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막연했던 꿈을 현실로 이루다

노철효(51) 유림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는 사람 좋은 인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일 관련 얘기 때는 매서운 눈매를 보이기도 한다. 지난날 시간이 응축된 모습이기도 하다. 노 대표는 지금까지 늘 미래에 대해 긍정을 잃지 않았다. 때로는 마주한 현실에서 바닥을 경험하기도 했고, 그것을 굳세게 딛고 일어섰다.

"건강관리 하듯 건물·교량도 마찬가지"

노철효 대표이사가 이끄는 유림건설주식회사(창원시 마산회원구 소재)는 시설물 유지관리업체다. 개량·보수·보강공사를 전문으로 한다. 최근 창원시 봉암교 상판 교체, 저도연륙교 새 단장 작업에 참여했다. 2000년 법인 설립 이후 현재 매출 규모는 100억 원가량이다.

"사람들은 건강관리를 꾸준히 하잖아요. 건물·교량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점검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 한 번에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 있습니다. 저희는 안전진단보다는 보강 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경남에만 관련 업체가 260개 됩니다. 저희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도 꾸준히 일을 맡고 있습니다. 여러 특허 등 저희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한때는 이익 가운데 절반을 기술연구에 투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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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철효 유림건설주식회사 대표. / 박일호 기자

1986년 천안독립기념관에서 부실시공에 따른 화재사건이 있었다. 이때 부실시공을 근원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여러 대책이 나왔다. 그럼에도 1991년 팔당대교, 1992년 창선대교와 신행주대교, 1993년 청주 우암상가 아파트, 1994년 성수대교,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대형 건설사고가 잇따랐다. 교량·건물 등 시설물 유지관리 및 보수 중요성이 계속 확산했다. 처음부터 튼튼하게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노후화될 수밖에 없기에 지속해서 관리·점검하자는 것이다. 노 대표는 현재 이 분야 중심에 있는 것이다. 대한시설물유지관리협회 경상남도회 부회장도 맡고 있다.

지난해 9월 경주 지진 이후 건물·교량 등에 대한 안전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내진 관련 일감도 많이 늘었다.

"국내에서 7.0 이상 지진이 일어나면 치명적이라고 봐야죠. 그동안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죠. 다행히 경주 지진 이후 정부에서도 내진 설계 방안을 마련해 다행입니다. 다만 실무 공무원들 안전인식은 여전히 뒤따라 오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노 대표는 지난 2015년 말 안상수 창원시장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지역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를 요청하기도 했다.

"지역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자재·인재를 이용해 달라고 늘 강조합니다. 그래야 선순환으로 지역기업도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지역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치단체장들도 이에 공감합니다만, 실무 담당자들로 내려가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는 겁니다."

노 대표는 '소형 이동형 별장'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또한 관광 연계 사업에도 눈길을 두고 있다. 옛 경남도지사 관사(현 경남도민의 집)를 관광용 한옥으로 꾸미자는 제안을 경남도에 하기도 했다. 아예 직접 매입해 추진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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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철효 유림건설주식회사 대표. / 박일호 기자

서른 살에 찾아온 위기

노 대표는 함안 가야면에서 태어났다. 1녀 3남 가운데 셋째였다. 어릴 적부터 소몰이도 하며 부모님 농사일을 도왔다.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성적은 거의 하위권이었고요. 그 시절엔 누구나 꿈 하나 정도는 있을 텐데, 저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지금 너희들이 공부를 잘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부자가 될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잘살 자신이 있다'고 말이죠.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대한 동경은 아니었습니다. 뭔가를 열심히만 하면 잘 될 수 있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워낙 열심히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영향 같기도 해요."

그는 고등학교 시절 큰 방황을 겪는다.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6개월간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자퇴했다. 그리고 부산지역 인문계고교에 진학했다. 동갑내기들은 고3인데 자신은 고1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현실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 밖에서 오토바이를 타며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은 여전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독일 외제 차를 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 본사에 편지를 써서 카탈로그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실제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그걸 늘 가방에 넣어 다녔습니다."

부침은 컸지만 그래도 졸업은 했다. 이후 군대에 갔고, 그 전후로 자신의 미래 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처음부터 직장생활에는 마음 없었습니다. 사업이 제 갈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떠한 분야로 시도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농산물 가공제조, 요트 연계 관광산업 쪽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군 제대 후 막노동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건설분야 일에 마음이 가더라고요. 이쪽 세계는 사회 구성원이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리고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한 동네를 보면서 개선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1989년 24살 나이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건설현장 일당 1만 8000원을 아껴 조금씩 모은 돈, 형한테 빌린 200만 원을 사업 자금으로 마련했다. 사업분야는 당시 용어조차 생소한 '리모델링'이었다.

