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산 : 가벼이 올라 편히 오는 너는 이 도시 쉼표이어라
거창의 산 : 발길 닿는 곳마다 '거창'도 하다

가벼이 올라 편히 오는 너는 이 도시 쉼표이어라

진주의 산

산을 찾는 이에게 "왜 산에 가십니까"라고 물으면 십중팔구 "그냥 산이 좋아서 갑니다"는 답이 돌아온다. 특별한 약속이나 준비 없이 그냥 산이 좋아서 편하게 올랐다가 숨 한번 크게 내쉬고 원래의 자리로 쉽게 돌아올 수 있는 산이 자리한 곳은 어딜까. 산과 들, 강이 마치 세트 메뉴처럼 제공되는 진주가 그곳이다.

천년 고도의 역사를 간직한 충절과 교육·문화·예술의 고장 진주에서 만나는 산은 아주 높지도, 그렇다고 아주 웅장하지도 않지만 정상에 서면 산 아래 세상이 손에 잡힐 듯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서로 다른 모습의 낮과 밤이 친숙하게 다가오는 진주의 산은 여유로움의 상징이다. 산을 휘감고 돌아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유유히 흐르는 남강은 쪽빛으로 다가왔다가 어느새 해가 지면 오색 찬란한 빛이 함께 흐르는 밤 풍경을 선사한다. 이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진주의 산이다.

서부 경남의 중심도시 진주는 창원, 함안, 하동, 사천, 고성, 산청, 의령군 등 모두 7개 지자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어 사통팔달 막힘이 없는 도시다. 동서로 영·호남을 잇는 경전선 철도와 남해 고속도로, 남북으로 잇는 중부고속도로가 진주를 지난다. 이는 비교적 낮은 산이 많은 구릉 형태의 지형과도 무관하지 않다. 진주 전체 지형을 놓고 보면 오봉산과 방어산, 기대봉이 있는 동부와 집현산, 검무봉 등을 거느린 북부지역의 산세가 비교적 험하지만 1000m 고봉이 즐비한 인근 지자체와 비교하면 평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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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학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진주 시내 야경. 남강과 진주성이 어우러지면서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선사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진주 남강 어우른 산세, 삶 깃든 명당으로

진주에는 높은 산봉우리나 험한 산마루가 없다. 남강 주변의 평지를 둘러싼 산은 대체로 100~200m 정도다. 다른 시·군과 경계를 이루는 산이 500m 정도로 그나마 높은 편이다. 그렇지만, 진주는 고려시대부터 많은 속현(屬縣)을 거느린 큰 고을이었다. 옛사람은 이 땅을 두고 산하금대(山河襟帶)라고 표현했다. 산을 옷깃처럼, 강을 띠처럼 두르고 있다는 풍수지리의 개념이다. 특히 옛 진주의 고을 읍치(邑治·관아가 있는 고을 중심)를 둘러싼 산세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명당이라고 평가받는다. 한겨울 찬 북서풍을 막고 농사지을 물이 풍부하다는 말이다. 장풍득수에서 풍수라는 개념이 나왔듯, 진주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산세였다.

큰 고을 진주의 진산, 비봉산

진주 사람 중에 옛 MBC 진주에서 방송하던 <비봉산의 메아리>란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테다. 비봉산(飛鳳山·138m)은 남강과 함께 오랜 세월 진주 시민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고을의 진산(鎭山·국가가 지정한 고을 수호산)이었다.

비봉산은 산맥의 근원을 남덕유산(1507m)에서 찾는다. 남덕유에서 뻗은 산줄기가 황매산(1108m), 자굴산(897m)을 거쳐 집현산(集賢山·572m)으로 이어진다. 집현산은 현재 주봉이 산청에 속하지만 조선시대까지 진주 고을에서 가장 우뚝한 산이었다. 산 이름은 현자가 모인 산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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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봉산이 동서로 넓은 품을 펼쳐 진주 시가지를 감싸고 있다. / 유은상 기자

집현산이 남강을 향해 뻗은 줄기 끝에 비봉산이 맺혔다. 비봉(飛鳳)은 봉황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말한다. 예로부터 봉황은 제왕의 기운을 상징한다.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말도 있다. 또 봉황 이름을 지닌 산 아래서는 인물이 많이 난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고을 진산 중에 유독 비봉산이란 이름이 많은 이유다. 조선시대 지리서는 비봉산을 두고 '봉황이 날개를 크게 펼쳐 고을을 감싸고 있다'고 표현했다. 말티고개와 선학산(仙鶴山·135m)이 동쪽 날개, 두고개(137m)와 당산재(140m)가 서쪽 날개다.

