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외롭고 싶다면 대도시 아파트에 살아야…책으로 내면을 깨우는 계기 만들었으면"

지리산 청학동에 가면 '새'라는 서점이 있다. 이제 개점한 지 한 달 남짓. 진열한 책은 3000여 권. 하지만 이른바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라고 하는 인문·사회계열 책뿐이다.

휴양 관광지에, 그것도 그다지 팔릴 것 같지도 않은 책만으로 서점을 열었다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서점'이라기에 손쉽게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간판도 없었다.(뒤에 알고 보니 널찍한 마당을 건너 들어가는 입구에 작게 서점이라는 안내는 있었다). 커피와 파스타, 피자, 들깨칼국수를 파는 카페 한쪽에 아담하게 책장을 두고 서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페와 서점 이름이 모두 '새'인 그곳에서 박흥민(62) 씨를 만나 '변방(塞)' 이야기를 들어봤다.

확고한 기준으로 채운 3000권 책 컬렉션

-책이 팔릴 만한 곳은 아닌데, 어떻게 서점을 냈나요?

"진주문고 여태훈 사장에게 지나가는 말로 서점을 해보고싶다고 했더니 '그럼 해보지요' 하는 겁니다. 서점 운영하는 노하우라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안 할 겁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하데요. 그걸 가르쳐주면 진주문고지, 청학동 서점이 아니라면서요.

어쨌건 여 선생이 전적으로 지원해줘서 서점을 열게 됐습니다. 여기(청학동)서 카페 열면서 바로 서점도 함께 열 생각이었는데 준비하는 데 1년이 걸렸네요.

쉬운 일도 아니고 여유도 없지만 서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우연히 접한 한 권의 책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을 깨우는 계기가 되잖아요. 그거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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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민 씨./정성인 기자

아직은 사는 사람이 많이 없습니다. 경기 탓인지…. 하루에 몇 권씩은 팔려줘야 나도 기분이 좋고 체면이 서는데 몇 권이 안 되네요. 책방 한지는 한 달 됐습니다.

여태훈 사장은 그래도 조건을 붙이고 도와주는 게 맞는데 그냥 도와준 겁니다. 책 목록은 내가 만들고, 리스트 작성하고…. 이런 작업을 하는 데에는 어떤 어드바이스도 없습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어떤 분이 우리말 '벗'이라는 말을 해석해놨더라고요. 사전적 정의와는 전혀 다르게요. 벗이란 배울 게 있는 친구. 그런 걸 벗이라고 한다고 정의를 해뒀더라고요. 저는 여 선생이 그런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3000권이라고 했는데 책 컬렉션 기준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한 분야만 할까 생각했는데 다섯 분야로 추려서 했습니다. 사회, 역사, 한국문학, 세계문학, 사상. 역사는 우리 역사 위주로, 중국과 서양은 개괄적으로. 미시사(전체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작은 사실들을 파헤치는 역사) 부분은 책이 많이 안 와서 많이 빠졌어요. 기준은 확실합니다. 신간이나 많이 찾는 책 위주가 아니고, 6개월간 인터넷서점에서 본 약 7만 권의 책 중에 줄이고 줄여서 3000권입니다. 그중 어떤 책을 보더라도 반드시 직접적으로 우리 삶과 연관이 있고, 내 나름의 판단으로 볼 때 탁월한 견해가 있는 책을 뽑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남의 나라 얘기라 해도, 다른 나라 사람의 사상이나 이야기라 해도 우리에게 영향을 줬거나 줄 수 있는 책 위주로요. 하루는 마산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여자 두 분이 왔는데 대충 훑어보더니만 어찌 이리 안 팔리는 책만 가져다 뒀느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그렇습니다' 하고 그래도 나는 재미있다고 했더니 '재미는 있어도 안 팔리잖아요' 하더라고요. 내가 읽고 싶은 책도 많이 들여왔죠. 내가 안 읽었더라도 어떤 책인지는 알고 있으니 정보를 보고 하나하나 다 들였죠.

저는 이리 생각했습니다. 이걸(책) 피자라고 쳐요. 한 조각이 빠지면 동그란 한 판이 비지 않습니까. 그걸 작은 하나의 세계라 생각했습니다. 모자이크라고 생각했죠. 애초에 이 조각이 3000개잖습니까. 그것은 작은 하나의 세계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을 갖고 뽑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일반인이 이 책 3000권을 읽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3000권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죠. 그러면 하나의 확고한 세계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 그런 생각을 여 선생에게 얘기를 했어요. '안 팔리면 어쩌죠' 했더니 서재라고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책도 있었을 텐데요?

"책을 주문을 하는데도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할 수 없이 제 책을 가져다놨어요. 그래서 헌책이 딱 8권 있습니다. 그건 구할 수가 없었던 책이에요. 만약에 손님이 와가지고 그 헌책을 고른다면 그냥 가져가라고 할 생각입니다. 진짜 사람들이 안 읽는 책인데 이걸 골랐다는 건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이 그 책을 읽었을 때 전혀 다른 각도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그 책을 잊지 못할 거고요.

