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행복한 세상, 그 시작은 나눔과 봉사"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

2011년 7월 19일 1억 원 기부 약정으로 김해에서는 처음이자 경남에서 12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안진공 김해 미치과 원장(53).

인터뷰 초반 그는 유난히 한숨을 많이 내쉬었다. 부산 난민촌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살면서 입 하나라도 덜고자 여동생 외국 입양까지 고민했던 당시 상황들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그때의 고단함이 묻어 나왔다. 인터뷰 말미로 가면서 그의 표정은 밝아졌고 말소리는 점점 경쾌해졌다. 그가 꿈꾸는 '함께 행복한 세상'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껏 살아왔던 과거를 거쳐 그가 생각하는 밝은 미래로 따라 들어가 본다.

피난민 판자촌 유년 생활

안 원장은 1963년 부산 남구 우암동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우암동은 한국전쟁 때 몰려온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이었다.

"어릴 적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이 짠한데요. 참 어려웠죠. 물론 우리 세대는 대부분 그랬지만…. 부친은 경북 상주가 고향인데 젊어서 돈을 벌고자 부산으로 와서 우암동에 정착을 했죠. 그런데 특별히 뭐 일을 못 하셨어요. 결핵으로 오랜 요양생활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면 마산결핵요양원에 입원한 것이었고요. 6개월, 1년쯤 집에 돌아와 계시다가 또 가시고 그랬죠. 근로 능력이 없어서 어머니가 돈 벌어 살림을 사셨죠."

어머니는 조그마한 미용실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꾸렸다. 그러다 그것조차 상황이 여의치 않아 나중에는 포장마차와 노점을 하면서 가족을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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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진공 김해 미치과 원장./유은상 기자

"어머니께서는 돈 번다고 새벽에 나가셔서 늦게 돌아오셨어요. 얼마나 고단하셨겠어요. 눈물이 다 나네…. (안 원장의 눈시울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나마 큰형님은 장남이라 공고까지 무리해서 공부를 시켰고요. 바로 위에 형님은 중학교 다니다 중퇴해서 산업전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당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죠. 공부를 하고 싶어도 사정을 뻔히 아니 떼를 쓸 수가 없었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막내 여동생을 외국으로 입양 보내기로 했겠어요. 참 그때 어머니도 가족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휴…. 결국에는 굶어도 같이 살자고 포기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의 초등학교 생활은 어두운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육성회비를 못 내서 수업 중에 자주 집으로 돌려보내졌죠. 그런데 가난한 동네다 보니 한 반에도 저 같은 친구가 많아서 크게 상처는 안 받았어요. 6학년 때 체육 시간에 체육복이 없어 러닝 내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갔죠. 6년을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그런데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이 체육복 없다고 수업 내내 운동장에 세워 두더라고요. 그거 억수로 뻘쭘하잖아요. 나중에 선생님이 형편을 아시고는 용납을 하셨지만 그것도 가슴에 남아 있네요. 그런 기억은 빨리 버려야 하는데.(웃음)"

그렇다고 그 시간이 모두 암울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도 많았다.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 냈죠. 그런데 하루는 선생님이 학교 마치고 친구랑 둘이 동사무소에 가보라 해서 갔죠. 그런데 동장님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서 수학여행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그때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마냥 신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나름 공부를 좀 했던 것 같아요. 졸업식 날 우등상장 같은 것을 받았어요. 선생님이 전해주시면서 '너는 진학을 못 하지만 지금처럼 씩씩하게 살면 뭐가 돼도 잘 될 거야'라고 덕담을 해주시더군요. 지금까지 진하게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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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진공 김해 미치과 원장./유은상 기자

야학이 열어준 미래

안 원장은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 했다. 대신 어머니에게 사정사정해서 야학에 다닐 수 있었다. 그는 그때가 가장 큰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형편은 어려워도 그나마 어머니가 교육에 대한 생각은 좀 있으셨나 봐요. 야학에 보내주시더라고요. 친구 2∼3명과 같이 야학에 다녔죠. 대학생 선생님들이 와서 무료로 봉사해주는 야학이었는데…. 환경이 상당히 열악했죠. 야학 1학년 때만 한 7번 옮겨 다닌 것 같아요. 당시 막사 같은 곳을 주인이 좋은 뜻으로 내줬다가 애들이 하도 시끄럽게 구니까 주변 사람들 항의에 딴 데로 옮기라 했어요. 이후로 보수동 중부교회로 야학이 옮겨 갔는데 그곳에서도 얼마 못 있어 쫓겨나고, 또 송도에 짓고 있는 벽체도 없는 교회에 갔다가 또 옮기고…. 엄청 많이 옮겨 다녔는데 다 기억이 나요. 나중에 연산동에 천주교에서 하는 고등공민야학이라고 그곳에서 공부했죠."

