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희의 '꽃밭에서'

1967년, 17살의 소녀 정훈희는 여름방학을 틈타 노래를 부르고 싶어, 남대문 인근 서울그랜드호텔 나이트클럽의 악단장으로 있던 작은 아버지를 찾아서 무작정 상경했다. 그녀는 줄리 런던의 '러브 레터(Love Letter)'를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고 있었는데, 마침 작곡가 이봉조(1931~1987)의 귀에 들렸다. 그녀의 노랫소리에 이끌린 이봉조는 클럽을 찾았고, 애띤 여고생이 부르는 재즈풍 발라드에 반했다.

이봉조는 그녀에게 "가시나, 쪼간한기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라며, 그 자리에서 자신이 색소폰 연주곡으로 발표했던 '안개'의 음반을 건네며 "집에 가서 멜로디를 외워오라"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안개 속의 야명주처럼 서서히 빛을 발하며, 대중 가요사의 한 획을 긋는 음악파트너가 되었다.

작곡가 이봉조를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색소폰 연주곡 '안개'의 멜로디를 외워오라고 한 이봉조는 그로부터 2~3주 뒤 밤에 정훈희를 데리러 왔다. 정훈희는 처음 찾은 스튜디오에서 신성일, 윤정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안개'의 주제곡인 동명의 곡을 릴 테이프에 녹음하였다.

원래 '안개'의 오리지널 버전은 가사가 완벽하지 않은 미완성의 형태로 남성중창단인 자니 브라더스가 먼저 취입한 곡이다. 노랫말이 완벽하지 못한 '안개'에 부랴부랴 가사를 의뢰했다. 세 개의 릴 테이프 데모 음반으로 만들어진 정훈희의 '안개'는 당대의 방송 3사 KBS, MBC, 동아방송에 보내졌고, MBC라디오를 통해 첫 전파를 탄 노래는 그날부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무렵 주류음악인 트로트와 차별되는 팝 스타일의 멜로디와 운치 있는 가사는 그녀의 비음 섞인 고운 음색과 더불어 대중을 단번에 매료시켜 버렸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서 여주인공 윤정희가 립싱크로 정훈희의 '안개'를 부르면서 세간에 더 많이 알려졌다. 한국영화의 표현영역을 한 차원 끌어올리며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 '안개'는,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며 노래도 걸작, 영화도 걸작, 소설도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영화의 흥행과 동시에 정훈희의 데뷔앨범은 무려 40만 장이 팔려나갔다. 단숨에 신인 유망주로 떠오른 그녀는 데뷔 4개월 만에 서울신문의 무궁화상, 대구, 대전 MBC의 10대 가수상, 영남일보의 신인상 등 5개의 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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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훈희의 ‘안개’.

'안개'를 발표한 지 3년이 지난 1970년 11월 20일, 정훈희는 국내 가수 최초로 국제가요제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운다. 38개국 44개 팀이 경연한 도쿄국제가요제에 참가한 것이다. 그녀는 데뷔곡 '안개'를 열창해 '월드베스트 10'에 입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국내 최초의 국제가요제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정훈희, 이봉조 콤비는 1972년 그리스 아테네국제가요제, 1975년과 1979년의 칠레국제가요제 등 무려 6번이나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면서 국가대표 여가수라 불릴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잘 나가던 정훈희에게도 시련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1975년 대마초 파동이 연예계를 강타했는데, 연루된 연예인 중 유일하게 훈방조치가 된 이는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그때를 기억하며 "칠레국제대회에서 상을 탄 1975년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 해입니다. 당시 제가 담배를 피웠는데 의혹만 있어도 잡아가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물결에 휩쓸려 6년간 노래를 못 했죠"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이후 그녀는 미국에서 그룹 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두 살 연상의 가수 김태화와 1979년 약혼을 했지만, 양가집안의 결사적인 반대로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하지만 정훈희, 김태화 커플은 1983년에 재결합하면서 첫아들을 낳았다. 한 스포츠신문에서 '미혼모 정훈희, 아들 낳았다'라고 크게 보도해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일도 있었다.

우리 토박이말을 잘 살려 쓴 가사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 해맑은 정훈희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더욱 정감이 가는 아름다운 노래 '꽃밭에서'는 불후의 명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를 둘러싼 이색 주장이 있어 흥미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종택 작사가의 작품이 아니라 세종과 세조 때까지 관직을 지낸 최한경의 한시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최한경이 성균관 유생 시절에 마음에 뒀던 박소저란 여인을 생각하며 지은 애틋한 시가 그의 자서전인 '반중일기(泮中日記)'에 실려 있는데, 봄날 꽃밭에 피는 고운 꽃을 보고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고백이 절제된 품격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최한경이 쓴 '좌중화원(坐中花園)'은 대략 다음과 같다.

좌중화원 담피요엽(坐中花園 膽彼夭葉):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혜혜미색 운하래의(兮兮美色 云何來矣):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작작기화 하피염의(灼灼其花 何彼艶矣): 아름다운 꽃이여 그리도 농염한지

사우길일 길일우사(斯于吉日 吉日于斯):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군자지래 운하지락(君子之來 云何之樂):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훈희는 2008년에 데뷔 40주년 기념 음반이자 '꽃밭에서' 이후 30년 만의 독집인 '40th Anniversary Celebrations'를 발표했으며, 현재 기장의 바닷가에서 '꽃밭에서'란 카페를 운영하면서 팬들과 만나고 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송이

루루루루루루루루루~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송이

루루루루루루루루루~

아름다운 꽃송이

- 이중택 작사·이봉조 작곡 '꽃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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