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리한 음식이 하루의 고단함을 잠깐이나마 치유하고 위로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바랄게 없죠."

어느샌가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먹기)' 등이 한국 사회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앞으로는 보편적이었던 '4인 가구'가 저물고 '1인 가구'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전망하고 있다. 이에 경남에도 '1인 식당'이란 이름을 건 음식점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 때마침 마산합포구 창동에 일본 가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 '판앤판'이 생겼다. '철판과 식판의 만남'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판앤판의 대표 박정진(33) 씨를 직접 만나봤다.

늦은 오후 창동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 판앤판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을 끝내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박 대표가 기자를 반겼다.

"어렸을 땐 운동을 좋아했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죠. 어렸을 때부터 활동적인 걸 좋아했기 때문에 체육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더군요. 등록금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로 힘들었죠. 대학을 포기하고 해병대에 지원해 직업군인 생활을 했습니다."

해병대 부사관으로 군 복무를 끝마친 후 박 씨는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 휴학을 하고 친구와 호주로 떠났다.

"호주에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런데 다들 영어공부는 뒷전이고 일을 많이 하더라고요. 한국보다 일당이 훨씬 좋거든요. 저도 사람들을 따라 여기저기서 일을 했습니다. 마트에서 청소도 하고 카트 수거도 해보고, 공장에서도 잠깐 일을 했었죠. 호텔에서 일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캔버라까지도 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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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진 판앤판 대표. / 박성훈 기자

단순히 영어공부와 돈을 벌기 위해 떠났던 호주에서 박 대표는 일본 가정식 전문점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메뉴였지만 가게는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그때 '일식'에 눈을 뜨게 됐다.

"그때가 슬슬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습니다. 숙소 주위에 일본 가정식 전문점이 문을 열었어요. 일할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바로 지원을 했어요. 그때 처음 '일본 가정식'을 접했죠. 신기하기도 했고 예전부터 요리에 관심이 있었기에 어깨너머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박 대표는 '새마을 금고'에 취직했다. 적지 않은 나이였고 얼른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동적인 생활과 업무적인 스트레스에 결국 과부하가 걸렸다.

"30살이 넘어가니까 말 그대로 '과부하'가 걸리더라고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죠. 그래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방법이 없잖아요. 당장 나가서 할 것도 없고. 그런데 몇 달 전 '30살에 뭐든지 시작을 했었다면 지금쯤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확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회사를 그만뒀지만 앞이 막막했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당장에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많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음식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는 일이 무엇보다 행복했기에 용기가 생겼다. 음식점을 결정하고 나니 다음 문제는 종목이었다. 그때 스친 생각이 호주에 있을 때 경험했던 '일본 가정식'이었다.

"우선 한식, 양식, 일식 자격증에 도전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다행히 요리를 배우면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느꼈고 자격증도 3개 모두 취득했습니다. 다음으로 가게를 물색했습니다. 여러 곳을 둘러봤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지금 가게에 자리가 났다는 공고를 봤죠. 당시 '131키친'이라는 음식점이었는데 사장님이 제 친구의 친구였어요. 자리를 마련해 '여기서 음식점을 하고 싶다'고 말하니까 흔쾌히 넘겨주더라고요. 가게를 인수하고 하루에 2~3시간씩 자며 한 달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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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앤판 주방. / 박성훈 기자

일본 가정식이란?

'일본 가정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일까?

"일본 가정식은 우리나라로 치면 한정식과 똑같아요. 우리가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주로 먹듯이 일본인들이 가정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죠. 저는 거기에 한국적인 요소를 조금 섞어 식판에 밑반찬, 주메뉴, 밥, 국물을 담아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정식 이외에도 '돈부리'라는 덮밥 형태의 일식도 있어요. 전 개인적으로 그런 형태를 선호하지 않아요. 한 끼를 대충 때우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 '집밥' 같은 음식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앞서 말했듯 어느 날부터 혼밥, 혼술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했고 다양한 분야에서도 '나홀로족'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박 대표는 가게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이런 문화를 몰랐다고 한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음식이 '1인 식판'으로 나가다 보니까 혼자서 식사를 하러 오는 손님들이 정말 많아요. 지금은 혼자 오시는 분들에게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죠. 또 '더치페이' 문화에도 많이 놀랐어요. 보통 음식을 시키면 한 명이 전부 계산을 하잖아요. 요즘은 대부분 각자 계산을 해요. 이런 걸 보면 '사회가 점점 바뀌고 있구나' 체감하죠."