7번 야학을 옮겨 다니면서 또 자신의 집과 한참 떨어진 먼 거리를 걸어서 다니면서도 그가 결국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칭찬 덕분이었다.

"처음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 나중에 만났던 친구들 대부분은 끝까지 마치지 못 했어요. 그런데 저는 악착같이 다녔죠. 아니, 아주 재미있게 다닌 것 같아요. 초등학교 졸업식 때 들은 담임선생님의 칭찬과 야학에 대학생 선생님들의 칭찬이 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 오래 기억에 남을 칭찬을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특히 대학생 선생님들이 많이 예뻐해 주시고 항상 '어려워도 포기하지 마라. 너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해주셨어요. 사실 제가 잘하면 얼마나 잘했겠어요. 몇 명 안 되는 초등학교에서 그리고 그나마 공부 잘하는 친구들 다 빠진 야학에서 뻔하죠. 그런데 항상 가난에 찌들어 기죽어 살던 놈이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니 정말 힘이 나더라고요.(웃음)"

야학에 다니면서 그는 고입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고입 연합고사에 합격해 부산 동성고등학교에 입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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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진공 김해 미치과 원장./유은상 기자

"열심히 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께서 고등학교에 가라고 승낙을 하셨죠. 대신 '더 열심히 해서 장학금 받아라'고 하시면서요. 정말 고마웠죠. 참 열심히 했습니다. 전교생 630명 중에 390등으로 입학을 했는데 첫 중간고사에서 31등인가 했어요. 이 이후로도 성적은 조금씩 올랐죠. 그러면서 대학 진학의 꿈도 꾸게 됐고요."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서 부산대학교 치의학과에 입학한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항상 몸이 아프셨던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라고 했다.

"외삼촌이 무자격 돌팔이 의사였는데….(웃음) 당시에는 그런 분들이 많았죠. 그래도 상당히 실력이 괜찮았던지 돈을 많이 버셨어요. 기사 고용해서 자가용 굴리고 다니셨으니까요. 그래서 우선 의사가 되면 돈은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제가 뭐 해드린 게 없으니 아버지 같은 사람을 치료하고자 의사가 되기로 맘먹었죠. 또 당시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런 이유로 결정했죠. 대신 치대에 간 것은, 당시 치대는 6년 공부만 마치면 개원할 수 있었지만 의대는 인턴, 레지던트 하는 시간이 더 걸리니까 학비 부담을 최소화하고자 선택했죠. 입학할 때는 2년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웃음)"

김해 미치과 개원

안 원장의 대학생활은 공부와의 싸움이었다. 대학생활 낭만은 고사하고 한눈팔 사이 없이 공부에만 매진했다고 했다.

"2년은 전액 장학금으로 근근이 학교를 다녔는데,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3학년부터는 장학금을 항상 받지는 못 했어요. 그러니 학비를 마련하고자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했어요. 그런데 당시 과외로 받는 돈이 얼마 되지는 않아서 항상 모자랐죠. 그때마다 어머니가 학비를 보태 주셨는데 아마도 지인들에게 사정사정해서 빌리셨을 겁니다. 따로 용돈이 없으니 뭐 술 마시고, 놀러 다니고 이러지는 못 했어요. 아침에 버스 회수권 2장과 도시락, 그리고 저녁 국밥값 500원만 들고 가서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살았죠. 안타깝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도 힘에 부치는 여유였고요. 그런대로 보람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어려운 형편 등으로 남들보다 일찍 결혼하게 된다.

