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시위대에서 '따봉' 광고 기획자까지

남해에서 태어나 취직과 함께 서울에 자리 잡은 박봉환(56) 씨는 업계 톱클래스 광고기획자로 이름을 날리다 현재는 '봉브랜딩'(BonBranding)이라는 1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1979년 경남대 1학년 시절 부마민주항쟁을 겪기도 했던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 다양성의 추구와 그에 대한 존중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부마항쟁, 그리고 카피라이터로의 길

Q. 고향인 남해를 떠나 서울에 온 시기는 언제였고 계기는 또 무엇이었나요.

"초·중학교는 남해에서 나왔구요, 고등학교는 진주, 대학은 마산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대학 4학년 때인 1985년 겨울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남해 한 중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일하셔서 집안 형편이 어려운 건 아니었는데 자식이 8남매나 됐어요. 대학에 다니는 형님도 있었고, 어떻게든 저 혼자 먹고살아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4학년 때 직장을 구하겠다고 서울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던 중이었는데 작은 광고기획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게 됐습니다. 당시 집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고양(능곡)이었고 현재도 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Q. 경남대 국어교육과 출신으로 아는데, 전공과 무관한 건 아니지만 딱 맞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학교를 안 좋게 그만두셨어요. 교감·교장 등을 역임하며 정말 제대로 키운 학교였는데, 재단 주인이 바뀌면서 문제가 생겼죠. 아버지가 병이 나고 돌아가신 게 한 원인이기도 했어요. 저에게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 보게 된 계기였습니다. 교사라는 직업,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회의감, 반감 같은 것도 생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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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환 봉브랜딩 스페셜리스트. / 고동우 기자

Q. 대학 1학년 때 부마항쟁을 겪은 것으로 아는데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10월 18일 학교에는 부산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었어요. 마산과 부산이 함께 시위를 해서 중간인 창원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던 거 같아요. 하여튼 그날 집회 이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시위가 시작되었어요. 3·15의거탑 쪽으로 모이자 했던 것 같은데, 벌써 봉쇄되어 있더라고요. 어시장 쪽에 제일 큰 흐름이 있었어요. 경찰이 갈팡질팡할 만큼 세력이 커졌어요. 경찰이 막 최루탄을 쏘고 사람들이 쫓겨 가고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최루탄이 발밑에 날아오고 투석전을 했던 게 생생해요."

Q. 2011년 발간된 <부마민주항쟁 증언집-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에 대표님의 증언이 실렸습니다. 부마항쟁의 '시민정신'과 '화해정신'을 강조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해주십시오.

"정치나 역사라는 것은 개인이나 정부 생각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인 그 시대 사람들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읽어야 하고 그 방향으로 가는 거라 생각해요. 부마항쟁도 당시의 위정자와 정부에 '아, 국민들과 우리가 뭔가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고 깨닫게 한 거죠. 그렇게 우리가 발전하고 화해해 가는 거예요. 좋은 리더가 되려면 사소한 의견도 절대 묵살하면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두 명의 반대 의견이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요새는 그런 게 너무 없는데, 세상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나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고 누군가는 말해야 해요."

Q. 증언집에서 우무석·정일근 시인 등과 잘 아는 사이라고 말씀했는데 서울에 온 뒤로도 꾸준히 교류가 있었던 건가요. 지난 10월 18일 창원 3·15아트센터에서 있었던 '부마항쟁 관련자 증언대회'에도 참석한 걸로 압니다.

"우무석·정일근 시인은 대학 때 함께 글 쓰고 함께 어울리며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분들입니다. 취직 후에도 매년은 아니지만 경남대에 자주 갔었죠. 부마항쟁 관련 행사는 2009년 증언집 인터뷰를 한 뒤 꾸준히 참석했어요. 대학 강의 등 일이 있을 때는 못 갔지만 시간이 되면 꼭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말도 했구요."

