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우포늪에서 시조의 지평이 넓어지고, 깊어지길 바란다"

'무릇 시란 정신의 핏빛 요철이므로/장님도 더듬으며 읽을 수 있어야 하리/집 나간 영혼을 부르는/성소의 권능으로.// 얽힌 말의 실타래 같은/이미지의 굴레 같은/ 그 터널을 절뚝거리며/ 내 독자는 걸어왔구나/ 그러나 양파 속이여/아 드러날/허방이여.'

이우걸(70) 시조 시인의 '시'라는 시조다.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2009년, 천년의시작)에서 발표했다.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어느덧 시력(詩歷) 40년이 훌쩍 지났다. 시가 켜켜이 쌓여갈수록 시인은 자신의 시를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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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걸 시조시인. / 박일호 기자

시인은 <지금은 누군가 와서>, <빈 배에 앉아>, <네 사람의 얼굴>, <저녁 이미지>, <사전을 뒤적이며>, <아직은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대 보내려고 강가에 나온 날은>, <맹인>, <아직도 거기 있다>, <처음에는 당신이 나의 소금인 줄 알았습니다> 등 시집 20여 권을 냈다. 부단히 시조를 썼고, 인정도 받았다. 정운시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경상남도문화상, 중앙시조대상, 한국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경남문인협회 회장뿐만 아니라 전국 단위 문인단체인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지난 8월 생존한 시조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창녕군 이방면 '㈔푸른우포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우걸문학관'이다. 생존한 시조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은 '백수문학관'에 이어 두 번째일 정도로 흔치 않다. 창녕에서 생태 환경 교육을 하는 20년가량 된 시민단체인 푸른우포사람들은 김승옥 소설가와 정채봉 동화작가를 기리는 순천만의 순천문학관처럼 자연과 문학을 결합하고자 했다. 고향이 창녕인 이우걸 시인이 푸른우포사람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우포늪에 문학관이 만들어지게 됐다. 기존에 푸른우포사람들이 사용하던 공간을 문학관으로 꾸몄다. 생태교육장, 시조 문학관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공간이다. 넓지 않은 공간에 시인의 활동 사항, 시조집 등을 전시하고, 건물 꼭대기 층에는 자그마한 집필실이 마련됐다. 우포늪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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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걸 시조시인. / 박일호 기자

시인에게 시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이우걸 시인은 문학관 개관식 때 형님 두 분에게 자신이 시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한 공을 돌렸다. 다부진 체격에 까맣게 탄 형들은 아우의 문학관 개관식에 그렇게 소개됐다. 4남 4녀 중 일곱째인 이우걸 시인은 가장 큰 형과는 15살이나 차이가 난다. 형들은 남동생 중 막내인 시인에게 아버지 역할을 했다. 대학 등록금도 형들이 농사지어 마련했기에 막내인 이우걸 시인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법고시를 준비해 빚을 갚고자 했다. 하지만, 인생이 꼭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는 법. 제대를 하고 복학한 농과대 친구가 수필을 읽어주며 "네 인생을 살라"고 한 말이 깊이 각인됐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글짓기를 하고팠다. <현대시조>라는 책을 읽고, 불현듯 시조를 썼다. '엽서', '코 고무신' 두 편이다. 대학 학보사 투고함에 시조를 써서 냈다. 2주 뒤 학보에 투고한 시 2편이 게재되면서 시인은 시조 시인의 길을 걷게 됐다. 이우걸 시인은 "당시 김춘수 선생이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김춘수 선생은 학보 문예란 평을 했는데, 나를 '복현 문단의 시인'이라고 평했다. 내 글을 보고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게 자랑이 아닐 수 없다'고 썼다. 그때 감동이 컸다. 한동안 그 글을 늘 오려서 자랑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렇게 시인의 첫걸음을 뗐다. 이우걸 시인은 김춘수 시인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이후 대학교 2학년 때 <월간문학>에 글을 내서 당선이 됐다. 이때 이영도 시조시인이 심사위원으로 있었다. 이영도 시인은 이 시인에게 <월간문학>이 아니라 <현대시학>으로 등단하기를 권유했다. 그래서 <월간문학>을 포기하고 1973년 2월, 4월, 10월호 <현대시학>에 이영도 선생의 3회 추천으로 등단했다. 이 시인은 "이영도 선생에게 글을 보여드리면, 선을 그어서 되돌려줬다. 말을 아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들유들하고 화려했던 내 시조가 이영도 선생께 배우고 나서 '다이어트'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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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걸 시조시인. / 박일호 기자

