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음악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다

오랜 기간 한 분야에 전념하여 그 일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대중들은 그런 뛰어난 이들을 특별시 하며 '장인'이라 부른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흥식(79) 연주가는 65년을 아코디언에 몰두한 아코디언 장인이다. 악보도 보지 않은 채 3000여 곡의 음악들을 연주하는 그에게 장인이라는 표현은 무척이나 어울린다. 피아노는커녕 리코더도 다루지 못 하는, 음악의 문외한이 만나는 음악 장인은 어떤 모습일까? 남다른 소리가 담겨져 있을 것만 같은 아코디언 장인을 만나봤다.

김흥식 연주가는 뛰어난 연주 실력 외에도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중 하나는 고령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외견이다. 시간이 날 때면 산을 오른다는 그는, 작년까지 있었던 '똥배'가 쏙 들어갔다며 건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캐주얼하고 밝은 분위기의 복장도 그가 10년은 더 젊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일까.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기자님은 술, 담배 하시나요? 저는 술이랑 담배를 무지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배도 나오고 몸도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산을 오르내리면서 체력을 길렀어요. 무지하게 골초였지만 담배도 끊었죠. 술이요? 술은 못 끊겠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체력을 길러선지 술을 마셔도 힘들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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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식 아코디언 연주가./이종현 기자

오랜 기간 음악에 몰두하며 살아온 김 연주가는 1937년 일제 치하의 평양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둘째인 그는 비교적 '좀 사는' 집안에서 자랐다고 한다.

"지금도 어렸을 때의 기억이 또렷해요. 당시 부친이 좀 잘 사셨어요. 덕분에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죠. 집 바로 뒤가 김일성대학이었습니다. 연애편지를 주고받고는 했는데, 그걸 전달하면서 자그마한 부수입을 얻기도 했습니다. 물론 돈을 바란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꼭 주니까 안 받을 수는 없었죠."

평양서 살던 그가 남으로 내려온 것은 1951년 1월 14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중공군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정부가 수도 서울을 버리고 철수한 1·4후퇴 때다.

"전쟁이 나면서 난리가 났었죠. 저는 1·4후퇴 때 내려왔는데요. 사실 조금 더 빨리 내려올 수도 있었지만, 집이 좀 잘 살았었잖아요? 남들이 옷가지 몇 벌 챙겨서 떠나는 와중에 들고 갈 거는 챙기고, 못 가져오는 건 묻고 하다 보니까 내려오는 게 늦어졌어요. 이때 못 볼 거 참 많이 봤습니다.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쳐 내려오고 있는데 미군 사이에서 '인민군이 사복을 입고 내려온다'는 말이 돌았나 봐요. 그때 민간인들이 참 많이 죽었습니다. 끔찍했어요. 한 번은 너무 힘들어서 길에서 쓰러진 적이 있는데, 너무 졸려 잠에 빠지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제 앞에 있더라고요. 저는 쓰러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길 밑에 시체가 얼어있었어요. 깜짝 놀랐죠. 그거 보고 이를 악물고 다시 걸었습니다."

아버지 영향으로 시작한 음악

우여곡절 끝에 대전으로 온 김 연주가는 대전역 인근의 교회에서 주최한 위문공연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전역 바로 옆의 중동교회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했었습니다. 출정식 같은 거죠. 어린 나이였던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연주밖에 없으니까, 병사들이 떠날 때까지 계속 연주했어요. 전쟁 중에 교회라고 사정이 좋았겠어요? 위문공연이라고 해봤자 뭐가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마이크 하나밖에 없고. 이걸로 위문공연을 할 수는 없으니 악기를 다루는 제가 계속 연주한 거죠. 저는 학교도 안 다녔으니까 온종일, 휴전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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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식 아코디언 연주가./이종현 기자

이미 그 시기부터 남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할 실력을 갖췄던 그는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고 한다.

"제가 음악을 시작한 건 아버지의 영향이에요. 아버지가 뛰어난 음악가셨거든요. 당시 손에 꼽히는 트롬본 연주가였습니다. 여러 악기를 배웠지만 어렸을 때 몸이 약해서 관악기는 못 했었어요. 기타도 손이 너무 아파서 못 했고…. 덕분에 피아노나 파이프 오르간을 했죠. 그러다가 아코디언을 시작했고요."