현재 SNS 마케팅은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사업자들에게도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홍보를 위해 돈을 주고서라도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는 여타의 가게들과는 달리 판앤판은 그 흔한 블로그나 페이스북도 없다.

"주변에서도 요즘 SNS가 필수라고 이야기를 하죠. 저도 가게를 구상할 때는 생각을 했었어요. 지금도 SNS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직접 와서 음식을 맛본 손님들은 거의 매일 방문합니다. 그분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지인을 데리고 와서 가게를 홍보해 줍니다. 그런데 SNS를 통해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 다시 본 손님은 없는 거 같아요. 이런 걸 보면서 전 말의 힘이 더 크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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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앤판 전경. / 박성훈 기자

오픈형 키친

판앤판은 주방이 공개돼 있다. 손님들은 박 대표가 요리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설계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어색하고 신경도 많이 쓰입니다. 그런데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아요. 우선 손님들과 소통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흔히 있는 음식점이 아니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제가 부족한 부분도 보충하고 메뉴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죠. 그리고 이런 '오픈형 키친'은 손님을 속일 수가 없어요. 위생적인 부분에서 손님도 안심되고 저도 떳떳하죠."

박 대표의 하루는 장을 보는 일로 시작해 가게의 문을 닫는 시간까지 쉴 틈이 없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에도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다.

"가게를 열기 전 매일같이 장을 보고 있습니다. 저도 한 박스씩 사다 놓고 쓰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재료의 신선도가 낮아지고 음식이 당연히 맛이 없어지겠죠. 스스로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처음엔 힘들었지만 저도 가게도 자리가 잡히다 보니까 지금은 익숙하게 하고 있습니다."

요리를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는 박 씨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손님들이 맛있다고 해줄 때가 가장 행복하죠. 한 번은 손님들이 '진짜 일본에 와서 밥을 먹는 느낌이다'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때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고 제 음식에 자부심도 생겼죠. 그리고 저희 가게 메뉴가 5개인데 힘에 부쳐서 '한 개를 빼자'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5개의 메뉴가 골고루 나갑니다. 제가 편하자고 손님들의 기쁨을 뺏을 수는 없잖아요. 힘들더라도 꾸준하게 만들어 보자고 항상 다짐하죠."

'1인 식당'을 준비하는 예비창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소위 말하는 '장사는 힘드니까 하지 마라'는 말은 안 하고 싶어요. 정말 하고 싶으면 해야죠. 물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관련된 정보를 많이 숙지하고 찾아보고 개인적인 투자도 필요하죠.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건 '차별화'라고 생각해요. 주위에 음식점이 많이 생겨도 저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무서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도 매일 새로운 메뉴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당장은 돈이 많이 들겠지만 가게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을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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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앤판 로고(왼쪽)과 음식, 메뉴판(오른쪽)

제 음식으로 치유 받고 위로받을 수 있다면…

박 대표는 손님들에게 어떤 가게로 기억되고 싶을까?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앞에서 일본 가정식을 호주에서 처음 접했다고 했잖아요. 그때 가게 사장님께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었어요. 그때 사장님이 밥 한 끼 먹고 가라고 돈가스를 주셨습니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있는 음식도 아니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그 순간만큼은 힘들었던 모든 게 잊혀지더라고요. 저녁 시간에는 하루의 고단함을 안고 지친 얼굴로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요. 제가 요리한 음식이 그 고단함을 잠깐이나마 치유하고 위로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바랄 게 없죠."

인터뷰가 끝나고 박 대표는 다시 저녁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몸을 옮겼다.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재료를 꺼내고 손질을 시작했다. 가게를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인터뷰 내내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하루하루 마음이 변하는 거 같아요. 가게를 시작한 지 5개월 밖에 안됐지만 초심이 조금씩 변질되는 게 느껴지죠. 그때마다 '왜 이러지?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서 한 장사인데, 자꾸 다른 마음을 먹으면 끝에 내가 웃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저를 채찍질하고 꾸짖고 다그치죠. 그러면 신기하게도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앞으로도 자만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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