그래도 몇 권 팔리긴 했어요. 얼마 전 여 선생에게 내가 그랬어요. 책이 팔리면 기뻐야 할텐데 어떤 책은 내가 아쉽다고요. 그러니까. 그때 다른 분들도 같이 계셨는데 초보 때는 다 그렇다 하시더라고요. 손님들이 오셔서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고 가면 고마워요. 고마운데, 책은 사가면 고마움보다는 기쁨을 느낍니다. 마음이 기뻐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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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과 찻집 전경./정성인 기자

지리산 자락에서 찻집

-서점인데도 간판을 찾기가 어렵네요?

"찻집 위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데서 책이 몇 권이나 팔리겠습니까. 드문드문 나가요. 그래서 밖에다가 책방이라고 간판을 안 붙였습니다. 사람들이 구경거리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고 해서 거슬리기도 하고요. 들어와야 볼 수 있게 조그마한 간판에 책방이라고 표시해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책방이라는 걸 보고 들어오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우연히 차나 식사를 하러 들어왔는데 책방이 있다면, 그럴 때 진짜로 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니면 말고.(웃음) 배짱은 아니고요."

- 책방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책하고 특별한 인연도 있을 법한데요?

"저는 성향이 많이 작용했다고 봐요. 부산에 살 때였어요. 친구 형님이 당시로는 굉장한 장서가였습니다. 전부 가난했던 시절이었잖습니까. 저하고는 열 몇 살 차이 나는데 이 형님이 책 사 모으는 게 취미였어요. 가난한 집이었는데, 2층에 올라가면 다락이 이만(두세 평)했나? 책이 빈틈없이 꽃혀 있었어요. 우리집에도 책은 조금 있는 편이었는데 그 형님하고는 비교가 안됐죠. 거기서 <데미안>도 읽고 그랬죠. 책을 보다보면 계속 흐름이 이어지잖습니까? 이어지다 보니 뜬금없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싶었던 참인데 그 형님 집에 있는 겁니다. '형님 이 책을 좀 빌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하니 일언지하에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굉장히 머쓱했어요. 그래도 동생의 친한 친구인데 어찌 그리 한마디로 매정하게 안 된다고 하는지 분하기도 했고요.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다시 가서 그 책을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니 형님이 저를 가만히 보더니 그러면 3가지를 준수해야만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첫째, 책에 어떠한 자취도 남기지 말 것. 둘째, 책 대여기간은 1주일이다. 그리고 셋째, 한 번에 두 권 이상은 안 된다. 그러더니 지킬 자신있냐고 그래요. 자신있다고 하고서는 빌려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형이 일부러 그랬던 것 같아요. 가져와서 책을 읽는데 중3 짜리가 그 책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 책 서문을 보면 당시 번역으로 '당', '부당'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당연하다는 '당'자가 그때는 그 문맥하고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다 못 읽고 1주일이 돼서 책을 반납하러 갔어요. 읽었냐고 묻더라고요 여기까지밖에 못 읽었다고 하니 그 책은 지금 니가 읽을 책이 아니니까 나중에 천천히 읽으라고 하면서 그다음부터는 책을 빌려주시더라고요. 이사갈 때까지 한 2년 정도 책을 많이 빌려봤습니다. 그게 기억에 남는 최초의 독서 경험이었죠. 그 형이 2000권 넘는 책을 갖고 있었어요. 참 고마운 형님이죠.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그분이 만들어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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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민 씨./정성인 기자

- 부산에 살았다면서 청학동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됐나요?

"고향은 부산이지만 제주도에서 4년을 살았습니다. 육지에 바람 쐬러 나왔다가 제주도로 돌아가고자 사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진주에서 생활정보지를 하나 뽑아 들었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지요. 마침 제주를 떠나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때였는데, 거림(산청군 시천면)에 집이 하나 나와있는 겁니다. 옛날에 산도 좋아했으니 한번 살아볼까 싶어서 들어가게 됐습니다. 먹고살아야 하니 찻집을 하면서 민박도 하고 그랬죠. 처음에는 2년만 살 생각으로 갔어요. 아내와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전국 각 도에서 2년씩만 살아보자고요. 그런데 그곳에서 아이가 태어났어요. 그 아이가 이제 중학교 1학년인데, 당시에 그 핏덩이를 데리고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아 미적댄 게 그곳에서 11년을 살았습니다. 마지막 4년쯤은 찻집도 민박도 안하고 놀았죠. 이후 고운동(산청군 시천면)으로 옮겨 3년을 또 찻집을 했습니다. 아는 사람 집을 빌려서 했는데, 그곳에서도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지금 집 주인이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자기 집에서 찻집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참 고마운 일 아닙니까?"

-지리산 자락에서 산 게 15~16년 되는가 보네요. 그동안 찻집만 했는데 어떤 이유라도 있나요?

