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 빛이 빔과 다르지 않고 빔이 빛과 다르지 않다 :

부처는 오온(五蘊), 즉 다섯꾸럼이 모두가 빔이라고 했다. 이를 비추어 본 관자재보살을 얘기한 다음, 사리자에게 오온의 실마리인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색이 곧 공이라고 전한다.

박영호 선생은 이를 해설하며 <대승열반경>의 게송(偈頌)을 들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기 적멸위락(諸行無常 모든 짓거리 덧없어라 是生滅法 이는 나고 죽는 것이라 生滅滅己 나고 죽는 나를 없애 寂滅爲樂 니르바나의 참나로 기쁨이어라)'이란 구절이다. 그리고 "이것이 석가의 깨달음을 얻은 알맹이다. 나고 죽는 상대적 존재인 제나(自我·Ego)의 삶은 덧없는 것이라 참나가 아니다. 나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인 니르바나의 나를 찾아 기쁨이 벅차다는 것이다"고 했다.

허공에의 애착이 미인에 대한 애착만큼 강할 때 비로소 …

스승 다석은 그의 어록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왼통 하나는 허공(虛空)이다. 색계(色界)는 물질계이다. 현상계의 물질은 색계이다. 물질세계는 빛깔로 되어있으며 요망한 것이다. … 사람은 색을 찾는 데 너무 정성을 쏟는다. 색을 찾느니만큼 허공을 찾아야한다. 허공에 대한 애착이 미인에 대한 애착만큼 강할 때 비로소 사람은 공색일여(空色一如)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깨치지 못했으니 공과 색이 다르지 깨치면 같다"고 말했다.

공은 허공과 같다. 허공은 빔이지만 꽉 차있는 것이다. 요즘 말로 '텅 빈 충만'이다. 허공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있다. 밤하늘의 성운(星雲)을 보라. 끝없는 은하수에 떠있는 돛단배에 우리가 산다. 송나라 범준은 '심잠(心箴)'이란 글에서 "망망한 우주는 가없네. 사람이 그 가운데 아득히 작은 몸을 가졌으니 몸의 작기는 큰 창고 속 낱알 같네(茫茫堪輿 俯仰無垠 人於其間 渺然有身 是身之微 太倉米)"라고 읊었다.

범어 니르바나(Nirvana)를 음역하여 '열반(涅槃)'이라 했다. 그 뜻을 풀이하면 '적멸(寂滅)'이다. 허공은 고요하고 불이 꺼진 적멸로 묘사된다. 다시 말하면 적멸의 공간은 욕망의 불이 꺼져 고요하지만 꿈틀거린다.

이를테면 은하계는 적멸로 살아있다. 혹은 숲속을 홀로 걸을 때 그 우수수하고 창연(愴然)한 기운과 고요를 생각해보라. 큰바람이 대기를 움직일 때나, 안개가 천지를 막고 있거나 청자 빛 열린 가을 하늘은 곧 열반-적멸의 한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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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방수원, 현동완, 류영모, 김흥호, 함석헌(1950년).

색이 허물어져서 흩어지면 공으로 돌아간다. 그 공 가운데서 다시 색이 형성되어지니 빛이 곧 빔이요 빔이 빛과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이라 본다.

수상행식역부여시(受想行識亦復如是) - 받·끎·가·알이 또한 이 같으다 :

받·끎·가·알이라는 낯선 우리말을 다석을 통해 본다. 다석의 우리말은 받을 수(受)를 '받', 생각 상(想)을 '끌어 모은다'는 '끎', 갈 행(行)은 '가', 알 식(識)은 '알'로 옮겼고 '또 역시(亦復) 이와 같다(如是)'를 '또한 이 같으다'라고 한 것이다.

색(色)이 공(空한) 것이라면 색, 즉 현상(現像)을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식 다섯꾸럼이 모두가 공한 것이 된다. 곧 색불이공(色不異空)- 수불이공(受不異空)- 상불이공(想不異空)- 행불이공(行不異空)- 식불이공(識不異空)이 된다는 말이다.

다석이 지은 '맘과 허공'이란 시조 한 수를 보자.

온갖 일에 별별 짓을 다 봐주는 마음이요// 모든 것의 가진 꼴을 받아주는 허공인데//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하나인 법 싶구먼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온갖 짓을 다 한다. 허공 또한 모든 만물을 안고 있다. 그러니 마음에도 크기가 없고 허공에도 크기가 없는 것이다. 우선 크기에서 닮은 두 가지가 아마도 하나인 것이라는 말씀이다.

오온의 과정에서 현상과 인식은 동시에 일어난다. 부처는 오온 개공(五蘊 皆空)이라 하여 안팎을 두루 들여다본 뒤 깨달음을 천명했다. 이를 관자재보살을 내세워 사리자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만물과 만유와 이치의 근원의 자리는 空이다

사리자(舍利子) - 눈맑은 이야 부처는 사리자를 다시 불렀다.

시 제법 공상(是 諸法 空相) - 이 한올 빔 보기는

그래서 사리자야. 이 모든(諸) 법(法)은 공상(空相)이다. 한문 그대로 읽으면 이런 뜻풀이가 된다.

다석은 '諸法'을 '한올', '空'을 '빔', '相'을 '보기'라 옮기고 '는'은 주격의 토씨로 붙였다.

한자 법(法)은 뜻이 많다. 이치, 도리, 방법, 규칙 등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지만 큰 의미는 진리나 이치로 해석된다. 가령 사는 법, 죽는 법, 걸어가는 법, 운전하는 법, 천제의 운행 법 등 법이 아닌 것이 없다.

법은 이치를 잘 알아야 그 법을 잘 아는 것이고 법이 없이는 질서가 무너진다. 잘 살아가는 법도 참된 이치대로 사는 것이다.

다석은 '한'은 '하나, 큰'의 뜻으로, '올'은 이(理)의 의미로 옮긴 듯하다.

본래 실낱의 의미인 우리말 '올'을 두고 '올바르다', '올곧다'처럼 실올이 제대로 엮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올이 바른 것은 이치(理致)가 있는 것이다.

이(理)는 늘 있는 항상(恒常)한 것이고 사람과 사물과 천지의 조화를 주재하는 주체라 보면 된다. 그렇다면 다석이 '한올'로 번역한 '諸法'은 만물과 만유(萬有)를 아우르는 것이고 그 이치인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의 근원이다.

다석은 이 이치의 근원을 성인들은 도(道)니 천(天)이니 니르바나, 하늘님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다. 그 이치의 근원의 자리는 빔이라서 '이 한올 빔'이라 한 것이다.

창조주를 기독교적 용어로만 봐선 곤란하다.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주인은 허공(虛空)이라는 생각이 이래서 들게 된다. 사람들이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피조(被造)와 창조(創造) 사이에는 어떤 행위자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상(相)은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뜻을 머금고 있다. 공의 세계는 절대의 경지이지만 상대세계의 인간들이 볼 때 공도 상(相)을 가진 것이라서 다석은 '보기'라고 한 듯하다. "빔을 보게 되면" 이런 뜻인 것 같다.

부처는 오온으로 지어진 마음으로 보는 큰 이치는 빔이라 이를 볼 것 같으면 하고 말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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