현재 선학산 정상에 전망대가 들어서 있는데,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와 그 너머 진주성을 바라보는 전망이 특히 좋다. 비봉산은 진주 시민이 운동 삼아 즐겨 찾는 동네 뒷산이기도 하다. 실제 올라보니 동네 산치고는 숲이 깊고, 생명력이 넘쳐서 비범한 산이란 느낌이 든다.

봉황을 잡아라! 비봉산 수난사

비봉산은 고려시대까지 대봉산(大鳳山)이라고 불렸다.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한 진주 강씨가 터를 잡고 뿌리 내린 곳이 바로 대봉산 아래다. 이후 진주 강씨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대표적인 무인 가문으로 유명했다. 봉황은 이 가문의 상징이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대봉산 아래 진주 땅에서 많은 인재가 났고, 가문의 위세도 당당했다.

위세가 지나치게 높아져서일까, 진주 강씨 가문은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기도 했다. 당시 대봉산 위에 봉암(鳳巖)이란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 기운 덕에 강씨가 융성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고려 인종 때 이 소문이 '이곳에서 황제가 난다'는 모함으로 둔갑해 조정에서 봉암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나서 봉황이 날아가 버렸다는 의미로 산 이름을 비봉산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초에는 진주 강씨를 견제하려 비봉산 동쪽으로 산맥을 끊어 고개를 냈는데, 이것이 지금 말티고개다. 왕이 무학대사를 시켜 비봉산의 맥을 끊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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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진산에서 바라본 진주 풍경. 진주성 옆으로 푸른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 유은상 기자

하지만, 날아가려는 봉황을 붙잡으려는 진주 강씨 가문의 노력은 치열했다. 심지어 조선시대 진주 읍치 구성이 봉황을 붙잡으려는 장치로 이뤄졌다는 연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남강 변 대나무 숲이다. 대나무는 봉황의 먹이다. 지금은 진주교와 천수교 사이에 집중돼 있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진주성 건너편 강변이 대부분 대나무로 덮여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홍수를 막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봉황을 잡아둔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17세기 초 편찬된 진주목 읍지 <진양지>에는 신령한 기운을 보존해 고을이 망하지 않도록 대숲을 잘 보호하라는 당부가 적혀있다.

진주시 상봉동 주택가에 있는 봉란대(鳳卵臺,일명 봉알자리)는 알 낳을 자리를 만들면 봉황이 돌아온다는 조언에 따라 만든 것이다. 안내판에는 진주 강씨 가문이 날아간 봉황을 부르고자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봉란대는 원래 가야시대 고분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상부에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 유허비가 서 있고 그 아래 움푹 팬 자리에 봉란석(鳳卵石)이 있다. 진주 시내를 조망하는 또 하나의 명소 망진산(望晉山·178m)도 원래는 한자가 망진산(網鎭山)이었다고 한다. 그물망(網) 자를 써서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취지다.

옛 반성 고을 산과 자굴산의 또 다른 줄기

진주 동쪽 일반성면과 이반성면은 고려시대까지 반성현이란 고을이었다. 남강으로 합류하는 반성천을 따라 이 지역에도 일군의 산맥이 이어져 있다. 이반성면에 있는 영봉산(靈鳳山·397m)은 이 지역 중심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으로 만수산(萬壽山·456m), 보잠산(寶岑山·453m), 오봉산(五峰山·525m) 등 훨씬 높은 산이 늘어섰으나 예로부터 영험하기로 이 산을 최고로 쳤다. 옛 반성 고을 사람은 이 산에 올라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영봉산의 신령스러움은 서쪽 골짜기에 있는 용암사지(龍岩寺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돌부처, 석등, 어느 고승의 사리탑만 하나씩 남아 쓸쓸한 풍경이다. 하지만, 옛날 도선국사가 삼한 통일을 기원하며 선암사, 운암사, 용암사 세 개 사찰을 지었는데, 이 중 용암사가 바로 용암사지에 들어서 있던 사찰이다.