"사실 집안 형편상 부모님이…. 허허. 결혼하면서 처가에서 조금 도와주신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살림에 보태고 그랬죠. 계속 나이 드신 어머님에게 기댈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돈에 팔려가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을 봤는데 딱 보니까 집사람이 마음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딱 세 번 만나고 결혼했습니다. 그러니 인연인 거죠. 결혼해서 딸 둘을 두고 잘살고 있습니다. 집사람에게 참 고맙죠."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서 장애아동 구강 상태와 관련된 연구에 집중했다. 그 연구 덕분에 그는 지금도 장애아동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석사논문을 쓰려고 부산지역 장애인 학교 5곳 정도를 모니터링 했습니다. 구강 상태가 생각보다 너무 안 좋더라고요. 물론 연구 자체도 어려움이 많았죠. 부모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거절하는 분이 많아 인터뷰에 응하면 치료를 해 주겠다고 약속했죠. 그렇게 논문은 통과했지만 이후 대학병원으로 오는 장애 아동을 100% 치료해주지는 못 했어요. 그게 빚으로 남아서 장애인학교인 경남은혜학교에서 개교 이후 지금까지 14년째 매주 화요일 오전 무료진료를 해오고 있습니다."

안 원장은 이후 김해에서 공중보건의를 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돼 김해에 병원을 개원하고 지금까지 김해시민으로 살고 있다.

"1995년에 동기 2명과 함께 개원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치과'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친구들이 지금도 20년 넘게 공동원장으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의료계에서 이런 경우는 드물거든요. 사람이라는 게 돈이 결부되면 한없이 나약해지고 갈등 속에 빠지는 동물이잖아요. 정말 형제처럼 지냅니다. 아주 고맙죠. 사실 치과가 사람과 대면하는 직업이라 스트레스가 많아요. 소비자 욕구는 빠르게 진화하고 의료 기술도 뒤쫓아 가지만 완전히 만족하게 하지는 못하죠. 열의를 가지고 기술과 능력 개발에 매진하면서 고객에게 좀 더 행복한 서비스를 주고자 긍정적인 사고로 계속 저를 리마인드 시킵니다. 그런 덕에 그럭저럭 병원이 굴러가는 것 같고요. 특히 동료 원장님들 모두 실력이 뛰어나고 욕심 없이 서로 믿고 의존하면서 함께 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뭣보다 항상 믿고 찾아주시는 고객이 제일 고맙죠. 하하."

김해 미치과는 현재 5명의 의사가 김해 내외동 본점과 김해 장유 분점에서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젊고 유능한 의사 두 명을 영입해 새로 들어서는 김해 신세계 백화점 옆에 2번째 분점 개점을 준비하고 있다.

'회현당'과 '첫 손님 가게'

2011년 경남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실생활 속에서 기부와 봉사가 누적된 결과였다.

"2002년부터 은혜학교에서 장애아동 무료 치과 진료를 해왔어요. 그랬더니 장애아동 부모님들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 사회에서, 김해에서 벌어먹고 호흡하고 있는데 뭘 더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 조금씩 후원을 하기로 마음먹었죠. 곧장 김해시와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서 김해지역 어려운 장애인 가정 7곳에 10만 원에서 많게는 100만 원까지 도움을 줬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적립된 기부금이 6,000만 원이 넘는다며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요청하더군요. 처음에는 그냥 '지금처럼 하겠다. 가입할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눔문화 확산에 이바지하는 차원에서 꼭 가입을 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한 것입니다.(웃음)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안 원장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병원에서 또는 경남은혜학교에서 장애 아동 무료 치과 치료와 장애 어르신 무료 틀니 제공을 진행해왔다. 그 과정에 2004년 김해 생명나눔재단이 생기면서 후원회원으로 가입해 본격적으로 치과 치료 봉사를 하게 된다. 2012년에는 이사장으로 추천돼 지금까지 3대, 4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재단은 주로 소아암, 희귀 난치병 환자, 장애인, 저소득층, 빈곤 노인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첫 손님 가게' 사업과 '회현당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회현당)' 사업을 추진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첫 손님 가게는 현재 165곳 정도가 가입해서 운영 중입니다. 가게 문 열고 그날 첫 손님 수입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자 저희 재단에 기부하는 방식입니다. 많은 가게 사장님들이 동참해 주시고 있고 또 고맙게 그 가게를 시민들이 특별히 많이 찾아줘서 선순환하면서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회현당을 열었는데 할머니들이 너무 좋아하세요. 폐지를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략 김해에 900여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집계됩니다. 그런데 폐지를 하나라도 더 주우려는 경쟁이 생기면서 새벽 3∼4시에 나오시는 분이 많아요. 우선 밤에 얼마나 위험합니까. 안타까운 사고 소식도 많이 들리고요.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행정에서 야광조끼니 안전 장구니 이런 것을 줘도 귀찮아서 잘 안 해요. 그래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그분들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고민한 게 바로 회현당입니다. 안전하고 맛있는 참기름을 생산해서 시민들에게 파는 사업이죠."

