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포시가 어디래요?

책장 정리를 하는데 얇은 책 한 권이 보인다. 오래된 우편번호 책이다. 치기 어린 연서가 배달되지 못한 채 책갈피에 두어 장 꽂혀있는 세월을 뒤적인다. 유명 신문사에서 만들었던 <선데이○○>이나 <주간○○> 같은 울긋불긋한 주간 잡지 뒤쪽 몇 페이지에 있던 펜팔란 주소였을까? 좀체 떠오르지 않더니 봉투의 주소를 보니 기억난다. 섬 가시내라 놀리던 같은 과 여자 동창이다. 87년 여름 이 친구가 초대해서 처음 거제 구경을 하였다.

진주에서 세 시간쯤 걸려 도착한 거제는 산골 출신인 내게 모두가 별천지였다. 학동 흑진주 몽돌밭이 그랬고 지심도 동백숲이나 신선대 천년송이 그랬다. 사진관에서 빌려 간 올림푸스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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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장승포항. / 박보근 노동자

하루 잘 놀고 장승포에 있던 친구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리는데 경찰이 불문곡직 잠시 좀 가잔다. 친구와 함께 잡혀간 경찰서에서 하루 밤낮을 시달렸다. 이유인즉슨 국가산업단지 내의 방위 산업체를 몰래 촬영했기 때문이었다. 버스 차창에 붙어 생전 처음 보는 조선소가 신기해 셔터를 눌러댔더니 누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노동자 대투쟁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타오르고 대우조선에서도 직격 최루탄을 맞아 젊은 노동자가 숨져 온 거제도가 들끓고 있던 차에 그러고 다녔으니 경찰은 하나 걸렸다 싶었을 것이다. 친구 아버지가 오셔서 하루 만에 풀려나긴 했는데 애써 찍은 몇 통의 필름은 햇빛을 보고 말았던 그때 그 시절 일화가 새삼 떠오른다.

그런데 주소가 '경남 장승포시 능포동…'으로 적혀있다. 어라 장승포시? 그럼 거제시는 뭐지?

대우조선을 지나 노거수가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선 두모 고개를 넘으면 코발트색 바다가 반짝이고 하얗고 빨간 등대가 예쁜 아름다운 항구가 나타난다. 달을 안고 뜨는 아침 해가 기가 막힌 곳 장승포다. 전국의 해안가나 큰 강가에는 옛날 일운이니 이운, 삼운, 사운이라 불리던 지명이 많다. 이 운(運)자가 들어간 곳은 대체로 조세 양곡을 운반하던 조운선이 정박하는 포구를 일컫는다. 거제에서는 일운이 지세포, 이운이 장승포였다 한다. 가혹한 세금 수탈 항구였던 이운면은 일제가 강점하면서 그들의 어업 전진기지로 약탈 항구가 된다. 이후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인구가 급증한다. 1950년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미군은 '크리스마스 화물(Christmas Cargo)' 또는 '크리스마스의 기적(Miracle of Christmas)'이라는 작전을 실행한다. 바로 '흥남철수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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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포는 1989년 시로 승격됐으나 1995년 거제군과 통합하면서 거제시가 되었다. / 박보근 노동자

이듬해 1월 10만에 가까운 피난민들이 몰려든 장승포는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학교와 공공건물로는 넘쳐 나는 피난민을 수용하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한겨울 한뎃잠을 자거나 민가의 외양간이나 광을 얻어 살며 식량과 물 사정도 열악한 데다가 화장실 등도 부족하여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 시절을 회고하는 어르신의 한 마디가 실감 백배다.

"여기 장승포 초등학교 운동장이 한가운데 쪼옥하니 오솔길만큼 남고 나머지는 온통 똥 밭이었어. 땅바닥이 안 보였은께…."

이 피난민들이 부산이나 다른 지방으로 삶터를 옮겨가고 일부는 거제도에 남아 제2의 거제 토박이가 되었다. 그때 정착하여 문을 연 중화요리집이 대를 이어 지금도 옛 짜장 짬뽕 맛을 찾는 손님들을 맞고 있다. 그렇게 장승포는 거제에서 가장 큰 도회지로 읍이 되었고 1970년대 말 아주동에 조선소가 건설되면서 또다시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1989년 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장승포시의 역사는 짧았다. 1995년 거제군과 통합하여 거제시가 되면서 시청이 고현으로 옮겨지고 장승포시는 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래된 중국요리 집에서 얼큰한 짬뽕 국물과 소주 한 잔으로 속을 데우고 능포 고개를 오르면 왼쪽 시외버스 정류장 주위로 자그마한 규모의 재래시장이 보인다. 주위 아파트 단지나 고급 주택가와 어울리지 않는 허름하고 을씨년스런 2층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다. 1층은 떡집이며 건어물집, 과일전, 옷집, 채소전이 즐비한데 2층은 바래고 낡았지만 간판들이 울긋불긋하다. 배가 항구에 들면 거친 바다와 싸우다 지친 선원들은 술과 여인네의 살내를 찾았다.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이 홍등가를 '뻘구디'라 불렀다. 588이니 텍사스니 포푸라 마치, 완월동이니 하는 이름보다 걸쭉하고 참 특이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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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포의 재래시장. / 박보근 노동자