"없는 돈을 쪼개 신문 1면에 '건물·주택 등을 리모델링 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이재욱 노키아티엠씨 당시 회장님이 그걸 보고 연락주셔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죠. 어쨌든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일감이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자본이 열악하다 보니 제가 일당백으로 일했습니다. 주변에서 '저렇게 일하다 쓰러지겠다'고 걱정할 정도였죠. 한번은 아버지가 제 일하는 현장에 오셨습니다. 저를 보더니만 데리고 나가서는 옷 한 벌 사 주시더라고요. 제 행색이 워낙 초라하게 보였던 거죠. 이렇듯 하루하루 열심히 개척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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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철효 유림건설주식회사 대표. / 박일호 기자

하지만 서른 살 즈음 큰 시련을 맞는다. 거래처 자금 사정으로 공사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잇따랐다. 그게 쌓이면서 결국 주저앉게 된 것이다.

"자금회전이 되지 않는 '흑자도산'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밥 먹을 돈조차 없었습니다. 방황 정도가 아니라, 삶의 끈마저 놓으려 했습니다. 실제로 나쁜 마음을 먹고 지리산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늘 저를 포근히 안아주셨던 어머니 마음을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1년 넘게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예전처럼 리모델링 사업을 이어나갔다. 물론 변화는 있었다. 수주 대상을 민간 아닌 관공서로 한정했다. 그러면서 사업이 차츰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IMF 때에도 일이 끊기지 않을 정도였다.

노 대표는 이후 2000년 시설관리분야로 전환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시 마음의 끈 동여매는 이유

노철효 대표는 사업 정착 이후인 서른 36살에 결혼했다. 현재 딸 둘과 아들을 두고 있다. 그는 공부를 뒤늦게 다시 시작했고, 올해 부산해양대학교를 졸업했다. 요즘은 뜸했던 등산에 다시 열중하고 있다. 고교 시절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싶은 마음도 불쑥불쑥 찾아온다.

"오토바이 얘기를 꺼내면 아내가 '아들이 오토바이 사 달라고 하면 사줄 거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하죠. 아내는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제가 못 이기죠. 하하하. 그래서 산악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다른 곳에 눈 돌리게 마련이다. 그는 한때 정치를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상공회의소 위원을 맡고 있어서 그런지,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왔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며 주변 의견을 구했습니다. 우선 아내 반대가 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좋은 벗을 잃고 싶지 않다'며 극구 말리더군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죠. 결국 스스로 '사업가는 사업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마음 접었습니다. 저는 지난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는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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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철효 유림건설주식회사 대표. / 박일호 기자

그는 10·20대를 대상으로 하는 'CEO 특강'에도 종종 나선다. 저마다 꿈을 안고 있는 친구들에게 몇 가지를 강조한다.

"젊은 친구 대부분은 처음부터 욕심을 둡니다. 큰 것만 바라보는 거죠. 그보다는 목표를 구체화해 단계적으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내 형편과 실력에서 뭘 해야 할지부터 정해서 그 범위 내에서 이뤄가야 합니다. 작게 시작하면 잃을 게 작잖아요. 성과 내기도 쉽고 그에 따른 성취감도 크고요. 저 역시 사업 초창기 때 적은 돈으로 당장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몇 년 안에 달성할 구체적 목표를 정했습니다. 결혼할 때 이러한 제 생각을 말했더니, 아내가 더 신뢰하더라고요."

그는 고등학교 때 동경했던 외제 차를 38살에 처음 탔고,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부자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어느 정도 현실로 이뤘다. 하지만 스스로 '그냥 부자' 아닌 '행복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심적인 부자가 진정한 부자죠. 예전에는 금전적인 목표를 우선으로 했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두려 합니다. 그래서 한때 일도 좀 줄여나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사회 소외된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그는 사단법인 경남동그라미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 단체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질병을 계속 안고 사는 청소년·청년들을 돕고 있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141명의 수술·치료를 지원했고, 현재도 15명을 돕고 있다.

"한 지인이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해보는 건 어떠냐'고 하더군요. 이제 그것을 실천하려 합니다. 경남동그라미회 운영위원장을 맡았는데요, 의사분들이 재능기부를 하지만, 아무래도 후원금도 많이 필요하죠. 최근 사업적으로 마음의 여유를 두고 있었는데, 다시 목표를 정해 열심히 뛰어야겠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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