"차를 배운 건 아니고 젊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촌에서 살아보니까 촌사람은 사람이 아닌 거예요. 촌사람들도 분명히 다 열심히 일하고 쉬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내 주변을 가만 보면 일 마치고 나면 소주 아니면 막걸리 마시고 이런 일상이었어요. 이분들이 돈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단지 가서 앉아있을 자리가 없는 겁니다. 가도 좀 아무렇게나 돼 있고. 도시에서 누가 놀러오면 데리고 갈 곳이 없어요. 이런게 좀 못마땅했어요. 촌이 오히려 찻값이 더 비싸지 않습니까. 이것 한 잔에 5,000원입니다. 굉장히 비싼 물이죠. 돈은 더 비싸게 주면서 충분히 누릴 여건이 안 돼있는 거죠. 그때는 커피 붐이 없을 때였으니까 전통차를 하는데, 작은 공간이지만 깨끗하게 해놓고 편안한 음악도 나오게 하고…. 그 사람이 쉬는 그 시간을 최대한 편하게 보낼 수 있게요. 그래서 찻집을 해봤는데 의외로 주위 사람들은 별로 안 오네요.

고운동에서는 피자, 커피, 파스타 이 3가지를 했습니다. 좀 뜬금없죠? 좋은 음식하고 좋은 차는 우리 삶에 활력이 되잖아요. 인근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많이 오긴 했는데 제가 생각한만큼은 안 오더라고요. 오히려 먼 데 사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자꾸 오는 겁니다. 묵계라든지 이런 데서오시는 그런 분들은 좋아하는데 제가 오시기를 바란, 촌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이런 분들은 굉장히 어색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는 커피, 차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세 번만 오면 익숙해진다고 하는데도 세 번 오는 사람이 잘 없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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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 내부./정성인 기자

'진짜 은자는 저잣거리에 있다'

-15년을 넘게 지리산 자락에서 살았다면 나름의 지리산관(觀) 같은 게 있을 법도 한데요?

"한 곳에 오래 살면 산이고 도시고 마찬가지겠지요. 뭐가 변했나 싶어서 챙겨서 보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어제는 저쪽에 풀이 좀 자랐고 꽃이 피었다든지, 이런 게 보이죠. 아침에 현관문 열고 나가면 무의식적으로 밤 사이 변화를 느낍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이 느끼는 자연은 한두 번 놀러 오는 사람들이 느끼는 자연 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뭐랄까, 내 속에 변화가 없으면 밖의 변화가 안보이죠. 그런데 내 속의 변화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어느 순간 다른 걸 보게 되는 거죠. 그런 게 좋죠. 이런 산골에서는 절기가 있어요. 24절기가 15일마다 한 개씩 있는데, 그 절기의 정점. 그 정점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이 그 속에 있죠. 그런 걸 내가 느끼는 날이 일 년에 운이 좋으면 한 20일 쯤 되더라고요. 아침에 현관을 딱 나섰을 때 '아, 너무 아름답다' 그런 마음이 드는 날이 있어요. 그럼 내일도 그렇느냐 하면 아니거든요. 제주 4년까지 해서 23년간 시골에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그게 보이더라고요. 그러면 그 정점인 날 시간이 흘러가는 게 너무 아깝죠. 그대로 있었으면 싶은데…. 그런 게 촌에 사는 기쁨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시골에서 찻집을 하다보면 무료할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내시나요?

"도시에서 오는 분들이 좋아보인다는 사람이 많고요. 사실 내 삶은 그렇지는 않은데 외롭지 않느냐고 묻기도 해요. 어떤 날은 외롭고 어떤 날은 촌도 되게 바쁘다고 대답해줍니다. 도시생활을 하는 분들과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죠.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내 맘대로, 내가 놀고 싶을 때 쉴 수가 없고 저같은 사람은 오늘 하루 쉬고 싶다고 하면 쉴 수도 있죠. 그런 부분에서는 조금 자유롭지 않나 생각이고요. 외롭다는 것은 글쎄요.

정직하게 얘기하자면 근래에 이런 생각은 가끔 합니다. 아이 때문에 도회지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예전에는 전혀 안 그랬는데요.

어떤 면으로는 어디라 해도 본질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산에 와서 한 가지 깨달은 거라고 할까요. 도시 분들은 전부 저를 이상적으로 좋게만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이 생겼지 않은가 싶은데. 그분들이 '니 와이리 사노' 이랬으면 오기가 나서라도 여기 좋다고 그랬을 건데. 전부 너무나 좋게만 얘기하니까 오히려 차분하게 볼 수 있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여기에 있는 나와 도시에서의 내가 과연 다를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죠. 물론 그 공간이나 상황이 분명히 다른 행동을 하게 하겠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실들, 그것이 산을 나간다고 해서 크게 바뀌리라고 생각 안 합니다. 옛날 연암 선생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시골에 사는 사람은 작을 '소(小)'자에 숨을 '은(隱)' '소은', 읍내쯤 사는 사람은 '중은(中隱)'이고 도회에 사는 사람은 '대은(大隱)'이라고. 진짜 '은자(隱者)'는 저잣거리에 있다는 표현이 있는데. 저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고독하고 외롭고 싶다면 대도시 아파트로 가야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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