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렇게/하염없이/어여뻐도/된답니까.

시인 서덕준이 쓴 '능소화'란 시다. 능소화의 아름다움을 한 줄 시로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뜨거운 여름날 길을 걷다 보면 제법 흔하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 도심 공원이나 길가 그리고 옛날 집 담장 주변에서 하염없이 어여쁜 능소화를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꽃들은 봄에 피어난다. 가을에 피어나는 꽃들도 있다. 그런데 능소화는 꽃을 보기 어려운 한여름에 피어나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그래서 더욱 사랑받는 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능소화는 문학의 소재로도 다양하게 피어난다.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뚝 떨어지는 어여쁜 슬픔의 입술을 본다/그것도 비 오는 이른 아침/마디마디 또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 '능소화' 나태주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화무 십일홍/비웃으며/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오래 바라보다/손으로 만지다가/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기다리지 않아도/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하늘마저 능멸하는/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 '능소화'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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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의 아름다움과 특징을 가장 잘 노래한 시 두 편을 살펴본다. 나태주 시인의 시에서는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는 능소화. 툭 떨어지는 능소화 꽃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능소화는 가지 끝에서 자란 꽃대에 열 송이 정도 되는 큼직한 꽃송이가 달린다. 나팔꽃처럼 꽃잎이 둥글게 퍼져있어 커다란 입술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 송이 남짓 되는 꽃송이들이 차례로 활짝 피어났다가 통째로 뚝 떨어지는 꽃이다. 나뭇가지에서 한번, 떨어진 땅에서 또 한 번 더 피어나는 동백나무 꽃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어느 고택 담장에 능소화 꽃 활짝 피었단 소문 듣고 달려갔다가 초라하게 핀 몇 송이 꽃만 보고 돌아온 적이 있다. 한창 필 때는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피는데 약간의 간격을 두고 활짝 피어나는 능소화 꽃의 특징을 잘 모르고 달려갔던 것이다.

이원규 시인의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능소화는 조금 위험한 내용이 들어있다. 능소화 꽃가루를 눈에 묻히면 두 눈이 멀어버릴 수 있다는 표현인데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물론 시인의 표현이 꼭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애절하고 간절한 사랑을 시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한때 능소화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한다고 잘못 알려진 적이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능소화가 곳곳에서 능욕을 당하기도 했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꽃 속엔 한 개의 암술과 네 개의 수술이 있는데 이 노란 수술 끝에 달리는 꽃가루에 갈고리 같은 것이 있어 피부나 눈 점막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키거나 실명까지 이르게 된다고 알려진 것이다. 자기 집 마당에 있는 능소화는 물론이고 남의 집 담장이나 공원 또는 기타 공공장소에 있는 능소화를 모두 베어야 한다며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식물학자들과 관계 전문가들의 확인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자 현미경으로 확대해보면 표면이 그물 모양일 뿐 갈고리 같은 흉기는 없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다른 식물의 꽃가루도 자기 몸을 보존하고 번식을 잘하기 위해 보호 장치를 두고 있는데 유독 능소화만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능소화는 중국의 <시경>에 소지화란 이름의 꽃나무로 등장한다. 약 3천여 년 전부터 사람들이 심어 가꾸었던 나무였던 것이다.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연대는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능소화는 중국 남부 지방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추위에 약해 조선 시대 말까지만 해도 서울에서는 아주 귀한 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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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능소화.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능소화는 한자로 능가할 또는 업신여길 능(凌)자에 하늘 소()자를 쓴다. 담장이나 나무를 타고 오르다 허공에 꽃대를 뻗어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능소화라 이름 지은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이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서만 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상민의 집에서 능소화가 발견되면 관가로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흡착판이 있어 담장을 타고 오르는 기막힌 재주를 지니고 있어 주로 부잣집 또는 양반집 담장에 심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능소화가 화려한 팜므파탈의 꽃으로 묘사되는 소설이 있다.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그 무렵 그는(주인공 심영빈) 곧잘 능소화를 타고 이층집 베란다로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창문은 검고 깊은 심연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심연에 도달하지 못했다.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소설의 여주인공 유현금은 이층집에 살았는데 여름이면 현금이 사는 이층집까지 능소화가 기어 올라가 만발한 모습으로 피어났다. 유현금은 또 이렇게 회상한다. '능소화가 만발했을 때 베란다에 서면 마치 내가 마녀가 된 것 같았어. 발밑에서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이 온몸을 핥는 것 같아서 황홀해지곤 했지.' 소설가 박완서의 능소화 꽃에 대한 묘사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역시 소설가의 표현은 절정 그 자체다.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담장을 타고 오르는 능소화 꽃을 바라보면 우리도 그 아름다움의 절정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능소화 꽃이 지기 전에 한번 감상해 보면 좋겠다.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럴까. 능소화에 얽힌 이야기는 애절한 사연들이 많다. 소설가 조두진이 쓴 <능소화>에도 애절한 사연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 응태와 여늬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 속 부부는 능소화 피던 날 만나고 능소화 만발한 여름날 안타까운 이별을 맞이한다. <능소화>는 남자의 미라와 함께 발견된 한 통 편지를 모티브로 탄생한 소설이다. 1998년 4월 경북 안동에서 택지조성을 위해 분묘 이장을 하던 중 관속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나왔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관 속에서 발견된 미라보다 같이 묻혀있던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와 한글 편지였다. 미투리는 서른한 살 나이로 요절한 이응태의 부인이 자기 머리카락으로 삼은 것이었고, 한글 편지 역시 부인이 썼다. 부인이 쓴 <원이 엄마의 편지>는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국문학자가 해석한 전문을 소개해 본다.

원이 아버님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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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소화 핀 시골 담장.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당신 없이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으며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 적습니다.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보여주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속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4백 년 만에 발견된 <원이 엄마의 편지>. 그들의 끝나지 않은 사랑이 소설 <능소화>로 피어난 것이다.

능소화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도 나온다. '환이 눈앞에 별안간 능소화 꽃이 떠오른다. 능소화가 피어 있는 최참판 댁 담장이 떠오른다'라는 대목이다. 능소화의 아름다움과 능소화 꽃에 얽힌 애절한 사연들이 모티브가 되어 온갖 시와 소설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조금만 더 눈여겨 살펴보면 곳곳에서 능소화를 만날 수 있다. 경남에서는 김해 수로왕릉,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 능소화가 유명하다. 고성 학동 마을, 고성 박진사 고가 담장에 핀 능소화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전북 진안 마이산 탑사 절벽을 뒤덮고 있는 능소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다는데 요즘은 능소화의 아름다움을 아는 평범한(?) 사람들 집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길을 걷다가 담장 위에 솟아 있는 능소화 만나면 발길 멈추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도 꽃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문득 주인아저씨나 아줌마 또는 이웃 사람 만나 동네 집들 정탐하는 도둑으로 오해받는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혹 오해 받는 일이 생기면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도 좋겠다. "이 집은 양반집인가 봅니다. 능소화 꽃이 참 예쁘게 피었네요!", "집도 예쁘고, 능소화 꽃도 예쁜 것 보니 복이 가득 들어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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