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에는 거제가 있다

거제의 주산인 계룡산을 올라보면 동북에는 조선소의 망치 소리가 천둥 치듯 하는 아파트 숲이 울창한 고현이며 서남에는 섬에서 가장 넓은 들판과 가장 큰 만이 펼쳐진 거제면이 있다. 양쪽 모두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바다는 작은 섬과 곳이 싸안고 도니 들은 넉넉하고 바다는 잔잔하다. 가히 두 곳 모두 한 고을의 도읍이 될 만한 곳이다.

거제를 여행하시다 길거리에서 시청이 어디 있는지 거제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시면 아주 헛갈리는 대답을 듣게 된다. 어떤 이는 '신현'에 있다 그러고 어떤 이는 '고현'에 있다 그런다. 신현과 고현이라…. 무슨 1청사 2청사로 나뉘어져 있는 걸까? 아니다. 청사는 분명 하난데 신현에도 있고 고현에도 있다. 아리송하다면 옛길을 또 되짚어 올라 보자. 역사 시간은 아니다. 연도 찾아가며 미주알고주알 캘 필요는 없고 거제면과 고현 신현의 이름 유래만 찾아본다.

123.jpg
▲ 고현 또는 신현. / 박보근 노동자

고려 원종 때 섬을 비우고 거창 가조현과 진주 영선현으로 피난했던 거제현이 조선 세종 때 돌아와 지금의 시청 주위로 둘러싼 읍성에 치소를 두었다. 조선 전기까지 도읍으로 융성하던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순신의 옥포해전 후폭풍을 맞아 쑥대밭이 되었다. 옥포해전은 바다 가운데서 서로 싸운 것이 아니라 옥포만에 쳐들어온 왜군이 뭍에 올라 분탕질을 하는 사이 이순신 장군이 포를 앞세운 충파(배를 부딪쳐 침몰시키는 전법)로 이긴 전투다.

왜선은 몽땅 격침시켰지만 뭍에 올라있었던 왜군의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배를 잃고 도망갈 곳이 없어진 왜군들은 당연 섬을 빼앗아 점령한다. 옥포에서 송정고개와 디지기재를 경유하여 고현성을 함락한다. 이후 왜군은 거제 곳곳에 왜성을 쌓고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섬을 유린했다.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은 조선 수군의 첫 승리로 조선군 사기를 크게 드높였지만 낙오한 왜군들에게 능욕당한 거제 사람들에게는 미완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거제면 전경.jpg
▲ 거제면 전경. / 박보근 노동자

전쟁이 끝나고 현종 때 현제의 거제면 청사 자리로 거제현을 옮기고 옛 현청이 있던 곳이라 하여 고현이라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일본 강점기까지 거제면이 도읍이 되었다가 1950년대 거제군 청사를 고현에 두면서 새로 정한 도읍이라 하여 또다시 신현이라 하였다. 한 곳의 지명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신현이란 지명도 쓰지만 거제 사람들은 보통 고현이라 부른다.

조선 중기 이후 도읍이 되었던 거제면은 그 이전에도 명진현이라 불리며 넉넉하고 번성한 곳이었다. 현재 거제의 도읍은 시청이 있는 고현이지만 거제의 관아인 기성관과 질청, 향교, 서원 등 치소의 유적들은 모두 거제면에 있다.

자, 그럼 제대로 거제면 길놀이를 나서 볼까? 외지에서 거제면을 바로 들르고자 한다면 거제대교와 거가대교로 들어와 사등면 사곡에서 두동터널을 지나면 바로 거제면 옥산리에 이른다. 여기서는 어차피 갯길따라 나선 참이니 여차 홍포 해안길 지나 동부면 산양천을 건너 거제 속 거제로 들어선다.

123.jpg
▲ 명진마을(왼쪽)과 비파나무로 된 생울타리(오른쪽). / 박보근 노동자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계룡산과 선자산을 병풍처럼 두른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명진마을이다. 비파나무로 생 울타리를 두른 마을 길을 들어가는데 여태껏 지나온 마을마다 보이던 것이 하나도 없다. 거제도 구석구석 하다못해 노자산 오르는 산기슭에까지 있던 그것. 알록달록 펜션 건물이나 민박 간판이 하나도 뵈질 않는다. 산자락을 일구고 들판을 갈아엎어 먹고 사는 오롯한 시골 마을이다.

옛 거제현의 속현 명진현이 있었던 마을로 그 역사가 신라 시대에 이른다 한다. 관광지 거제에서 오로지 농사나 어업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몇 안 되는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 오빠가 60대이다. 알로에를 수확하고 난 빈 하우스에 개 사료를 주러 나온 어르신께 요즘 돈 될 만한 작목은 무엇이냐 여쭈었더니 손사래부터 치신다.

