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의 끝이 보일수록 더욱 커지는 아쉬움

포르토마린에서 카사노바까지 32.4㎞

포르토마린(Portomarin)에서 출발하는 새벽, 침대 수가 많지 않은 사립알베르게라서인지 좀 늦잠을 잤어요. 오전 6시쯤 출발했는데, 잠깐 길을 잘못 들었어요. 그래도 걷는 사람이 많아 곧 제 길을 찾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심하게 캄캄합니다. 다른 사람들 뒤에서 함께 걷다 날이 좀 환해져서 다시 혼자 걷기 시작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온전히 혼자 걸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가능하면 최대한 혼자 걸어봐야겠습니다. 다행히 다리도 다 나았어요. 그렇게 아프더니 정말 신기하다 싶더라고요. 여럿이 다니는 것이 좋은 점도 있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 조금은 부담스러웠는데 갑자기 다리가 심하게 아팠던 거죠. 그런데 쉬어주지도 않았고 배낭도 계속 지고 걸었고 마사지 외에는 한 것이 없는데 다리가 다시 멀쩡해진 거예요. 사실 거의 다 와서 못 걷게 될까 봐 또 일정에 문제가 생길까 봐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었거든요. 남편과 딸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해주니 다 신기하답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이 가득한 새벽입니다.

오늘은 구름이 끼었네요. 스페인의 풍경들이 생소한 듯 정겹습니다. 컨디션 또한 아주 좋습니다. 이틀 동안 순례자 일행과 손짓 발짓으로만 대강 이야기하다가 미국에서 왔다는 한국인 모녀를 만났는데 부담 없이 말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던지요. 겨우 이틀 만에요.

123.jpg
▲ 포르토마린 도로. / 박미희

며칠 전 사리아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었던 프랑스인 파리에앙느 할아버지를 다시 바르(Bar)에서 만났어요. 그런데 말이 안 통하니 서로 답답할 수밖에요. 겨우 사진만 찍고 갈 길을 갔답니다. 길에는 어제 포르토마린 광장에서 함께 놀았던 스페인 학생들이 많이 보였는데 몇몇이 저를 안다고 반가워해 주더라고요. 단체로 순례길 체험을 하러 온, 그리고 어제 광장에서 공연을 펼쳤던 그 아이들입니다.

줄어드는 산티아고까지의 거리를 보니 다 와 간다는 설렘보다 아쉬움과 함께 초조함이 밀려드는 것은 웬일이래요. 언제까지나 이 길에 머물고 싶은 맘은 뭐냐고요. 으흐흑. 그리고 함께 걷던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원래는 팔라스 델 레이(Palas de Rei)까지만 걸으려고 했는데 일찌감치 도착하기도 했고 컨디션도 좋아 친구들이 묵는다는 카사노바(Mato-Casanova)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이상하게 혼자 걷고 싶으면서도 또 친구들이 몹시 그리운 건 무슨 일인지 제 마음 저도 모르겠네요. 참말 변덕쟁이지요? 사과를 한 개 먹고 힘을 내서 으랏차 다시 출발합니다.

카사노바로 향하는 길에는 오레오(Horreo·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곡물저장고로 주로 나무로 된 것이 많다/편집자 주)가 눈에 많이 띄네요. 옛날에 옥수수 등 곡식을 넣어 놨던 창고 같은 것인데 독특하고 예쁘게 생겼어요. 방수도 통풍도 잘 되는 구조인데, 쥐로부터도 보호해 준다고 해요. 팔라스 델 레이를 지나자 오레오는 더욱 눈에 많이 띄었어요.

