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예순 하나, 열정 쏟을 작품을 기다린다

연극 <관객모독>은 관객을 모독한다. 배우는 관객을 향해 뒤틀리고 꼬인 말을 내뱉는다. 욕설 강도는 후반부로 치달으며 더욱 거세진다. 관객은 연극에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기존 연극 틀에서 벗어나는 상황. 배우가 관객에게 물을 뿌리는 파격에 이르면 쾌감과 모욕감이 혼재한다. 1978년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관객이 배우 욕설에 답하며 의자를 던지던 순간, 배우 이상철은 무대에 있었다. 2017년 그는 지금 통영에 있다.

관객모독

이상철은 통영 용남면이 고향이다. 아버지는 전라도 판소리를 즐기는 호남자였다. 유성기가 놓인 처가에 들러 음악을 즐겼고, 술을 마시면 민요 '육자배기'를 불렀다.

이상철은 그런 아버지 영향을 받았나 보다. 서울 연극판에 몸은 담았으나, 마음은 마당극으로 향했다. 신촌역 앞 극단 76의 단원이었으나, 이화여대 앞 극단 민예에 마음이 갔다. 민예는 당시 마당놀이판에서 빛나던 윤문식, 박인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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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배우 이상철. /최환석 기자

스무 살 이상철은 처음 무대에 올랐다. 극단 일은 이전에도 했다. 고등학교 은사의 친구, 희곡작가 김일부가 만든 극단에서 잡일을 했다. 전화를 받고 청소를 했다. 연극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도대체 연극은 무엇인가'하는 의문만 있었다.

1976년 극단 76이 생겼다. 그해에 생겨서 76이다. 이상철도 극단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듬해 몸담았던 극단을 그만두고, 그해 3월 76에 입단했다. 무엇이 그를 배우로 이끌었나. 아버지가 물려준 정서가 그를 배우로 만들었나 보다.

극단 76은 <관객모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대본은 모조리 서술체다. 배우 수도 정해있지 않다. 이전 연극과는 판이하였다. 극 속에 관객이 몰입하는 일을 거부한다.

"기존 연극, 통속극과 정통연극을 비판하는 극입니다. <관객모독>은 이성적으로 봐야 해요. 순간에도 감정을 단절한다. 무리한 관객 개입을 막습니다."

독특한 공연장 구조도 한몫을 한다. 관객을 무대에 앉히고, 배우는 객석을 무대 삼았다.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관객은 공연장 밖으로 나가질 못한다. 불친절한 연극이다.

배우는 관객에게 욕을 쏟아낸다. 점차 수위가 세진다. 욕은 교감을 하는 데 가장 빠른 수단이다. 장애물 없이 허공을 뚫고 그대로 와 닿는다. 면역이 없으면 감당하기 어렵다.

"한 관객이 술에 취해 공연을 보러 왔습니다. 술도 마셨겠다, 욕을 들으니 화가 났나 봐요. 갑자기 의자를 던졌습니다. 객석 위 조그만 조명을 때려 빛이 나갔어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후엔 표에 '음주자 입장금지' 문구가 들어갔습니다."

기국서, 장현, 이호재, 전무송

극단 76에는 기국서·주봉 형제가 있었다. 이상철은 기국서 사고에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자신과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고 느꼈다.

"이 양반, 재미없는 희곡을 아이디어 짜내 아주 재밌게 만들었어요. <햄릿>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빌렸습니다. 왕 취임 장면에 전두환이 겹쳤어요. 전두환이 연단에서 연설하는 그 모습이었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이라고 써서 검열을 피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모두 바꿨습니다. 공연을 본 평론가는 모두 기립 박수를 쳤어요. 관객은 배신당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기국서를 모르는 관객은 세익스피어 작품을 보러왔으니까요."

배우도 기국서와 밤새 다퉜다. 장면의 필요성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배우는 당위성이 있어야 행위를 한다. 연출가는 배우를 설득해야 한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었다. 전두환을 연상케 하는 왕, 교련복을 입힌 허수아비, 그 위에 뿌려진 피가 광주를 떠올리게 했다. 파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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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배우 이상철./최환석 기자

서울 16년, 부산 3년, 나머지 방황을 뺀 이상철 삶은 통영에 있다. 고(故) 장현, 통영 극단 벅수골 전 대표가 그를 통영에 남게 했다. 집안 사정으로 통영에 돌아왔던 이상철은 연극과의 인연을 잠시 거뒀다.

다시 시작한 때는 1984년. 장현이 그에게 함께하자고, 머물라고 말했다.

"걸핏하면 서울 간다고 했습니다. 많이 싸웠어요. 그래도 서울 갈 생각이었습니다. 장 전 대표가 갈 때 가더라도 이 작품으로 경남연극제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해평들녘에 핀 꽃>이었어요.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주는 연기상인가 뭔가를 주더라고요. 경남연극제 참가 첫해인 1985년 받은 상이었습니다. 그렇게 통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서울에 머물 때다. 이상철은 서울예전 드라마센터에 자주 공연을 보러 갔다. 퇴계로에서 터벅터벅 걸어서 갔다. 당시 유명했던 배우가 이호재와 전무송이었다.

"이호재, 전무송 출연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습니다. 이 작품을 좋아해요. 의자에 기대어 관람했습니다. 끝날 때 알았습니다. 내가 궁둥이만 겨우 붙이고 앉아 있더라고요. 이호재라는 배우에게 푹 빠졌습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그들이 출연하는 작품은 거의 다 보러 갔습니다. 이호재는 수염을 기르고 야전 상의를 물들여 입고 다녔습니다. 전무송은 청바지 하나도 깔끔했어요. 대비되는 두 사람이 무대에서 보여준 앙상블은 그래서 더욱 빛났습니다."