현실에 맞서는 의미 있는 행동

Q. 부마항쟁이 선생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도 되나요.

"부마항쟁으로 생각이 정립됐다기보다는 내 사상이 부마항쟁 참여를 이끌었다고 보는 게 맞아요. 부마항쟁 이전부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세상은 어때야 하나 고민하며 살아왔고, 부마항쟁은 그것을 실현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부마항쟁에 참여한 분들, 피해자 모두 이 나라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하지만 전 어떤 면에서 피해자는 아니라고 봅니다. 시대의 현실에 맞서서 의미 있는 일을 한 대중들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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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환 씨가 운영하는 '봉브랜딩' 홈페이지 첫 화면.

Q. 왠지 현재 야당 성향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진보주의자이긴 한데 정치권의 진보·보수 기준과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저에겐 새로운 도전, 다양성의 추구와 존중 이런 게 진보입니다. 부마항쟁이 그랬듯, 그 시대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 누구를 지지하는가는 그때그때 다를 수밖에 없죠. 지금과 같은 정국(최순실 정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하야니, 검찰 수사니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정치적 기득권 세력의 '거대한 새판짜기'를, 역사의 반복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남이 가지 않은 나만의 길을 찾아

Q. 광고기획자로 상당히 유명했다고 들었습니다.

"카피라이터로 시작해 주로 광고 제작에 몸담았죠. 대기업 광고기획사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국내외 많은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맑고 깨끗한' 칠성사이다, '따봉'(델몬트쥬스), '가나(초콜릿)와 함께라면 고독마저도 감미롭다' 광고 등이 제가 만든 것들입니다. 받은 상으로는 한국방송광고대상, 대한민국 SCC광고상 대상, 미국 뉴욕페스티벌 광고상 등이 있습니다."

Q. 그런데 왜 그쪽 일을 계속 안 하고 '독립'을 한 건가요. 지금 회사는 광고 제작과 거리가 있는 거 같은데요.

"제 소신이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 새로운 것, 다양한 것에 도전하는 삶이에요. 조직 생활을 그만둔 게 2001년이었으니 남들보다 조금 일찍 '독립'을 한 셈이죠. 남들이 '미친 짓'이라고 해도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는 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자체를 혁명으로 봅니다. 물론 희생은 각오해야 하죠. 하지만 전 10년이 됐든 100년이 됐든 그런 게 인정받는 세상이 온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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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환 씨 프로필 사진. / 박봉환 제공

Q. 현재 일하고 있는 봉브랜딩이라는 회사에 대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홈페이지(www.bonbranding.com)에 들어가 여러 글을 읽어봤는데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광고기획과는 많이 다르죠. 회사라기보다 그냥 제가 하고 있는 일, 1인 기업으로 보면 됩니다. 상품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브랜드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브랜드가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컨설팅하는 게 주 업무입니다. 이를테면 스티브 잡스라는 브랜드를 봅시다. 그가 오직 돈만 보고 애플 컴퓨터와 아이폰을 만들었을까요? 전혀 아니죠. 잡스는 정말 자신이 즐겁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을 추구했던 거예요.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거고, 그리고 결정했을 겁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제품이란 언제나 완벽해야만 하고 반드시 더 많은 고객과 함께 가야 한다'고. 저는 그런 그의 바보 같은 결정을 바로 '봉브랜딩'이라고 부릅니다. 잡스는 갔지만 그의 브랜드는 아직까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는 없어도 그의 브랜드는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Q. 돈벌이만 지향하는 기업이 대다수 아닌가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은 영역 또는 직업일 거 것 같습니다.

"먹고 살기가 쉽지 않죠. 돈벌이가 안 되는 것도 당연하구요. 하지만 애플이나 JTBC 같은 곳을 보세요. '나의 꿈'을 추구하는 게 양적인 성장으로 이어진 사례 아닌가요. 브랜딩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는 사례라고 봐요. 기업이 됐든 아니면 개인이 됐든 한 곳이라도, 한 명이라도 도전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의 지지·지원은 물론이고 상업적 성공도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제 길을 계속 가는 거죠. 50세가 다 되어서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논문만 남았어요. 대학에서 후배들에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 깨닫게 된 것,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 등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구요. 계속 공부하고 책도 쓸 거예요. 그렇게 제 생각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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