524500_400286_2714.jpg
▲ 순례길에서 다시 만난 프랑스인 할아버지와 함께. / 박미희 씨

열심히 걷고 있는데 앞에 주선이(자주 함께 순례길을 걷던 한국인 아가씨)가 보이는 거예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일행은 먼저 갔고 혼자 처져서 걷고 있던 거예요. 주선이는 몹시 힘이 드는지 배낭도 보내고 걸었더라고요. 둘이 얘기하며 얼마를 가니 아주 아주 작은 마을 카사노바에 도착했습니다. 순례길을 함께 걷던 일행이 이틀 만에 만난 저를 반겨주네요. 다리가 나아 다행이라며 기뻐해 주면서요. 저도 그랬지만 니나(폴란드에서 혼자 온 여성 순례자)가 더욱 반가운가 봐요. 헤어질 때도 저와 남겠다는 걸 억지로 보냈었거든요. 비슷한 또래의 아줌마이다 보니 아마 더 그랬을 겁니다. 걱정을 많이 했다며 끌어안고 놔 주지를 않아요.

마을이 작아서인지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도 정말 작네요. 가방으로 줄을 세워놓고 알베르게 문 열기를 기다리는데 이곳에 묵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네요. 대부분 순례자는 이곳을 지나쳐 멜리데(Melide)로 향하고 있었어요. 이곳엔 우리 일행만 묵을 것 같아요. 다들 씻고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바르로 식사를 하러 갔어요. 오늘따라 다들 들뜬 것 같네요. 기분 탓일까요?

스페인 사람인 비센테와 하우메가 열심히 스페인 요리를 설명해 주고 주인에게 부탁해서 이것저것 맛도 보게 해주고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요. 어제 포르토마린 광장에서 찍은 사진도 보여주고 즐거웠던 이야기를 들려주니 무척 부러워하더라구요. 저도 이 친구들과 함께했었다면 더 즐거웠을 것 같아요.

점심을 먹고 다들 시에스타(Siesta·스페인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하러 가고 전 그냥 바르에 앉아 일기 썼어요. 이 시간에 잠을 잔다는 것이 오늘은 더욱 아까운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걸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또 이 여유로움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지요. 오늘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기분 좋네요. 일기를 쓰고나서 혼자서 동네를 이리저리 다닙니다. 동네가 작아 볼 것은 별로 없지만 소박한 시골풍경이 정겹기만 하더라구요. 조용한 시골 카사노바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밤.jpg
포르토마린을 출발하는 컴컴한 새벽. / 박미희

카사노바에서 아르수아까지 23.1㎞

조용한 마을 카사노바의 밤은 모기와 함께 잠을 설치며 지나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출발 준비로 분주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나와보니 완전한 칠흑입니다. 워낙 산골이다 보니 가로등도 하나 없는 데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거든요. 순례길을 걸으며 처음 만나는 비에요. 비가 오면 땅도 심하게 질고 비옷을 입고 걷으면 불편하기도 해요. 게다가 비옷을 입어도 옷과 신발이 다 젖거든요. 그러면서 어디 앉아 쉬기도 어려워서 다들 비를 겁내더라고요. 그런데 난 오늘 처음 비를 만난 거예요. 그것도 비옷을 입을까 말까 할 정도의 비였어요. 그래도 힘들게 지고 다닌 비옷이니 한 번쯤은 입어야 하겠죠? 훗~! 전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며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근데 비옷을 입으니 몹시 덥군요. 비가 오면 힘든 것 중의 하나는 비옷을 입으면 덥다는 것도 있겠네요.

아무튼, 지독하게 어두운 산길이지만 일행이 있어 든든했어요. 호젓한 산길이고 나무가 많아 해가 있을 때 걸으면 참 좋은 길일 것 같네요. 그런데 비가 와서인지 내리막은 몹시 미끄러웠어요. 조심조심 등산 스틱에 의지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점점 어둠도 걷히고 비도 그치고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앞서가고 니나와 함께 가며 바르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쉬엄쉬엄 걸었어요. 폴란드인인 니나는 신앙심도 깊고 친절하고 씩씩한 친구예요.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또래의 아줌마끼리는 통하는 게 있었나 봐요. 서로 의지를 많이 했었고 힘이 들 때 격려를 해 주던 멋진 친구랍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이 길이 훨씬 풍성했던 것 같아요.