아코디언 연주 경력이 길지만 다른 악기를 아예 못 다루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김흥식 연주가. 실제로 그는 건반 악기 전반에 대해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아코디언을 시작하게 된 것은 왜일까? 기자가 생각하기에 아코디언은 피아노나 오르간에 비해 대중적인 악기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피아노는 하고 있습니다. 아코디언을 한 것은 제 개인적인 취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피아노의 원래 이름은 '피아노포르테(Pianoforte)'입니다. '약하게'라는 의미의 '피아노'와 '강하게'라는 의미의 '포르테'가 합쳐진 말이죠. 강약을 통해 소리를 표현하는 악기입니다. 반면에 아코디언은 소리의 떨림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에요. 감정의 전달이 원활한 악기라는 거죠. 아코디언의 뛰어난 감정 표현 능력에 빠져 아코디언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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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식 아코디언 연주가./이종현 기자

아코디언은 움직이면서 연주하는 악기

연주가들은 저마다의 장르가 있다. 클래식이나 재즈, 현대가요 등이다. 하지만 김 연주가가 연주하는 음악의 장르는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아코디언으로 베토벤의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재즈를, 어떤 때는 영화에 수록된 OST를, 또 어떤 때는 현대 가요를. 그가 연주하는 음악의 원천은 어디일까.

"제가 연주하는 음악 장르는 러시아 음악입니다. 러시아 음악은 그 자체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음악이지만 우리나라 정서와도 잘 맞아요. 우리나라의 정서가 '한'이잖아요? 이게 음악에도 잘 녹아 있어요. 우리 음악에는 한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노래를 느리게 하는 경향이 있어요. 느린 음악이 더 슬프니까. 그런데 러시아 음악에서는 슬픈 노래를 빠른 템포로 연주해요. 이게 참 좋다고 생각해요. 빠른 템포로 연주하는 슬픈 노래를 듣다 보면 슬픔이 씻겨져 가는 것만 같거든요.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만은 없지 않느냐, 뭐 이런 느낌일까요?"

오랜 시간에 걸쳐 노력한 결과, 지금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과 경력을 갖춘 김 연주가.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워가는 도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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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식 아코디언 연주가./이종현 기자

"음악뿐만이 아니라 삶은 항상 배움의 연속이에요. 젊은 시절 제가 음악 좀 한다 했지만, 해외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에 비해서는 부족한 면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보다도 한참 어린 친구들에게 재즈화성학을 배우며 공부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젊은 친구들에게 배울 게 많이 있고요."

음악의 기본은 '귀', 청각이다.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일도 있다. 하지만 김 연주가가 연주를 시작하면 절대 눈을 감아선 안 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귀는 쫑긋하게, 눈을 부릅뜨고 있으라는 농담 섞인 말도 한다는데.

"제가 아코디언을 연주할 때 이리저리 움직여서 그런 거 같네요. 왜 그리 움직이면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느냐는 말을 종종 듣고는 해요. 그러면 저는 반문하죠. 왜 아코디언을 가만히 앉아서 연주하느냐고요. 아코디언은 들고 다니는, 움직일 수 있는 악기에요. 그런데 이걸 앉아서 연주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얍! 활력천국

현재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김흥식 씨. 그가 부산, 그리고 경남을 주 활동 무대로 정하게 된 것이 의아하다. 평양 출생의 그는 이곳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외할아버지가 충청도에서 목사 일을 하고 있었어요. 우선 거기가 피난 근거지가 돼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했죠. 그리고 부산에 와서 동아고등학교를 나온 뒤 동아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셔서 졸업을 못 했습니다. 소년가장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낮에만 공부하는 신학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이게 연이 돼서 지금까지도 신학대학 교수직을 하고 있죠."

하루 1~2시간 정도밖에 못 자며 낮에는 대학에서 공부를, 밤에는 행사나 클럽 등에서 연주해 돈을 벌었다고 하는 김 연주가. 이때 배운 피아노 조율 실력이 수준급이라 조율사로서의 능력도 탁월하다고 한다. 현직 신학대학 실용음악 교수인 그는 고달팠던 과거의 기억을 웃음으로 넘겼다.

