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

전라남도 구례군의 산동면은 매년 산수유축제로 봄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전국 산수유 생산량 60%를 차지하는 산동면은 산수유나무 시원지로 유명하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1000년 전 중국 산동성 처녀가 구례로 시집오면서 고향의 산수유를 처음 심었다고 하며, 산동이라는 지명도 거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는 이 동네의 '대학나무'라 불릴 정도로 주요 소득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소설가 김훈은 수필집 <자전거여행>의 한 부분이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있다. …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여수MBC는 창사 3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기획 김재권, 연출 김남태)를 2001년 6월 26일 자로 전국에 방송했다. 1999년부터 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2000년 6·25 특집으로 방송 예정이었으나, 제작팀이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 입원을 하는 바람에 1년 후 완성돼 전파를 탔다. 전해져오는 노래를 발굴해 노래의 사연과 함께 역사를 살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2년여에 걸친 자료발굴과 채록과정을 통해 구전 가요를 복원시켰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부용산'(작사 박기동, 작곡 안성현), '여수브루스'(작사 강석오, 작곡 임종화), '맹세하는 깃발'(작사 이원식, 작곡 권태호), '산동애가' 4곡이 등장한다. 이 노래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공식적으로 불릴 수 없는 비운의 노래였다. 죽은 누이를 애도해 지은 '부용산'은 작곡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산동애가'는 빨치산이 많이 불렀다는 까닭에 금지곡 취급을 당했다. 여순사건의 아픔을 담은 '여수브루스'와 보도연맹사건으로 숨진 아내를 위해 만든 '맹세하는 깃발' 역시 빨갱이 노래로 분류됐다.

연출을 맡았던 김남태 PD는 '산동애가'를 채보하는 데 가장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구례 산동마을 사람조차 이 노래를 잘 몰랐으며 이장도 왜 그런 것을 알려고 하느냐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정도였다. 다행히 홍순례라는 할머니가 유일하게 노래를 알고 있었다.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몰랐지만 백순례가 처형 당시 너무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자 군인들을 통해 퍼졌다고 한다. 그는 홍 할머니가 부르는 '산동애가'를 녹음한 뒤 작곡가 이호섭에게 편곡을 의뢰하여 복원하였다. 여수MBC는 방송에 맞춰 CD를 제작했는데, 수록된 4곡 중 '부용산'을 제외한 나머지 3곡은 처음 취입되어 영구보존이 가능하게 되었다. '산동애가'를 채록한 제작팀은 이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해방 이후 좌우의 이념이 극렬한 시점인 1948년 10월 19일 '제주4·3사건' 진압을 명령받은 제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지리산 일대는 군경토벌대와 빨치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주 무대가 되었다. 특히 구례는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곡성, 광양, 순천, 보성, 남원 등과 연결되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가장 전투가 치열했다. 그 와중에 군경토벌대를 지휘하던 백인기 12연대장이 빨치산의 공격으로 쫓기다, 산동면 시상리 시랑마을 농가 옆 대밭에서 자결했다. 이때부터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진행됐고, 인근 마을주민들이 빨치산에게 협력하고 있다고 의심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산동면은 이승만 정권이 여순사건 이후 좌익세력에 동조한 사람들을 찾던 중 유일하게 좌익명부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였다. 좌익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혐의를 벗어나기도, 결백을 주장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천지를 헤집고 다니며 날뛰는 토벌대의 총구 앞에 아무런 죄 없이 그 무시무시한 '손가락 총'에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슬픈 역사의 모습이었다.

사진.jpg
▲ 산동애가의 주인공인 백부전. (본명 백순례)

그러한 현장에 피울음의 노래를 남기며 오빠 대신 처형당한 열아홉 살 처녀가 있었다. 그녀가 죽기 전 애절히 불렀다는 노래는 '산동애가'로 전해졌으며, 촌로의 입을 통해 가까스로 구전되었다. '산동애가'의 지은이는 백부전이다. 그녀의 본명은 백순례인데, 노리개처럼 예쁘다고 하여 부모님이 부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백씨 집안 5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큰오빠 백남수는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가 죽고, 둘째 오빠 백남승은 여순사건으로 처형됐으며, 셋째 오빠 백남극(나중에 여순사건 고문휴유증으로 사망함) 또한 끌려가게 될 처지에 놓이자,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 고선옥(1987년 사망)은 부전에게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녀는 오빠 대신 죽음을 자청했다. 아리따운 열아홉 살 처녀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이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부전의 희생으로 셋째 오빠 백남극은 다섯 아들을 두어 백씨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같은 지역에서 이념을 뛰어넘은 구례경찰서장의 미담은 시절의 아픔을 다소나마 희석시켜 주기도 한다. 1950년 7월 24일, 구례경찰서 안종삼(1903~1977) 서장은 유치장에 수감된 보도연맹원 480여 명을 경찰서 뒷마당에 집결시켰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남한 내 좌익세력을 전향시켜 선량한 국민으로 만든다며 1949년 4월에 분류한 단체이다.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으로 총 3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자 정부는 북한에 동조할 위험세력으로 간주하고, 가입자들을 구금하거나 즉결처분하였다. 안 서장은 이틀 전 상부로부터 좌익인사로 지목된 사람들을 처형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연단에 올라 "여러분, 나는 지금 목숨과 맞바꿔야 할 중대한 결의의 순간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모두 방면합니다. 이 조치로 내가 반역으로 몰려 죽을지 모르지만, 혹시 내가 죽으면 나의 혼이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사람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이들을 풀어주었다. 당시 좌익 활동이 두드러진 800여 명 중에서 480명을 적극 가담자로 분류해, 유치장에 수감시켜 놓은 상태에서 이들을 살려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사진two.jpg
▲ (왼쪽부터) 백순례, 언니 백순삼, 올케언니, 어머니 고선옥, 큰 오빠 백남수, 둘째 오빠 백남승, 셋째 오빠 백남극.

그 후 인민군이 구례를 점령했을 때 경찰가족을 비롯한 보복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안종삼 서장의 용단 때문이었다. 전세가 뒤집힌 1951년 1월 다시 구례경찰서장으로 부임한 후 그해 4월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지구 경찰전투사령부로 발령이 나자, 주민들은 그의 공덕을 기려 '은심동정호, 덕고방장산' (恩深洞庭湖, 德高方丈山 : 은혜가 동정호같이 깊고, 덕은 방장산처럼 높네)이라는 시구가 담긴 10폭짜리 병풍을 선물했다고 한다.

안종삼 서장의 공적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서를 통해 공개되었다. 또한 오빠 대신 형장에 끌려가며 불렀던 열아홉 처녀의 애절한 노래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풀어야 할 숙제를 여전히 남겨두고 있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절어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 만은 너 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나 혼자 총소리에 이름 없이 스러졌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