보잠산 줄기인 매화산(梅花山·140m)은 일반성면에 있는 신령한 산이다. 산은 낮아도 주변 지세가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한다. 역시 보잠산 줄기에 해당하는 작당산(鵲堂山·249m)은 까치가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 끝자락에 경남도수목원이 있다.

의령군 칠북면과 진주 대곡면 경계에는 망룡산(442m), 천황산(345m), 방갓산(381m) 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들도 자굴산 줄기에 속하는데,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오지다. 이정표나 안내표지가 없어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등산을 권하지 않는다. 이 산줄기가 남강으로 향하다가 강변에서 솟아 올린 봉우리가 송대산(松臺山·312m)이다. 정상 주변으로 산성 흔적이 있는데, 발견 당시 규모가 제법 커서 주목을 받았다. 조선 초기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는데 남강 전망이 훤해 진주로 통하는 뱃길을 장악하기에 좋은 요새였던 것 같다. 경남도 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돼 있다.

계절별 천의 얼굴, 지역민의 '진주'로

경남 대부분 지역은 산지가 많아 산이 지형을 대표하지만 진주는 남강이 지형을 대표한다. 이에 웅장한 산도 유명한 산도 쉽게 꼽기 어렵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산과 강이 어우러져 만들어 놓은 경치는 여느 산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 비봉산과 망진산에서 바라본 진주 시가지, 선학산에서 남강을 끼고 보는 일몰 풍경은 말 그대로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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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아산 장군대봉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진주시 문산 혁신도시 풍경./유은상 기자

특히 월아산은 진주 시민이 가장 많이 찾고 아끼는 특별한 산이다. 월아산은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면서 매력을 발산한다. 장군대봉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가히 압권이다. 국사봉에 서면 북쪽 남강 경치가 시원하게 팔을 벌려 반긴다. 봄, 가을이면 일교차 탓에 남강에서 피어난 물안개가 발아래 깔리면 환상의 세계로 변한다. 산 아래 금호지에 담긴 달 풍경 또한 한 번은 꼭 보고 싶은 경치다. 그러니 월아산은 한번 거쳐 갔다고 다 본 것이 아니다. 두고두고 다시 찾아야 할 산이다.

달을 토해내는 산

남강이 허리를 휘감은 월아산은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장사리와 진성면 동산리·가진리에 걸쳐 있다. 높이가 비슷한 국사봉(471m)과 장군대봉(482m)이 마주 보고 있지만 딱히 주봉이 정해진 것은 아니며 둘을 묶어 월아산이라 부른다. 다만,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서는 국사봉을 월아산으로 장군대봉을 장군대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월아산은 두 봉우리 사이로 떠오르는 달 모습이 마치 산이 달을 토해내는 듯하여 달엄산, 또는 달음산으로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다.

산행은 대부분 청곡사에서 시작한다. 청곡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예상외로 숲이 무성해 등산길에 발을 들이자마자 시원한 공기가 그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생각보다 경사가 심해 초반 다소 땀을 빼긴 하지만 1시간이면 충분히 장군대봉 정상에 닿을 수 있다. 한나절 간편한 산행에 적합한 곳이다.

이 때문인지 평일임에도 많은 등산객과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다. 신기한 것은 이 산에서 만난 사람의 표정이 더 밝다. 아무래도 가까이서 찾은 사람이 대부분이라 촉박한 산행 일정에 쫓기지 않고 제대로 여유를 만끽하기 때문이라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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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아산 국사봉 정상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풍경이 시원하다. 멀리 남강이 산자락을 휘돌아 흘러가고 있다. /유은상 기자

장군대봉 정상에 서면 시원하게 시야가 열린다. 482m 높이에서 보는 풍경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뿌연 연무 탓에 가까운 산과 시가지만 눈에 들어왔지만 맑은 날이면 지리산은 물론 남해 망운산, 광양 백운산, 사량도 지리산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장군대봉은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이 왜군을 막고자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했던 곳으로도 알려졌다.

