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고속도로를 짝사랑만 해야 할까요?

이륜차

충북 단양 소선암 야영장에서 1박 모토캠핑을 하기로 하고 함께 여행할 지인들을 만난 것은 토요일 오전 9시 밀양시청에서였다.

일반적으로 창원을 출발점으로 했을 때, 우리나라의 동북 방향으로 여행하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남해고속도-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김해, 양산, 경주 노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하지만 우리는 자동차 여행자가 아니라 모터사이클 여행자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없는 우리는 국도로만 이동할 수밖에 없다.

마침 그날 서울에서는 '이륜차 고속도로 통행 허용'을 정부와 국회에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모터사이클 이용자이고, 이륜차의 자동차 전용도로 통행을 금하고 있는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서울 집회에 참석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집회에 참석한 분들께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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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단양군 단성면 소선암공원 야영장의 아침. 산 허리에 구름이 걸려 있고 하늘에는 아직 뜨겁지 않은 태양이 빛난다. 일행 모토캠퍼들이 아침을 즐기고 있다. / 조재영 기자

 

수백 명이 여의도에 모여 집회를 열었지만, 이후에 뉴스 검색을 해보니 지상파 방송사를 비롯한 이른바 메이전 언론사는 기사 한 줄 내지 않았다. 사실 전국에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특정한 현안을 두고 집회를 여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메이저 언론은 이를 뉴스로 다루지 않았다. 만약 자동차 운전자 수백 명이 모여 특정 이슈에 대해 집회를 열었다면 이들 언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안타깝다.

 

이번 집회를 보면서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이륜차'를 바라보는 시각을 그대로 느낀다. 이륜차의 장점은 보지 않고, 이륜차 이용자들의 불편은 별 것 아니거나 그동안 그들이 쌓아온 나쁜 이미지에 의한 자업자득이라는 시선.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이륜차가 달리는 것은 무조건 위험하고 자동차 이용자들 불편하게 한다'는 막무가내식 편견을 담은 반응은 참 견디기 힘들다. 왜 우리나라를 제외한 OECD 모든 국가에서 이륜차의 고속도로 통행을 허용하고 있는지를 한 번만 깊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올 텐데. 다른 OECD 국가의 이륜차 이용자들이 우리나라 이륜차 이용자들보다 이륜차를 잘 타거나 준법의식이 더 뛰어나거나 혹은 그 나라 고속도로가 우리나라 고속도로보다 더 잘 닦여있기 때문일까? 셋 모두 아니다. 나는 결국 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륜차가 고속도로를 통행할 수 있도록 국토부와 경찰이 법률을 개정하고, 우려되거나 미흡한 부분은 보완하면 될 것을 이렇게 원천적으로 틀어막은 채 300만 이륜차 이용자들의 통행권을 수십 년 동안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하는 이들은 이륜차 고속도로 통행 제한을 명시한 도로교통법이 합헌이라는 헌재 결정을 내세우지만, 합헌이라도 그 법률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정하고 제도를 뜯어고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즉 이륜차는 자동차 전용도로(고속도로 포함)를 통행할 수 없다고 명시한 도로교통법 조항을 삭제하거나 자동차 전용도로에 이륜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조항을 신설하는 것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와 국민의 인식과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이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에서 열이 나고 머리가 아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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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 모습. 임청각 안 군자정에 사진이 걸려 있다. / 조재영 기자

 

안동 임청각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이 창원 인근에서 경북, 충북, 강원도 쪽으로 여행하려 할 때 밀양시청 또는 밀양 솔밭공원 앞 사거리가 적당한 집결지가 된다.

마음이 잘 맞는 이들끼리 몇 명이 모토캠핑 여행을 자주 하게 되다 보니 자연스레 각 개인에게 알맞은 임무가 생겼다. 운수업을 하는 사람은 전국 안 다녀본 길이 없을 정도여서 항상 여행을 오갈 때 매 앞에서 길 안내를 하고, 캠핑 경험이 많고 손맛이 좋은 사람은 주로 음식 조리를 담당하게 되는 식이다. 나는 음식 솜씨도 없고 게으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맡은 임무는 맛있는 커피를 조달하는 것과 여행을 오갈 때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고 코스를 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충북 단양으로 달려가는 길에 경북 안동시 법흥동에 들러 '임청각'에 가보기로 했다. 밀양-청도-영천을 거쳐 35번 국도를 타고 안동으로 가서 시내 중국음식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일행 중에 이번에 새 모터사이클을 장만한 분이 있었는데, 새 애마를 들인 인사로 점심값을 냈다. 라이더들끼리의 문화라면 문화다. 새 애마를 장만하는 것을 '기변'이라고 하는데 기변을 하게 되면 식사나 커피를 쏘는 것으로 지인들에게 인사를 한다. 얻어먹은 라이더들은 기변한 라이더가 새 애마와 무탈하게 달리기를 기원해준다.

점심을 먹고 안동댐으로 가는 길 초입에 있는 임청각으로 갔다. 부끄럽지만, 사실은 나도 얼마 전까지 '임청각'을 몰랐다. 임청각이 무엇 하는 곳인지, 어디 있는 곳인지는 물론이고 그 존재 자체를 몰랐다. 아마도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을 언급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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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 궁궐이 아닌 민가로서는 최대 규모인 아흔아홉칸이었는데 일제 때 중앙선 철로에 집 일부가 수용되면서 지금은 일흔칸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집 앞 낙동강 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음에도 마당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맑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 조재영 기자

 

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아흔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명예뿐인 보훈에 머물지도 말아야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합니다.

친일 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불의와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겠습니다. 최고의 존경과 예의로 보답하겠습니다. 독립운동가의 3대까지 예우하고 자녀와 손자녀 전원의 생활안정을 지원해서 국가에 헌신하면 3대까지 대접받는다는 인식을 심겠습니다. 독립운동의 공적을 후손들이 기억하기 위해 임시정부기념관을 건립하겠습니다.

