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떨려 가위를 못 잡게 되기 전까지, 저를 찾는 마지막 한 명까지 책임지고 싶어요"

마산 창동 길을 지나다 '이상무 커트라인'이라는 상호의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창원 봉곡동에서 같은 상호의 미용실을 본 기억이 있었다. 가게를 옮긴 걸까 싶었지만, 알아보니 창원을 기반으로 몇몇 군데 가맹점을 둔 미용실이란다. 최근에는 가맹점을 둔 프랜차이즈 미용실도 많기에 그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머리 한구석에 접어두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프랜차이즈가 많은 것은 아니다. 특히나 미용업으로 한정한다면 정말 몇 안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는 곧바로 미용실에 연락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그렇게 미용 연구가 임진택(55) 씨를 만나게 됐다.

금남의 영역이었던 '미용'

'이상무 커트라인' 미용실 매장에서 인터뷰할 것이라는 처음 예상과 달리, 인터뷰 약속 장소는 '이상무 명품가발'이라는 가발 매장이었다. 얼마 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가게 경영·관리·홍보 등의 보조적 역할을 하고, 지금은 가발 사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창원에서 미용실을 하는 이유요? 제가 창원 사람이니까요. 고향이 창원 북면이에요. 8남매 중 7번째죠. 지금은 결혼해서 딸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임 씨는 1976년 중학교 졸업 후 곧장 미용업에 뛰어들었다. 지금에야 남성 미용사들이 많이 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용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큰 꿈을 안고 (미용을)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그저 빨리 돈 벌고 싶다는 생각에 직장을 알아봤죠. 시골에서 명절 때가 되면 차려입고 정종 같은 술 한 병씩 들고 귀향하는 동네 형들이 너무 부러웠거든요. 그래서 진학은 생각도 안 하고 빨리 월급 받고 싶다는 생각에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40여 년이 흘렀네요."

빨리 돈 벌고 싶다는 생각은 이해가 되지만 그게 미용업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묻자 동네 이발소 사장님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단다.

01.jpg
▲ 미용 연구가 임진택 씨./이종현 기자

"제가 어릴 때부터 머리 만지는 데 관심이 많았어요. 제 딴에 멋 부린다고 이리저리 가르마 넣고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고 다니니까 동네 이발소 사장님이 미용사나 해보라고 하더군요. '여자만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남자 미용사도 있다고, TV에서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뭣도 모르고 마산 미용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저 혼자더라고요. 이게 뭔가 싶었더니, 남자는 서울에서나 몇 명 있고 이 동네에선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경남도 1호 남자 미용사가 됐습니다."

임 씨가 청일점으로 학원을 졸업하고 나서도 일은 쉬이 풀리진 않았다. 자격증을 가졌음에도 그를 받아주는 미용실은 없었다. 혹시 싶어 여러 미용실을 다니며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장난하냐'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남자인 임 씨에게 당시 미용업의 벽은 너무 높았다.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니까 어쩔 수 없이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상대로 머리를 해줬습니다. 미용실에서 파마약 같은 걸 직접 사 와서 해드리곤 했었죠. 그러다 서울로 가면 남자라도 미용사를 할 수 있다기에 옷가지 몇 개 챙기고 무작정 서울로 갔습니다."

험난했던 수행의 과정

임 씨는 서울로 가서도 일이 순탄치는 않았다고 한다. 지역보다는 덜하지만 서울에서도 남자 미용사는 드문 존재였다. 서울 미용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겨우 받아주는 미용실을 찾았다.

"서울 미용실에서 일하긴 했는데, 그걸 제대로 일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월급이 없었거든요.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보니 먹고 자는 것도 미용실 소파에서 했죠. 결국에는 비전이 없다는 생각에 창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자리 못 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부산에 가면 남자 미용사가 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부산 미용실 이곳저곳에 문의해보고 남포동에서 받아주는 곳이 있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원장님이 남자였어요. 이때가 18살, 1976년이었습니다."

어렵사리 미용사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에게 기회가 왔다. 경험을 쌓으면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를 서면의 미용실에서 스카우트했다. 남자가 머리를 해 준다는 게 신기해선지, 일부러 남자 미용사를 찾는 손님들이 많았던 것이다.

"제가 딱히 능력이 뛰어나거나 한 것도 아닌데 저를 찾는 분들이 많았어요. 아마 '남자 미용사'라는 희소성 덕분이었던 거 같아요. 1982년 정도 됐을까요, 부산에서 작은 남자 미용사 모임 같은 것도 생기면서 서로 교류도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는 남자 미용사는 '정말 드물지만 못 쓰는 사람은 아니다' 정도의 인식이 생긴 거 같아요."

02.jpg
▲ 미용 연구가 임진택 씨./이종현 기자

다시 창원으로

그는 부산에서 경험을 쌓은 뒤 마산으로 돌아왔다. 경험도 쌓았고 서울이나 부산 등의 대도시에서 남자 미용사들의 활약도 있었기에 처음보다는 수월히 일자리를 구했다. 그때도 마산에서 유일한 남자 미용사였다고 한다.

"일자리를 구하긴 했는데 쉽지는 않았어요. 월급이 한 달 밥값도 안 되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미용사들이 밥 먹을 때 공기밥 같은 거만 추가해서 맨밥만 먹고는 했죠."

그에게 변화가 온 것은 27살 때다. 양덕동의 미용실 직원으로 일하던 그에게 사장이 '니가 가게를 맡아봐라'고 한 것이다.