장군대봉에서 국사봉으로 가려면 거의 산을 다 내려와 질마재에서 다시 올라야 한다. 질마는 길마의 사투리로 소 등에 짐을 싣고자 얹는 안장을 일컫는다.

질마재에서 국사봉을 오르는 길은 40분이면 넉넉하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지만 가끔 열리는 숲 사이로 금산면과 하대동 일대 풍경이 찾아든다.

정상에는 봉화대 같은 돌무지 탑이 쌓여 있다. 이곳은 가뭄이 들면 진주 목사가 직접 올라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 추정된다. 서쪽과 남쪽 전망은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북쪽과 동쪽으로 남강이 물돌이동을 이루며 유유히 흘러간다. 시원하면서도 아늑한 남강 풍경이 오랫동안 시선을 묶어 둔다. 물안개가 깔리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하면서 다음을 기약한다.

청곡사와 금호지

월아산이 진주 명산으로 사랑받는 데는 천년고찰 청곡사와 수려한 경관을 가진 금호지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월아산 아래 자리 잡은 청곡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8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도선국사가 남강 변에서 청학을 발견하고 뒤따라 왔는데 월아산 아래에 앉았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그 자리에 상서로운 기운이 충만한 것을 보고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후 청곡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면서 광해군 4년(1612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청곡사 불교문화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302호 영산괘불탱도 유명하다. 불화승 의겸 등이 제작한 이 괘불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인자하게 표현했다. 청곡산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고 절 뒤편에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면서 여름철 피서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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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곡사로 가는 길에 사리탑이 줄 지어 서 있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월아산 장군대봉에 이른다. /유은상 기자

금호지는 국사봉 줄기 아래에 있다. 둘레가 5㎞에 이르는 저수지는 신라 때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금호지에는 오래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청룡과 황룡이 하늘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한 장사가 용을 향해 싸우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고함에 놀란 청룡이 장사를 바라보는 순간 황룡이 비수를 찔렀다고 한다. 청룡은 곧장 땅에 떨어졌고 그때 꼬리에 맞아 움푹 팬 자리가 못이 됐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월아산에 올라 금호지 청룡에게 기우제를 지냈다.

금호지는 지금도 울창한 송림과 벚나무에 둘러싸여 산책코스로 제격이다. 특히 월아산이 토해낸 달이 못에 담기는 장면은 '아산토월(牙山土月)'이라 하여 진주 12경 중 하나로 꼽힌다.

"보약 챙겨 먹는다고 생각…뒤엉킨 생각도 말끔히 정리"

월아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표정이 밝았다. 친절을 베풀어주신 고영실(67·진주시 금산면) 씨는 더욱 그랬다.

2013년 교직에서 정년 퇴임해 이반성면 정수예술촌에서 '신지식인 도서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이틀에 한 번은 꼭 월아산을 찾는다. 그러면서 "산은 사람을 건강하게 만든다"며 산행예찬론을 폈다.

그는 "와사주생(臥死走生) 이라고 누우면 죽고 빨리 걸으면 산다는 말이 있다"며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퇴임 이후 더 바쁘지만 보약 챙겨 먹는다는 생각으로 산행은 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산행의 이점은 육체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화 없이 혼자 사색만 한다면 편협하고 편파적인 사고에 갇히게 된다. 반면 대화만 하고 사색을 않으면 깊이가 없어진다"며 "산을 오르며 지난 일을 반성하고 사색에 빠진다. 그러다 보면 머릿속이 정리되고 스트레스도 풀린다. 그러니 산은 육체를 넘어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고 말했다.

월아산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접근성 때문이지만 철쭉, 신록, 억새 등 계절 따라 다른 매력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평소에 산을 좋아했지만 멀리 가는 산행은 주객이 전도돼 지금은 가까운 이곳을 찾는다"며 "월아산은 때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일출은 물론, 물안개가 낀 날에는 천상에 온 기분이다. 매번 오르지만 지겹다고 여긴 적은 없다. 정말 명산이다"고 강조했다.