'폴포(Pulpo·삶은 문어 요리)'가 맛있다는 멜리데를 지나 우리는 아르수아(Arzua)로 갑니다. 아르수아 직전에 있는 마을 리바디소(Ribadiso)에 머물고 싶지만 우리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아르수아로 갑니다. 아르수아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친구들이 알베르게 앞에 가방으로 줄을 세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알베르게 문을 열려면 2시간이나 남아 있네요. 알베르게 앞에 앉아 있자니 조금이나마 더 쾌적한 사립 알베르게로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일행을 배반할 수는 없는 일, 어제 겨우 다시 만났잖아요. 에효~! 그래도 얼른 씻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산티아고.jpg
▲ 카사노바 마을 유일한 바르에서 점심을 함께 먹는 순례자들. / 박미희

그런데 잠시 후 와우, 순례자들 사이에서 즉석 공연이 펼쳐지고 있네요. 일행인 듯 보이는 젊은 친구들의 공연이요~! 기타와 만돌린,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중 한 명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렇게 음악과 함께 순례길을 걷는 그들이 어찌나 멋지게 보이던지요. 가끔 아는 노래가 나오면 흥얼거리기도 하고 순례길의 매력을 또다시 느끼며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스페인의 방송국에서 나와 촬영도 하네요.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있는데 드디어 알베르게 문이 열립니다. 와~!! 너무 오래 기다려서인지 모두 환호를 합니다. 우린 일찍 와서 망정이지 침대가 56개밖에 되지 않는 작은 알베르계라서 금방 다 차버렸고 많은 순례자가 돌아가고 있네요. 그래서 스페인 친구들이 그렇게 서둘러 온 거였군요.

이곳 알베르게의 세탁기는 얼마나 크던지요. 우리 일행의 옷을 다 함께 넣어 빨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것도 재밌다고 모두 하하 호호~! 씻고 스페인 친구들을 따라 골목골목을 찾아가니 순례자들이 많지 않은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이곳도 폴포 요리가 맛있다고 해서 친구들은 시키는데 니나와 나는 오세브레이로(O'cebreiro)에서 폴포에 별로 안 좋은 기억이 있어 스테이크를 주문했어요.

다리.jpg
▲ 삶은 문어 요리 폴로로 유명한 멜리데 마을로 가는 다리. / 박미희 씨

건배도 하고 왁자하게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와 낮잠을 잠시 자고 일어나 내일 어디까지 갈 것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날은 이틀뿐입니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고민하다 니나와 나는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일행도 그곳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이제 하루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산티아고를 5㎞ 남겨 놓은 몬테 도 고소에서 자고 가기로 했습니다. 아침 일찍 산티아고에 입성할 계획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미사에 다녀오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동네 구경을 못했네요. 아쉬워라~! 아까는 날이 훤하니까 시간도 안 보고 있다가 해가 지는지도 몰랐네요. 겨우 슈퍼에만 다녀왔답니다. 자칫 했으면 낼 아침에 굶을 뻔했네요. 슈퍼에 가다가 인도네시아에서 온 글로리아를 만났는데 알베르게는 다르지만 내일 새벽 함께 출발하고 싶답니다. 글로리아도 혼자 왔기 때문에 외로운가 봐요. 낼 만나기로 약속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아까 알베르게 앞에서 노래 부르던 젊은이들이 사람들과 어울려 또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저도 노래를 들으며 상념에 잠겨봅니다.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순례길에서 난 무엇을 얻었을까요?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또한, 뭔가 초조하기도 하고요. 이런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후련함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걸 뭘까요? 새벽에 걷느라 어둠 속에 놓쳐버린 풍경이 아쉽고 언어가 자유롭지 못해 나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날짜를 정해 놓고 너무 서둘러 걷느라 머물고 싶은 곳에서 머물지 못했던 것이 아쉽고 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 같아 아쉽고 특히 이 길이 끝나간다는 것이 더욱 아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데 낮잠도 잔데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오늘은 더욱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