여유와 열정 사이

이상철은 가끔 서울 친구를 만난다. 배우들이다. 그들은 이상철에게 왜 통영에 남았느냐고 묻는다. 이상철은 "지금 내가 어때서"라고 되받는다.

"유명세를 탄 친구도 많습니다. 비교는 가능하나, 지금의 저는 행복이 먼저입니다. 서울에서 16년을 살았어요. 당시는 몰랐습니다. 지금은 서울 가면 숨이 턱 막힙니다. 아내는 내가 1년에 몇 번 집을 비운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어요. 걸핏하면 나가서 한 달가량 연습하니까. 작품이 없으면? 안 나갑니다. 편안해요. 서울 친구는 내가 편안해 보인다고 합니다. 삶이 즐거워 보인다고. 그들은 치열하게 살아야 해요. 어린 PD 눈치를 봐야 합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수입을 따지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마음은 편합니다."

이상철도 치열하게 공연했다. 서울 연극판에서는 사투리와 싸웠다. 말 속에 부드러움을 갖춰야 무대에 설 수 있는 때였다. 누구보다 고생했다. 어쩌면 그래서 극단 민예에 눈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민예를 놀러 가니 나와 맞았습니다. 매일 다른 극단 가서 논다는 말을 들었어요. 사물(四物)이 있으니 배웠고, 소리하는 사람 있으니 귀동냥했습니다. 시조창도 전문적으로 배웠습니다. 사투리를 사용할 기회도 있었어요. 정서적으로 편했습니다."

희극과 마당놀이를 오가며 얻은 체험이 지금 이상철을 만든 셈이다.

부산 생활 3년은 한 작품과 다음 작품 사이가 짧았다. 부산에서는 주로 일인극을 했다. 방송도 탔다. 소문이 났다. 자연스레 다른 극단 대표들과 술도 마시게 됐다. 같이 작품 하자는 요청이 이어졌다.

이상철은 부산 연극판에 계약문화를 정착시켰다. 배우가 작품을 하고 제대로 삯을 받는 시대가 아니었다. 당시 이상철은 30대 후반이었다.

"칼같이 계약을 했습니다. 받든 안 받든. 이전엔 구두 계약이었어요. 계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서울에 있을 때부터 했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제작비, 수익분기점 다 까놓고 말해달라'. 수익이 나쁘면? 제 몫을 달라고 말 못하죠. 어쨌든 계약을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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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배우 이상철./최환석 기자

배우 이상철, 사람 이상철

이상철은 2005년 23회 경남연극제에서 마산 극단 '객석과무대'와 작품을 함께 했다. <꽃마차는 달려간다>였다.

"사연 있는 작품입니다. 그해 저희 극단은 연극제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객석과무대 문종근이 단역 하나 맡아달라 부탁했어요. 작은 역할이라 말해서 갔습니다. 연극제 30일가량 남은 시점, 다른 배우는 이미 연습에 돌입한 상황이었어요. 김태수 작품은 대사 분량이 많습니다. 문종근이 나보고 주인공 대사를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왜 내가 이걸 읽느냐고 했어요. 나보고 해야 한다더라고요. 그 길로 낚여서 여관방에 앉아 팬티만 입고 대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았어요. 문종근이 나보고 하는 말이 '천재'랍니다."

이상철이 출연한 작품 수 140여 개. 많을 때 한 해 네다섯 작품, 평균 한 해 세 작품을 했다. 이상철은 말한다. 연극쟁이에게는 출연한 작품 전단과 표, 대본만 남는다고. 한두 개는 빠졌을지 몰라도, 지금까지 공연한 작품 전단은 모두 들고 있다. 요즘 아내 조언으로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작품이 없는 때에 이상철은 그냥 잡기에 능한 통영인이다. 아내 출근 시간 오전 7시 50분, 그전인 오전 6시 40분에 잠에서 깬다. 집 앞에서 산책을 하고, 아내를 배웅한다. 그게 예의란다.

나머지 시간엔 멸치 판매업을 시작한 친구 사무실에 나가 공간을 채워주고 온다. 앉아서 책을 읽고, 인터넷 바둑을 둔다.

"아내가 컴퓨터를 없앴습니다. 대신 책을 사줘요. 불만은 없습니다. 그만큼 인터넷 바둑에 미쳤었으니까요. 지금은 친구 사무실에 앉아 한두 번 둡니다. 제가 잡기를 좋아합니다. 낚시도 즐겨요. 욕지도에 자주 가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한겨울에도 갑니다. 좋아하는 볼락을 잡으러 다녀요. 재미로 갑니다. 밤엔 별이 멋져요. 낚시는 민물낚시처럼 합니다. 낚싯대 걸쳐 놓고 찌만 보고 있습니다. 심심하면 낚싯대 들었다 놨다, 주변을 서성이기도 하죠. 바둑은 판 끝날 때까지 꼼짝 못 하지만, 낚시는 달라요. 그래서 좋습니다."

다시, 배우 이상철로 돌아와서.

"다작보다는, 한 작품을 하더라도 제 체질에 맞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모든 열정을 쏟아낼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 후배에게는 간섭하는 선배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함께 호흡하면서 서로 배우고 싶어요. 저 스스로 즐겨야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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