발길 닿는 곳마다 '거창'도 하다

거창의 산 

예로부터 크게 일어날 밝은 곳, 넓고 큰 밝은 들이란 뜻에서 유래한 거창(居昌)은 풍요의 땅이다. 경남의 서북부에 자리한 거창은 함양·합천·산청과 인접해 있으며 전북 무주, 경북 김천과 경계를 두고 있다. 분지 지형에 지리산·덕유산·가야산 국립공원의 중심에 있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거창에는 형용사 '거창하다'가 곧잘 어울리는 빼어난 산세의 이름난 산이 많다. 의상대사의 이야기가 있는 우두산, 암릉과 바위로 유명한 현성산, 고운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미녀봉, 거창의 진산인 삼봉산, '숨은 진주'로 불리는 보해산, 두 개의 소뿔을 의미하는 양각산, 방송사 TV 중계탑이 있는 감악산, 유안청 계곡과 지재미골을 거느린 금원산 등이 바로 거창을 대표하는 '거창한 산'이다.

장쾌한 능선이 아름다운 종주 산행 코스도 일품이다. 거창의 평균 해발고도가 200m 이상이지만 1000m가 넘는 고봉이 많은 만큼 종주 산행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사전 준비를 철저해야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 거창의 산은 어디로 올라도 발아래 세상이 한 폭의 그림이다. 여기에 사시사철 풍족한 농특산물은 덤이다. 거창이 자랑하는 다섯 가지 붉은 먹거리 '거창 5홍(紅)'이 있다. 맛과 크기에서 압도적인 사과, 항암·항바이러스 효능의 인터페론 함유한 돼지고기, 7년 연속 우수 축산물 브랜드로 인증된 애우(艾牛), 맛과 효능이 특별한 오미자, 단단한 과육과 저장성이 우수한 딸기 등은 건강한 생명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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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원산 지재미골 문바위. 우리나라에서 노출된 단일 바위로는 가장 크다. / 유은상 기자

거창 둘러싼 산세, 선비의 큰 덕처럼 웅숭깊구나

산고수장(山高水長).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수승대 곁 구연서원(龜淵書院) 커다란 비석에 쓰여 있는 글이다. 산은 높고 물은 유유히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의 덕이 높고 한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시대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던 요수(樂水) 신권(愼權·1501~1573) 선생을 이른다. 하지만, 산고수장은 산이 높고 계곡이 많은 거창지역 산세를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거창한 산등성이들

넓게 보면 거창은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3대 국립공원 가운데 있다. 지리산은 남쪽으로 조금 멀고, 주로 덕유산과 가야산에서 뻗어내린 산맥이 거창분지와 가조분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10개 이상인데, 대부분 소백산맥에 속한다.

북쪽에는 덕유산(德裕山·1614m), 삼봉산(三峰山·1255m), 수도산(修道山·1317m) 등이 남쪽으로 산줄기를 늘어뜨리고 있다. 덕유산을 중심으로 한 이 산군(山群)은 소백산맥의 허리가 된다. 이 중 삼봉산은 정상 봉우리가 3개여서 붙은 이름이다. 덕유 원봉(元峰)이라고도 하는데, 덕유산이 시작되는 맏형 같은 봉우리란 뜻이다. 삼봉산은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리며 뛰어난 경치를 자랑했다. 3이라는 숫자는 불심(佛心), 산심(山心), 무심(無心) 삼심(三心)사상이나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 사상과도 연결되어 옛사람이 영험한 산으로 생각했다. 실제 거창을 포함한 서부 경남 주민은 가뭄이 들면 삼봉산 금봉암에 있는 용머리 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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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 수승대 거북바위. 이황·임훈 등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 글이 바위 가득 새겨져 있다. /유은상 기자

동쪽에는 가야산에서 뻗어나온 우두산(牛頭山·1046m), 비계산(飛鷄山·1130m), 오도산(吾道山·1120m), 숙성산(宿星山·907m)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보해산(普海山·912m) , 금귀산(金貴峰·710m)과 함께 가조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서쪽으로는 고려시대 감음(感陰)고을 주산(主山)이었던 금원산(金猿山·1353m)과 그 줄기를 이루는 기백산(箕白山·1331m)과 현성산(965m·玄城山)이 우뚝하다. 남쪽으로는 거창의 안산(安山) 감악산(紺岳山·952m)을 중심으로 갈전산(葛田山·765m), 철마산(鐵馬山·774m), 월여산(月如山·863m) 등이 함양, 산청, 합천과 경계를 이룬다.

