모금 못 넘긴 / 사흘 낮과 밤 / 통곡과 기도로 담 너머 기다려 봐도 / 왕의 회답은 없었다. // 마흔아홉명이 추위와 / 허기와 분통으로 쓰러졌다. / 그러는 사흘 동안에도 / 쉬지 않고 / 눈은 내리고 있었다. // 금강변의 범바위 밑 / 꺽쇠네 초가지붕 위에도 / 삼수갑산(三水甲山) 양달진 골짝에도, 그리고 / 서울 장안 광화문 네거리/ 탄원시위운동 하는 동학농민들의 / 등 위에도, / 쇠뭉치 같은 함박눈이 / 하늘 깊숙부터 수없이 / 비칠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 그날, 아테네 반도 / 아니면 지중해 한가운데 / 먹같은 수면에도 눈은 / 내리고 있었을까. // 모스끄바, 그렇지 / 제정(帝政)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 뿌슈낀 / 똘스도이 / 도스또옙스끼, / 인간정신사(人間精神史)의 하늘에/ 황홀한 수를 놓던 거인들의 / 뜨락에도 눈은 오고 있었을까. // 그리고 / 차이꼽스끼, 그렇다 / 이날 그는 눈을 맞으며 / 삐쩨르부르그 교외 백화(白樺)나무숲 / 오버 깃 세워 걷고 있었을까. // 그날 하늘을 깨고 / 들려온 우주의 소리, <비창(悲愴)> / 그건 지상의 표정이었을까, / 그는 그해 죽었다. // …

- <금강> 2부 14장 중

광화문 광장에는 촛불만 있었던 게 아니다. 왕의 궁궐과 백성의 삶터를 나누는 광화문 광장은 늘 나라 상황이 다급해지면 백성과 시민이 모여들어 이야기하는 공론(公論)의 공간이자 백성의 소리를 전하는 언론(言論)의 공간이었다. 120년전 삼천 군중은 질서정연하기가 바둑판과 같았다. 사교(邪敎)의 괴수로 몰려 처형된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교조신원(敎祖伸寃)운동의 울부짖음과 기도는 사흘 낮밤 이어졌으나 왕좌의 대답 없기는 대한민국의 한사람 대통령과 마찬가지였다. 왜 인간은 스스로를 기만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의 근본을 버리는가?

역사에 가설은 없다지만 만약 1893년 고종이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의 문을 열고 나왔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기야 자신의 부인이자 국모(國母)인 명성황후가 사무라이들의 칼날에 베이고 시신이 불탄 견딜 수 없는 사태에도 그는 자신의 목숨이 두려웠던 위인이었으니 지푸라기 같은 백성들의 읍소(泣訴)야 귓전에나 닿았을까?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하야를 촉구한 오늘에도 우리는 어찌하여 그처럼 무명(無明)이 정체성인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으며 탄핵을 당한 뒤에도 무엄(無嚴)하기는 한가지여서, 무명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정(國政)이 유린당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우리는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날 금강 변에도, 삼수갑산에도, 동학 농민의 등 위에도 깊숙한 허공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소리는 쇠뭉치 하얀 눈으로 내려앉았다.

그날 인류 처음으로 민주정치를 실행한 아테네 반도에도 하늘의 소리는 눈으로 내렸을까? 제정과 혁명이 투쟁하던 러시아 땅에는 인간의 정신을 하늘의 별같이 수놓았던 뿌쉬낀, 똘스또이, 도스또옙스끼 같은 대문호들이 함께 살았으니 그들의 공간에도 눈은 내렸다.

그리고 베토벤의 <운명>, 슈베르트의 <미완성>과 함께 3대 교향곡을 쓴 차이꼽스끼는 설원의 하얀 자작나무 숲길을 걸으며 <비창>교향곡, 그 첼로와 관현악기의 중저음이 깔린 1악장은 천천히 묵직하게 시작하여 빠르고 애달프게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음률이 이어진다. 쇠뭉치로 하늘을 때렸으면 그 틈새로 들려온 것은 분명 우주의 소리다.

곧바로 <비창>의 그 유명한 주제부가 이어진다. 현과 관악기의 주고받음으로 주제부는 마음의 평안을 안겨다 주지만 그 슬픈 곡조는 사흘 낮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광화문 농민들의 통곡과 기도소리로 들린다. 간간히 울리는 타악기의 울림, 시인은 <비창(悲愴)>의 노래를 지상의 표정이라고 하였으니, 지상의 삶은 슬프고도(悲) 슬픈(愴) 일이었다. 이어 세차고 격렬한 음률이 이어지니 머잖아 일어날 혁명의 소리가 슬픈 세상을 감싸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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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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