"함부래이. 정 할끼 없으모 백 원짜리 소주병이라도 주워 파소. 여게 들어와서 손가락 빠는거보담 훨씬 나을 끼요."

귀농하려고 묻는 줄 알았나 보다. 90년대 초반 거제면과 둔덕면 일대 들판은 온통 파인애플 농사를 짓는 하우스가 빼곡했단다. 그러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UR(우루과이 라운드)이 체결되면서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고 정부의 지원마저 끊겨 파인애플은 점차 사리진다. 농사꾼은 빈들에 풀이 차고 묵정밭이 되는 꼴을 볼 수 없다. 신선초와 알로에를 심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계약사의 갑질 담합과 판로 문제로 가격이 폭락하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지금은 그 들판을 한라봉 하우스가 차지했다.

123.jpg
▲ 거제 한라봉. / 박보근 노동자

들판에서 알로에 수확이 끝나고 잡초가 우거져 범이 새끼 칠 것 같은 빈 하우스를 지나 한라봉 열매가 달려 있는 농장을 찾았다. 돈이 좀 되냐는 물음을 던지자 나무 아래 냉이를 캐던 할머니가 호미를 던지고 한숨부터 쉰다. 비닐값이야, 기름값이야, 비료에 농약값까지 자고 일어나면 오르는데 이놈의 애물단지는 생콩을 갈아 먹었는지 줄줄 내리기만 한단다. 벌여 놓은 일이라 덜컥 접지도 못하고 영농자금 빌린 것을 갚아가기는커녕 이자가 원금 되고 그 이자가 또 원금 되니 앞날이 캄캄하단다. 그나마 똥금인데 인건비가 비싸 놉을 들이지도 못 하고 노부부 두 사람이 일을 하다 보니 수확 시기조차 놓쳐 버렸다.

이런저런 하소연에 안타까운 마음만 비치고 돌아서는데 가시는 길 입이나 다시라며 한라봉 몇 알을 쥐여 주신다. 이제 저분들이 곡괭이며 삽을 내려놓으면 이 들판은 어찌 될까. 봄이 다 지나가도록 종자 망태기 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빈들 깜부기 그을음만 폴폴 날릴 것을 생각하니 찬바람에 등골이 오싹하다.

123.jpg
▲ 거제 향교. / 박보근 노동자

비파나무 생 울타리를 다시 지나 마을 회관 앞에서 들을 바라보니 빈 들이 아니다. 들판 끝닿은 곳까지 뿌리를 뻗친 듯 가지는 앞바다에서 계룡산 기슭까지 아우른 듯 위풍당당한 지킴이가 있다. 수령 600년 정도로 추정하는 느티나무다. 어르신들은 신라시대 이곳에 명진현 치소가 있을 때부터 있었던 나무라고 믿고 있다. 나무는 이 들을 지켜오면서 계룡산과 선자산 사이 고자산치로 넘어오던 오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밤새 오라비의 영혼을 달래 주었을 것이다. 한산 앞바다에서 쫓겨 들어온 왜적들에겐 귀면의 형상을 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것이다. 때론 바다일 나간 서방님을 기다리는 아낙의 정화수에 찰랑찰랑 맑은 달빛을 담아 무사한 임을 비추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이 들을 지켜 왔으니 또 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에라도 종자 망태기 든 이가 하나라도 들에 보이면 바람에 가지를 흔들어 답하리라 믿는다.

거제면에서 가장 번화한 기성관 앞에 서면 이곳이 왕년의 도읍이었음이 실감 난다. 계룡산을 주산으로 하고 좌로는 선자산 우는 산방산을 두었다. 남산을 안산으로 놓고 과거 동헌이 있었던 면사무소에서 바라보면 한양의 축소판이 느껴진다. 동헌과 객사나 연회 장소로 쓰이던 기성관, 아전들의 집무실로 육조 격인 질청, 그 앞으로는 육의전 격인 재래시장이 있고 반곡 서원과 거제 향교도 근처에 있다. 기성관 뒤 북악산에 해당하는 수정봉 정상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축성된 옥산 금성에 오르면 거제면의 풍광과 역사가 모두 보인다. 산 정상 성내에는 연못이 있는데 신기하게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들과 바다를 지키는 이들이 가물어도 마르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게 나랏일 아니겠나.

기성관.jpg
▲ 기성관 대문. / 박보근 노동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