안의삼동의 으뜸 원학동

조선시대 거창과 함양 사이에 안의(安義)라는 고을이 있었다. 이 고을에 조선 선비라면 한 번쯤은 다녀가고 푼 곳이 있었으니 남도 제일의 명승이라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이다. 안의 고을에 있던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 3개 동천(洞天)을 말한다. 동천이란 산수가 빼어난 곳을 이르는 말이다. 화림동은 함양군 안의·서하·서상면, 심진동은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 원학동은 거창군 마리·위천·북상면 일대다.

조선 선비들은 이 중 원학동을 으뜸으로 쳤다. 원학동은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에서 위천면 수승대까지, 다시 수승대에서 월정계곡 상류까지를 통틀어 이르는 지명이다. 중심은 위천면 소재지로 수승대가 있는 곳이다. 수승대에서 보면 북쪽으로 덕유산이, 서쪽으로 금원산이 있다. 수승대를 지나는 물은 금원산에서 시작한 산상천과 남덕유산에서 시작해 월성계곡을 지나는 위천이 합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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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승대 관수루. / 유은상 기자

원학동은 안의삼동 중에서도 사대부가 가장 많이 살았다. 원래도 훌륭한 선비가 많았지만, 무릉도원이라 소문이 나서 타지에서 학문과 덕이 높은 선비들이 많이 찾았다. 수승대란 이름을 조선 중기 큰 학자 퇴계 이황(1501 ∼1570)이 붙인 것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수승대는 원래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신라와 백제가 세력 싸움이 치열하던 삼국시대 이곳에서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을 전송했다고 한다. 사신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항상 근심(愁)으로 보낸다(送)는 뜻이었다. 조선시대 들어 이황이 근처 마을 장인 회갑연에 참석했다가 당시 수승대 주변에 살면서 풍류를 즐기던 임훈(林薰·1500~1584), 신권과 만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한양으로 급히 가야 할 일이 생겨 아쉬운 마음으로 시를 적어 보냈다. 이 시에서 이황은 수송대를 수승대(搜勝臺)로 고쳐 부른다. 그는 보낼 송(送)자 이곳 풍경과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창 고을 진산 건흥산

조선시대 거창 고을 진산(鎭山·나라가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건흥산(乾興山·573m)이다. 사람들에게는 거열산성군립공원(居列山城郡立公園)으로 알려졌다. 이 산성은 거창이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이라는 부족국가일 때 쌓았다. 조선시대 지도에는 고성봉(古城峰)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싸우던 곳이었다. 지금은 경남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2호다.

건흥산은 그 뿌리를 삼봉산에 두고 있다. 옛날 가뭄이 들면 삼봉산에서 이어서 이곳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대부분 조선시대 진산이 그렇듯, 건흥산도 지금은 거창 주민들이 운동 삼아 즐겨 찾는 휴식처다. 산자락을 에둘러 거창읍으로 향하는 위천 주변으로는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또 등산로 입구에 약수터와 체력단련기구가 있는데, 실제로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이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40년 거창 산 가꾼 류형열 어르신

거창군 북상면 월성계곡이 흐르는 덕유산 자락에서 만난 류형열(79) 어르신은 40년 이상 조림사업을 하고 있다. 조림사업은 산에 이용도가 높은 나무를 심어 경제 가치를 높이는 일을 말한다. 어르신이 거창에서 본격적으로 조림을 시작한 게 지난 1973년이다. 박정희 정부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황폐해진 국토를 살리겠다며 산림녹화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할 때였다.

30대부터 임업에 뜻을 둔 어르신은 60년대 말부터 조금씩 산을 사서 나무를 심기 시작한다. 이른바 우리나라 임업 1세대다. 당시 어르신은 마산에 있는 신생기업 한일합섬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직장인 월급으로 어림없는 일. 다행히 아내가 운영하던 전자대리점 수입이 괜찮아 산을 계속 살 수 있었다.