이렇듯 김춘수, 이영도 시인이 시조 시인의 길라잡이를 했다면, 시인의 어머니는 시의 원천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아버지가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 혼자서 6남매를 키웠다. 해방 후 아버지가 돌아오면서 이우걸 시인과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시인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머니의 부탁으로 형님들의 국어책에 있는 고시조를 붓글씨로 써서 드리는 일을 했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회심곡, 불경, 가사, 시조 등을 외면서, 힘을 얻곤 했다는 것. 그 모습을 지켜본 시인에게 시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시인이 된 아들에게 "네게 그 길이 행복한 길이라면 네 인생의 길이니 뒤돌아보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달려가라"고 격려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시인은 '어머니'라는 제목의 시를 적었다.

'아직도 내 사랑의/주거래 은행이다/목마르면 대출받고 정신 들면 갚으려 하고/ 갚다가/대출받다가/대출받다가/갚다가….'

시인 스스로 "프로필을 보면, 빈 시간이 없다"고 평가할 정도로 시인의 이력은 빼곡하다. 긴 시간 시를 쓰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시인은 초창기 시조 시인의 길을 걷고자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대학 시절 주변에서 나를 많이 골렸다. 다들 자유시를 쓰는데, 많은 말들을 어떻게 시조 형식에 맞춰서 넣으려고 하느냐고 놀렸다"고 했다. 자유시도 함께 써야 할지, 시조만 써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는 자유시도 포함돼 있다. 3번째 시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유시가 한 편도 안 들어가고 시조만 담게 됐다. 시인은 "민족이 강해지려면 민족의 시가 강해져야 한다. 전통성을 가진 정형시를 토대로 한 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써 온 시조만 450여 편. 자유시 50여 편을 합하면 50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렇게 많은 시 가운데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시는 무엇일까. 시인은 '팽이', '비누', '단풍물', '사무실', '비' 등을 꼽았다. '팽이', '비누' 등은 현실 비판적인 시다. 특히, '팽이'는 대학 시절 시위를 하면서 적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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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걸 시조시인. / 박일호 기자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팽이' 시 전문)

이우걸 시인은 창원 웅남중 등 창원, 김해 지역 5개 학교의 교가를 짓기도 했다. 시비도 2곳에 설치됐다. 화엄사 앞에 윤판기 서예가의 글씨로 '모란' 시비가 있고, 경북 청도에 '팽이' 시비도 있다.

시인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동네 서점에 가서 시집 5권씩 사서 읽고 있다고 했다. 리듬이 차 있으면, 내용을 접목해서 시를 적는다. 시인은 원고지, 노트에 자신이 적은 시조를 외다가 타이핑을 해서 시조를 완성한다.

김상옥의 '봉선화', 이영도의 '단란', 정완영의 '달과 나무', 이호우의 '바람벌' 등을 좋아하는 시인은 앞으로 새로운 시 세계를 펼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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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걸 시조시인. / 박일호 기자

시인의 시는 처음에는 '가락지', '이슬' 등의 시에서 보여준 것처럼 전통 서정을 중시했다. 작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을 시조의 형식을 잘 살려서 감동을 전하고자 했다. 이후 <사전을 뒤적이며>, <저녁 이미지>, <맹인> 등의 시조집에서 보여주듯이 시대성, 현장성을 담았다. 최근에는 '바퀴는 돌면서', '안경' 등의 더욱 짧아진 '단시조'를 통해 짧은 말 속에 시공을 초월한 노래를 담아내고자 노력해왔다.

최근 우포늪에 문학관을 겸한 집필실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시조를 꾀하고자 한다. 이우걸 시인은 '뉴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인은 "휴머니즘이란 신 중심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을 찾는 운동이었다. 지금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지구가 파괴됐다. 우포에 있으니, 자연과 인간이 함께 잘 살길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태, 환경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뉴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는 "아름다운 늪과 이곳에서 사는 동식물을 살피며 내 시조의 지평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시인은 현재 <서정과 현실> 대표, (사)한국시조시인협회 명예 이사장, 세종학숙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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