"그렇게 살다 보니 유명세가 퍼진 걸까요. 이곳저곳에서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중 하나가 '얍! 활력천국'입니다. 시골 마을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랑 이런저런 기획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죠. 아코디언 연주로 5년 정도를 고정출연 했었습니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지방 방송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 중 최초로 전국 방송에 편성됐던 만큼 인기 있었던 프로그램인 '얍! 활력천국'. 연주가로서의 활동도 활동이지만, 시골의 노인들을 만나면서 옛 향수를 떠올리기도 했단다.

"방송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다 노인들이잖아요.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얘기했어요. 혹시 한국전쟁에 참여했는지, 대전역 앞에서 아코디언 연주하던 꼬마를 기억하는지. 대전역에서 위문공연을 하면서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들한테 꼭 다시 만나자고 했었는데 아직도 아무한테도 연락이 안 오네요…."

교육자로서의 삶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김 연주가는 교육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다. 아니, 오히려 마주한 기자가 보기에는 본인의 연주 이상으로 교육에 대한 신념이 느껴졌다.

"기회는 언제든지 와요. 하지만 그때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기회는 지나가 버리죠. 저도 기회가 참 많이 왔었어요. 몇십 년 동안이나요. 그런데 이 기회들을 다 잡질 못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어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 기회가 오는 게 보이고, 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겠더라고요. 학생들이 자신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김 연주가의 지도를 받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유명한 이가 있다. 해외 유수의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주목받고 있는 전유정 연주가가 그의 제자다.

"해인이는 피아노로 처음 만났어요. 아 개명을 했죠. 유정으로. 어린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데, 이 아이의 손이 피아노를 치기에는 너무 작은 거예요. 그래서 말했죠. 네 손이 너무 작아서 피아노를 치기에 적합한 손이 아니라고, 못할 건 없지만 힘들 거라고. 대신에 아코디언을 해보지 않겠느냐고요. 그리고 부모님이 동의해서 아코디언을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어하면서 연주를 하더군요."

해외에서 활동하는 전 연주가는 '러시아의 영혼을 가진 음악가'라는 평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의 국립 우파예술대학에 진학한 그는 연주회에 가서도 자신을 지도한 사람 첫 번째에 '김흥식 사사'라고 하고 있다.

"참 고맙죠. 유정이의 연주를 들은 러시아 음악가의 요청으로 유학을 갔는데요. 그때부터는 제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었죠. 제가 하는 음악은 어디까지나 실용음악이고, 유정이가 이제부터 할 음악은 클래식이니까요. 제자를 기르면서도, 언젠가 떠나보낼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넓은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게 뿌듯하죠. 제 자랑거리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재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많이 냈다.

"우리나라 교육은 붕어빵을 찍어내는 공장과도 같아요.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치죠. 하지만 인간은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손가락 길이도 달라요. 모두의 개성이 있잖아요. 저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개개인의 장기를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봐요. 꼭 활성화됐으면 좋겠어요."

이후로도 계속 연주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아코디언을 들 수 없을 때가 오기 전까지 아코디언을 계속할 것이 뻔하기에. 그래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본인이 하는 음악 이외에,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고.

"무척 여러 가지에요. 지금 국내는 음악 치료의 불모지에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추세인데. 왜냐하면 교수들이 공부를 안 해서 그래요. 음악 치료를 한다는 교수들 강의실이나 인근에 가보면 담배꽁초가 한가득해요. 저는 그걸 무척 안 좋게 봐요. 교수들이 제 역할을 하고, 또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음악 치료를 제대로 봐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시도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실력에 상관없이 함께 연주하는 것'이에요. 실력의 차이가 나더라도 그 수준에 맞춰 같이 연주하면 좋은 음악이 될 수 있어요. 음악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닌, 일반인이 음악을 하는데 반드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음악이 대중화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악기 하나씩은 배웠으면 해요. 지금 사회가 참 어둡고 힘들잖아요. 그럴 때 힘이 되는 게 음악이에요. 스스로를 위해, 사회를 위해 악기 하나씩은 다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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