경기 여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어르신은 어릴 적부터 산을 좋아했다. 중·고교 시절 이미 서울 근교 산은 다 섭렵했다. 한일합섬에 다니면서 처가가 있는 거창 산을 자주 찾았다. 거창이야말로 조림사업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 특히 덕유산 자락은 지리산보다 산세가 순해 나무 심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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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형열 어르신. / 유은상 기자

어르신이 덕유산 일대에 소유한 산은 약 260㏊, 거의 80만 평에 이른다. 그동안 심은 나무가 모두 60만 주. 조림률이 80%로 골짜기와 바위가 있는 곳 빼고는 다 나무를 심었다고 보면 된다. 가장 많이 심은 나무는 잣나무다. 잣나무는 최소 25년은 돼야 잣 수확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40년을 산에 투자해 이제부터 조금씩 돈이 벌리기 시작하는 셈이다. 어르신은 1993년부터 아예 덕유산 자락에 들어와 살면서 북상임산(北上林産)이란 임산물 가공·판매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어르신의 조림사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조림사업으로 괜찮은 수익을 얻으려면 적어도 80년은 돼야 해요. 저처럼 직접 산을 가꾼 1세대 임업인은 이제 많이 돌아가시고 안 계세요. 부모에게 물려받아 조림 경험이 없는 2세대는 대부분 산을 팔아버립니다. 수익이 없는 데다가 관리가 부담스럽거든요. 저도 언젠가 힘이 부치면 자손에게 물려주겠죠. 그때쯤이면 수익도 제법 많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이렇게 건강합니다. 이게 다 산이 주는 덕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시원한 물소리·청청한 바람 세상 시름 잊었노라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간다." 거창을 두고 한 말이다. 중앙관리가 발령을 받으면 너무 멀고 불편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왔다가 임기가 끝나 떠날 때면 인정과 산수에 반해 떠나기 싫어 울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거창에는 1000m 이상 기라성 같은 산이 10개가 넘는다. 이들 산은 남덕유산(1507m)에서 이어진다. 남덕유 남쪽 능선을 따라 월봉산(1279m)을 거처 금원산, 기백산(1332m)으로 흐르는 산맥을 진양기맥이라 일컫는다. 그중에서도 금원산이 빼어나다. 거창 대표 산으로 꼽아도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산이 높으니 계곡이 깊고 여기에서 흘러내리는 물 또한 좋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유안청 계곡과 지재미 계곡 또한 금원산을 거창 대표 산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라 하겠다.

유안청계곡

찔끔 장맛비 뒤에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폭염경보까지 내려졌다. 도내 지역들은 경쟁하듯 최고 기온을 갈아치웠다. 금원산을 찾은 날 거창 낮 최고기온은 34.9도. 도내 최고였다.

출발 전부터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았다. 괜찮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은근히 부담으로 밀려왔다.

금원산 휴양림 유안청 계곡에서 시작하는 산행 코스를 짰다. 임도를 따라 자운폭포를 스쳐 지나고서 유안청 2폭포 앞에서 숲속 계곡으로 발을 들였다.

순간 에어컨을 켠 듯 시원한 기운이 몰려온다. 폭포 소리는 효과음이 돼 체감온도를 더 낮췄다. '회사서는 더운 날 고생이 많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이곳이 더 시원하네…. 하하 천국이다'며 속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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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원산 유안청 제2폭포. 장엄하지는 않지만 맑은 물줄기와 우렁찬 소리가 한여름 더위를 잊게 한다. /유은상 기자

먼저 마주치는 유안청 2폭포는 누워 있는 폭포다. 부드러운 바위 위로 물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린다. 미끄럼을 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면 금세 유안청 1폭포에 이른다. 나무들이 장맛비 때 모아 둔 물을 토해내면서 제법 위용이 느껴진다. 폭포에 가까이 내려서자 기온은 더 떨어진다. 날리는 물 분자에 냉기가 가득 담겼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유안청은 조선시대 향시를 준비하던 선비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이 계곡 어딘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계곡과 폭포 이름에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계곡의 매력은 선비만 느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서 수백 명 남부군이 물속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했던 곳이 바로 여기다. 이곳이 죽음의 산을 넘나들었던 그들에게는 잠시 휴식처였던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40년이 지난 1993년 이곳은 자연휴양림이 됐다.