임청각처럼 독립운동을 기억할 수 있는 유적지는 모두 찾아내겠습니다.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끝까지 발굴하고, 해외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전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정부는 대한민국 보훈의 기틀을 완전히 새롭게 세우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은 나라의 이름을 지키고, 나라를 되찾고, 나라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한 분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습니다. 그 희생과 헌신에 제대로 보답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젊음을 나라에 바치고 이제 고령이 되신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겠습니다. 살아계시는 동안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의 치료를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

우리가 임청각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여러 무리가 임청각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 문화해설사는 "대통령이 임청각을 언급하기 전에는, 평일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고 주말에도 하루 20~30명 정도였는데 대통령이 언급한 뒤로는 주말이면 하루 300명 이상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책상 위에 놓인 홍보물을 1인 1매씩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중 한 사람에게만 대표로 나눠주었다. 우리가 찾아간 시각이 점심 무렵이었음에도 책상 위 홍보물은 몇 장 남아 있지 않았다.

문화해설사는 임청각 마당에 있는 우물과 안채에 큰 기운이 서려 있다고 설명했다. 우물은 나무판자를 이어붙인 덮개로 덮여있었다. 덮개를 들어 올렸다. 보통 오래된 우물은 말라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우물 속의 물은 맑았고 수량도 많았다. 대청마루에 잠시 앉았는데 관리인이 나와서 마루에 있는 대형 TV를 틀어 홍보영상을 보여주었다.

이상룡(1858~1932·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선생의 집안은 대단한 가문이었다. 돈 많고 권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한 집안에서 형제와 자손 9명이 독립운동에 목숨을 내놓았다는 것은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존경할 만 하지 않은가.

일제가 보복으로 임청각 앞으로 철도를 놓아 아흔아홉 칸 임청각을 반 토막 냈다는 일설에 대해, 일부에서는 일제가 철도를 놓을 때 안동역과의 거리, 주변 지형을 고려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지 보복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임청각을 원래대로 복원해서 그 정신을 기리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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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임청각 인근에 있는 법흥사지 칠층전탑. 절의 다른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탑만 남았다. 오른쪽에 보이는 방음벽 너머가 중앙선 철로다. / 조재영 기자

 

법흥사지 칠층전탑

임청각에서 불과 100m 남짓한 지점에 눈에 띄는 건축물이 있었다. 법흥사지 칠층전탑이었다. 높이가 17m나 돼서 멀리서도 눈에 띈다. 국보 16호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탑은 대체로 돌을 깍아 만든 석탑이다. 전탑은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이런 탑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 무너지거나 훼손됐기 때문이다. 칠층전탑 바로 뒤에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아주 오랜 옛날에는 법흥사 절터였을 것이다. 안내판에는 이 종택이 1775년 진사 이종주가 지었다고 되어 있다. 법흥사 경내에 칠층전탑이 있었을 것인데 후대에 절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서 고성 이씨 종택이 자리 잡았으며, 칠층전탑만 남아 이 자리가 절집이었음을 알리고 있을 터이다.

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탑 중간중간에 기와가 얹혀있다. 기와가 얹혔던 것으로 봐서는, 처음 이 탑을 건조할 때는 목탑이었을 것이다. 목탑에 기와를 얹어 비와 바람을 막았는데 후대에 벽돌로 나무를 대신하지 않았을까 싶다. 1487년 이 탑이 개축되었고 이때까지 법흥사 건물이 몇 채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확히 측량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멀리서 전탑을 보면 남쪽으로 약간 기운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남쪽에 철로가 있다. 지을 때부터 기운 것인지 지을 때는 똑바로 서 있었는데 나중에 기운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 일행이 전탑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바로 앞에 있는 철길로 기차가 지나갔다. 탑과 철길은 직선거리로 10m도 채 되지 않는다. 기차가 지나가는 진동이 탑에 그대로 전달되는 거리다.

임청각 복원을 위해서도, 법흥사지 칠층전탑 보전을 위해서도 철길을 하루빨리 이설하는 것이 좋겠다. 마침 정부는 2020년까지 철길을 이설하는 것을 목표로 공사를 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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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단양군 소선암공원 야영장에 자리를 잡은 어느 모토캠퍼의 모터사이클과 텐트. 자동차 캠핑과 비교하면 모터캠핑의 장비는 단순함의 극치다. / 조재영 기자

 

소선암 야영장

우리가 소선암 야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 말고도 많은 모토캠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네이버 카페 <이륜차 타고 세계 여행(일명 이타세)> 회원들이다.

서울, 인천에서 온 지인들과 합류해서 자리를 잡았다. 먼저 각자 1인용 텐트를 설치한다. 그리고 각자 가져온 간이 탁자를 펼쳐 한곳에 모은다. 또 각자 가져온 조립식 의자를 꺼내 탁자를 에워싸고 자리를 잡는다. 한쪽에 불을 피운다. 이렇게 하룻밤을 지샐 준비가 마무리된다. 그날 밤에는 '갈 곳 없는 50' 라이더 둘이서 모터사이클을 배에 싣고 일본으로 건너가 열흘 정도 열도를 여행한 이야기가 탁자 위를 점령했다. 나는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던 자정 무렵에, 그리고 다음 날 햇살이 산을 넘어오기 전 이른 아침에 우리 일행에게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는 것으로 내 임무를 마쳤다.

우리 일행은 최근에 새로 생긴 단양 만천하스카이워크 전망대에 올랐다가 창원으로 내달렸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의 종착지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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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둘째날 아침 원두커피를 내리는 내 모습을 일행이 찍어 주었다. / 조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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