"온전히 제 가게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매장을 도맡아 운영한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29살 때 산호동 골목에서 제 명의로 된 미용실을 오픈했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산호동 자유수출지역이 대단했거든요. 얼마 안 가 도로변의 조금 넓은 곳으로 가게를 옮겼습니다. 나중에는 창동으로 가게를 옮겼죠. 대부분의 가게가 비슷하겠지만, 미용실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시내에서 가게를 해야 한다는 게 있었거든요."

창동에 가게를 낸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오픈 후 5일 동안 무료로 머리를 해 주거나 사은품으로 드라이기를 주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이벤트를 한 덕분에 찾는 이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당장에 돈을 많이 남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단골손님을 확보하자고 생각했어요. 한 번 찾았다가 안 오면 소용이 없잖아요? 오픈 후 며칠간은 정말 쉴 틈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미용실 가격이란 게 주먹구구식이었어요. 찾는 손님마다 가격을 다르게 했거든요. 좀 친한 사람에겐 싸게,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비싸게. 또 비싼 파마를 하는 분께는 비싼 약을, 싼 거 하는 분에게는 싼 약을. 이거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격을 통일했습니다. 파마나 염색도 가격에 따라 약을 바꾸는 게 아니라 손님의 머리 상태를 보고 정하도록 했어요. 비싼 약이라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 머리에 적합한 약이 있거든요."

이상 無, 이상무 커트라인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갑작스러운 궁금증이 생겼다. 그의 이름은 '임진택'이다. 하지만 상호는 '이상무 커트라인'.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일까 싶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상무라는 게 사람 이름이 아니에요. 낯부끄러운 소릴지도 모르지만, 저는 커트도 잘하고 파마도 잘하고, 제 실력에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상 무(無)', 이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이상무 커트라인이라는 상호를 쓰게 된 거죠."

그렇게 지역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은 후 이상무 커트라인의 첫 가맹점이 생긴 건 2005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체인점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밑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경험을 쌓아 하나둘씩 분가하면서 자기 가게를 차리게 됐는데, 그때 직원 중 몇 명이 이상무 커트라인이라는 상호를 쓰고 싶다고 한 것이다.

"저 스스로가 체인사업을 할 만큼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도 같이 일하던 직원이 이름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다고 하니까 준 거죠. 직원이 아니면서 상호를 쓴 분은 딱 한 분 있었네요."

지금에야 미용실을 비롯해 각종 프랜차이즈 사업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그 당시로써는 드문 일이었다. 이가자, 박승철 등 지금도 유명한 전국 프랜차이즈 미용실 서너 군데를 제외하면 마산에서는 최초의 프랜차이즈 미용실이었다고 한다.

"매장이 많이 있을 때는 15개 정도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6개 매장만 있습니다. 상호는 다르지만 제가 도와주는 곳이 두어 곳 있고요. 프랜차이즈라곤 하지만 가맹비를 받거나 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이상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으니 홍보를 하거나 할 때는 다 같이 돈을 거둬서 쓰는 정도죠. 그리고 원장님들이 초보도 아니에요. 각 원장님마다의 색채가 있으니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도 없죠. 처음에야 재료라던지 경영 이런 것 대부분을 도와줬지만,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뒤에는 물어오는 것에 조언만 해주고 있습니다.

"더는 할 수 없을 때까지 가위 들고파"

그는 2년 전, 2014년을 마지막으로 미용실 일선에서 물러났다. 직접 운영 중이던 창동 미용실도 맡아서 하고 싶다는 직원 2명에게 넘겼다. 지금은 미용실의 경영에 대한 조언자 역할을 하는 정도다. 그리고 지금 주력하고 있는 게 가발 사업이다.

"새로 시작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요. 예전부터 미용실 안에서 가발이나 마사지, 신부화장 이런 걸 다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전문 매장으로 나온 게 얼마 안 된 거죠. 가발 전문 매장을 운영한 건 10여 년 정도 됐네요.

03.jpg
▲ 미용 연구가 임진택 씨./이종현 기자

가발사업이라곤 하지만 이 역시도 그가 하던 미용업의 일부다. 혹시 미용업 외의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저는 뭐 다른 걸 할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40여 년간 이 길을 걸어오면서 곁다리로 여러 일을 하기도 했어요. 미용학원을 운영한 적도 있고, 폐업한 미용실의 중고 기자재들을 사고파는 일, 또 미용 연구나 기술 심사위원, 지역 방송의 미용 협찬, 그리고 지금 하는 가발 사업 등. 결국 '미용'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진 않았죠. 앞으로도 쭉 이쪽 일만 할 생각입니다."

일선에서 물러나 가위를 잡는 일이 적어졌다. 지금의 소회에 대해서도 물었다.

"지금도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에요. 다만 나이가 있다 보니 어려움이 따르더라고요. 절 찾으시는 손님도 저에게 맡기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이 있고. 능력을 떠나 손님을 100% 만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미용실 일선에서는 조금 멀어지게 됐습니다. 그래도 일 자체는 계속할 거예요. 나중에 걷지 못하거나 손이 떨려 가위를 못 잡게 되는 정도가 아니면, 저를 찾는 분이 마지막 한 명만 남더라도 일할 겁니다."

40여 년의 기간. 기자가 살아온 삶의 시간보다도 훨씬 긴 시간이다. 긴 세월 동안 미용이라는 한우물만 판 임진택 씨. 아직도 식지 않은 그의 열정에 감탄하며, 그의 앞으로의 행보도 지켜보고 싶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