계곡 옆에는 사람들이 벌써 자리를 깔고 수박을 먹으며 이른 피서를 즐기고 있다. 신선이 따로 없다. 여전히 이 계곡은 사람에게 휴식과 안식을 주면서 사랑받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황금 원숭이 산

폭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2코스를 따라 산을 오른다. 금원산 정상까지는 2.7㎞로 2시간이면 넉넉하다.

금원산(金猿山·1353m)은 거창군 위천면, 북상면과 함양군 안의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황금 원숭이 산이라는 뜻이다. 멀리서 보면 산이 검게 보여 '검은 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언제부터 금원산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 이 산에서 날뛰던 금빛 원숭이를 어느 도승이 바위에 가두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계곡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기온이 올라가면서 후텁지근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임도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숨이 차오른다. 그래도 나무 아랫길이라 뙤약볕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스스로 달랜다. 아마 산속 기온은 산 아래보다는 대략 5도에서 7도가량은 낮은 것 같다.

쉬다 가다를 반복하면서 8분 능선에 오르자 하늘이 열린다. 그런데 어쩌랴 쏟아지는 땀을 지체할 수가 없다. 유안청 폭포의 시원함을 그리워하며 내 몸이 스스로 폭포로 변해버렸다.

능선을 타면서 경사는 다소 완만해졌다. 이번에는 계곡에서 느끼지 못했던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히며 위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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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원산에서 만난 소나무. 바위 틈에 튼튼하게 뿌리 내렸다. / 유은상 기자

머지않아 동봉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고 나서 주위를 살핀다. 멀리 덕유산과 이어진 고봉 준령이 손에 닿을 듯 쫙 펼쳐져 있다. 움츠렸던 가슴이 확 열린다. 멀리 두었던 초점을 가까이 당기자 이번에는 파란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잠자리 때가 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에서는 더위에 허덕이는 동안 이미 이곳을 가을로 향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250m가량 더 가야 정상이다. 하나 정상은 표지석만 있을 뿐 숲에 뒤덮여 시원한 전망을 내놓지 않는다.

사실 금원산은 계곡과 동봉 전망은 빼어나지만 육산인 탓에 기암괴석의 깎아지는 절경과 짜릿한 산행의 묘미는 제공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산객들은 대체로 금원산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진 현성산(960m) 또는 남동쪽으로 이어진 기백산 중 하나를 추가해 등산 코스를 완성한다. 이들 산 정상은 금원산에서 각각 4㎞ 떨어져 있으며 화강암이 노출돼 금원산이 주지 못한 2%의 짜릿함을 채워준다.

지재미계곡

금원산 아래서 보면 왼쪽이 유안청 계곡이고 오른쪽은 지재미골이다. 계곡의 풍광만 보고 따지자면 지재미골은 유안청 계곡보다 못하지만 문바위와 가섭암 마애삼존불 등이 있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문바위(門岩)는 금원산 휴양림 관리사무소에서 500m 떨어져 있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 계곡을 건너면 럭비공처럼 생긴 어마어마한 덩치의 바위 덩어리가 앞을 막아선다. 그 웅장함과 위압감에 주눅이 든다. 높이 50m 둘레 150m나 되는 이 바위는 옛날 가섭사 일주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노출된 단일 바위로는 가장 큰 것이라고 안내판이 일러준다.

바위에는 '달암 이선생 순절동(達岩 李先生 殉節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려말 두 왕을 섬길 수 없다며 지조를 지켜 순절한 이원달 선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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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원산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풍경. 첩첩 겹친 녹색 능선이 장관이다./유은상 기자

문바위를 돌아들면 가섭암 터다. 기와로 된 관리소 건물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ㅅ' 자 형태로 두 개의 큰 바위가 서로 기대 서 있다. 그 사이로 형성된 20㎡쯤 돼 보이는 굴 속 바위 면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고려 때 작품으로 보물 제520호로 지정된 가섭암 마애삼존불이다. 2m가량 높이의 가운데 불상이 아미타불, 양옆으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짐작된다. 아늑한 바위 굴의 분위기와 빼어난 조각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불상 표정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어진다.

지재미골 문바위와 가섭암 마애불은 힘들이지 않고 차를 타고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굳이 산행 계획이 없어도 더위를 피해 계곡에 발도 담글 겸 한 번쯤 찾아봐도 좋은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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