그런데 이 이름은 이곳 지명과도 연관이 있다. 이 일대는 옥수동(玉水洞)이라고도 하고 행정동으로는 능포동(菱浦洞)이다. 능포는 늪이 있어 마름이라는 물풀이 많이 자라는 마을이란 뜻이라 옥수가 솟아나는 늪이니 뻘구디가 맞다. 그러나 늪이나 마름이풀은 흔적도 없다. 거친 바다 사나이들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간드러진 젓가락 장단도 사라지고 화려한 네온 불빛 꺼진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어둑선한 새벽에 능포 고개를 넘어 오른쪽 능선을 따라 반 시각 솔바람 시원한 소리 벗 삼아 걷다 보니 우람한 바위 절벽 위에 하얀 등대가 아침을 바라보고 섰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 탑처럼 솟은 바위가 해를 물고 있다. 상사 바위다.

옛날 한양에 이상서(李尙書)라는 양반이 있었는데 당파에 휘말러 유배를 오게 됐더란다. 이 이상서란 양반이 외동딸 국화와 몸종 삼돌이를 데리고 거제도로 와서 양지암이 있는 능포 뒷산에 움막을 지어 살고 있었는데 국화는 제자백가에 능통하고 전한 성제 손바닥에서 춤출 정도로 날씬했다는 물 찬 제비 작장중무(作掌中舞) 조비연이 고개 숙일 천하절색이라 모든 남자들이 그녀의 미모에 넋을 잃곤 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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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깍아지른 벼랑 아래 탑처럼 솟은 상사바위. / 박보근 노동자

오랜 세월 귀양살이에 세 식구가 고적하게 사는 동안 박꽃처럼 피어나는 국화에게 삼돌이가 신분을 잊고 상전에게 연민의 정으로 짝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어쩌랴. 국화는 어릴 적 이미 한양 김판서 댁과 정혼을 한데다가 몸종의 신분이니 속만 끓이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할 사랑 저승에라도 가서 맺으리라 한탄하며 마침내 상사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저를 향한 가슴앓이로 곡기를 끊고 시들어 간다는 것을 눈치챈 국화가 며칠을 굶고 있던 삼돌이에게 죽 한 그릇을 끓여왔다.

"삼돌아 나도 너를 사랑한다만 이룰 수가 없으니 그만 나를 잊고 기운 차리거라."

그러나 삼돌이는 오매불망 그리던 님이 끓여준 죽 한 그릇을 마지막으로 상사의 한을 품고 숨을 거두고 만다.

삼돌이가 죽은 지 삼 일 만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삼돌이의 죽은 원혼이 실뱀이 되어 몸은 국화의 몸을 감고 머리는 턱밑에서 국화가 흘리는 눈물만 받아먹으며 뱀은 점점 커져 갔다. 이를 본 이상서가 깜짝 놀라 뱀을 떼어 내려 했으나 잘라도 죽지 않고 살아나 국화에게 엉겨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뱀을 떼어내기 위해 여러 날 상사 굿도 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도 뱀은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뱀이 자라날수록 국화는 점점 야위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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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운이라고 불렸던 장승포. / 박보근 노동자

"아이고 숭악한 놈 제 뜻대로 못했다고 사람을 저리 삼대같이 만들다니…."

"뭐라쿠노. 오죽했으면 삼돌이가 죽어 상사 뱀으로 왔겠나. 그놈의 양반이 뭐라고…. 둘이 좋아하니 같이 살게 해줬으면 이런 일이 생겼겠나."

몸이 마를 대로 마른 국화는 정신까지 이상해져 천방지방 헤매다가 양지암에서 떨어지고 만다. 그러자 국화의 몸을 감싸고 있던 실뱀이 사라지면서 하늘로 쌍무지개가 뻗쳐지고 떨어진 자리에는 바위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고 불렀다. 처녀, 총각의 혼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할 때 이곳에서 고사를 지내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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