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공관복음서 중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가장 그대로 나타낸 복음서라고 본다. 마치 초기 경전인 <잡아함경>이 뒷날 쓰인 대승경전들보다 부처의 육성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 많은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유교 경(經)과 전(傳)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山上說敎)'를 다석의 견지에서 강독해 보면 어떨까?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로부터 '애통해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에서 한 가지로 나타난 '용심(用心)과 용처(用處)'는 인간세상 사람들의 갈망과 다른 데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혼이 번지르하고 가멸한 것은 벌써 마음으로 남을 짓밟은 것이기에 가난의 저편에 있고 강퍅하고 성질을 밥 먹듯 부리는 자 온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의로운 것은 목숨을 내놓은 열사(烈士)의 굳은 마음이고 긍휼히 여기고 화평케 한 마음 또한 어진 이의 숭고함이다.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마음 그대로를 쓴 것이다.

이러다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여 하늘나라의 일원이나 주인이 된다고 하는 말씀인데… 이는 이 육신이 하늘로 승천함이 아니요, 이 마음이 거듭나 솟아오르거나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하늘나라를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유교에서 상제(上帝)가 항시 지켜봄을 두려워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로 두루 통하는 것, 불교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적멸보궁에 드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리라. 현상으로 보면 볼 수가 없어도 지극한 정성으로 마음이 도달하는 형이상학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를 보면 다석의 '진달래야'라는 시조가 떠오른다. 다석의 시와 말씀이다.

진달래야 진달래야 어느 꽃이 진달래지/내 사랑의 진달네게 너만 홀로 진달래랴/진달래 나는 진달래 임의 짐은 내 질래 ('진달래야' 첫 장)

진달래 하면 거 감정이 이상스럽습니다. 중국에서는 진달래를 촉혼이라고 촉나라의 원혼이라고도 하고, 바로 과꽃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 원망스럽고 비탄스러운 그런 뜻이 담긴 이름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어째 진달래라고 했는지, 무언가 뜻이 있는 듯해요. …그러고 이듬해 봄에 또 빨갛게 진달래가 피었어요. 그래 또 진달래, 진달래 그러며 갔어요. 그래서 종단에는 꽃이라는 것은 피자고 하는 것이고, 피었으면 시들지 않겠다고 할 거고, 시들지 않는 동안이 길고 길어지이다라고 할 테지.

그런데 뒤집혀서 지려고 한다, 첫 출발부터 지려고 한다 이거요. 그런 뜻이구나 하고 생각이 가요. 그럼 촉혼이라든지 과꽃이라든지 뻐꾹 꽃(두견화)이라든지 하는 그 성질이 비슷한 비감의 생각이 들어요. 그래 진달래는 지려고 핀다. 떨어지려고 핀다. 아! 뜻이 지극히 묘하다. 가엾이 묘하다. …사람은 왜 나왔느냐. 살고 죽으려고 나왔다, 이렇게 하는 게 옳은 데 그걸 깨달은 사람은 없어요. 내가 사람이 왜 나왔어? 잘 살자고 나왔다. 그걸 깨뜨리라는 거예요. 그것을 철저히 깬 것이 진달래라는 말이에요. …4·19의거 이후에 4·19통에 돌아간 생명들. 묘 앞에 돌탑을 세우고 거기에다 노래를 비석에다 박아놓았어요. 해마다 4월 봄이 되어 먼저 가신 그들의 일을 생각하고 그래서 봄에 진달래꽃이 핀다는 겁니다. 4·19사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진달래꽃이 아주 만발하게 핀답니다. 그래 사모하는 말이 마지막에 있어요. 그것은 이 사람이 진달래라고 쓴 글 속에 든 그 마음 그대로 일치해요.

다석은 진달래를 보면서 그 꽃 '이름앓이'를 한창 하다가 '진다-떨어진다'라는 뜻이 진달래 꽃말의 본의(本意)라는 생각에 도달한 것이다. 죽을 때 죽을 줄 아는 것은 진시황의 불로장생과는 다른 것이다. 욕망의 몸인 나-'몸나'를 깨쳐 거듭나는 부활의 나-'얼나'를 얻자는 것을 늘상 말씀하고 있다.

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애통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온통 피고 지는 진달래를 보고, 혹 먼 지난 일이 되어버린 4·19 영령 앞에 서서 애통한 맘을 갖기가 정녕 어려울 뿐이다.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며 모른 채 지나치는 일에서나, 그런 사람에게서 애통해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귀결이 성립되어 지는 것 같다.

산상수훈을 예수 말씀대로 (물론 누가·마가·요한이라는 저자의 각기 다른 기억과 해석으로 예수의 육성과는 한 뼘 거리는 있겠지만) 강독하는 것은 다석이 추구한 경전의 해석 방법이 될 것이다.

대체로 종교라 하면 우주만유, 삼라만상의 큰 이치인 절대자의 소리를 담은 용광로인데, 그 하나로 있는 영원한 가르침을 성인은 그들에 맞게 하나님, 상제(上帝), 니르바나(無餘涅槃)등의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거룩한 가르침은 바야흐로 절집과 교회당 같은 교단화 과정에서 종교적 당파성이 생겨나고 하늘의 말씀을 전한 이들을 교조(敎祖)로 치세워 우상시하고, 뜻이 얇은 신자들은 보이는 세계에서 기복(祈福)을 갈구하나니 절로 현혹되는 것이다. 오호 애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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