회현당에는 현재 7명의 할머니가 일하고 계신다. 그분들은 모두 이 일을 하게 되면서 행복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사업은 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내서 시작한 것입니다. 모금을 시작했는데, 한 달 만에 525명이 1억 원을 모아 주셨어요. 기업체나 노조 등에서 에어컨이나 집기들을 또 제공해 주시고요.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할머니 일곱 분이 하루 2시간 정도 조별로 돌아가면서 일하거든요. 그렇게 해서 한 달에 25만 원을 벌어 가십니다. 적게나마 경제적인 도움과 성취감, 자존감을 느끼면서 행복해하죠. 그분들 '폐지 주울 때는 자괴감이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아침에 햇빛을 보면서 콧노래 부르면서 출근한다'고 말해요. 회현당 외할머니 참기름은 국산 깨로 만들고 HACCP(해썹·위해요소 중점관리제도) 인증을 받아 안전합니다. 할머니들이 손자 손녀에게 줄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고 또 시민은 빈곤 노인을 돕는, 상생효과가 발생하는 좋은 사업입니다. 최근에는 '할메리카노' 커피와 팥빙수도 파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많이 이용해 주세요."

이밖에도 생명나눔재단에서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들이 어려운 가정 한 곳씩 연계해 매달 10만 원 이상 지원하는 '초코릿백신' 사업도 성과를 내고 있다. 그는 김해시가 역동적이고 시민들 마음이 모두 건강해 사업이 잘된다고 감사했다. 이제는 모든 사업들이 그냥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돕는 사람들 또한 행복을 되가져 가는 건전한 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함께 사는 세상 만들기

아너소사이어티 가입뿐 아니라 숨 쉬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어렸을 적 '마음의 빚' 때문이라고 안 원장은 설명했다. 그것을 되돌려 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판자촌 꼬마가 공부도 하고 의사가 돼서 나름 지금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수학여행비를 도와줬던 이름 모를 동장 아저씨와 야학에서 봉사하면서 꿈을 키워줬던 대학생 선생님 덕입니다. 거기에다 초등학교 선생님께 들은 '너는 지금처럼 씩씩하게 살면 뭐가 돼도 잘 될 것'이라고 했던 칭찬과 야학 선생님들 격려가 원동력이 됐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빚을 이자까지 쳐서 더 갚으려는 것으로 보시면 될 겁니다. 그렇다고 굳이 계획하고 작심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오래 못 가잖아요. 그냥 생활 속에서 여력이 되면 조금씩 나누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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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진공 김해 미치과 원장 아니소사이어티 가입 모습./안진공 제공

그는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 가는 것은 기성세대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를 해결할 열쇠 또한 봉사와 나눔이라고 판단했다.

"먹고사는 것은 세상이 발전하면서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은 불평등과 양극화로 점점 힘들어지면서 꿈조차 제대로 못 꿀만큼 각박해졌죠. 모두 우리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너무 압축성장, 고속성장에만 집중해 올바른 분배를 못 하다 보니 꿈과 희망도 사라져 가는 세상이 됐습니다. 2010년 조세연구원 자료를 보면 연소득 6,000만∼8,000만 원을 버는 사람은 1000원 중 21원을 기부하고, 연봉 3억 원을 버는 사람은 1000원에 16원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좀 더 노력해서 조금 더 사회를 변화시키고 시스템도 변화시켜가야 하겠죠. 물론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노력해야죠. 그 작은 변화의 시작은 물질적인 나눔뿐 아니라 정신적, 감정적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그는 더 나은 세상이 되려면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워런 버핏이 이런 말을 했어요. '열의가 성공의 열쇠이며 성공의 완성은 나눔이다.' 저도 여기에 공감합니다. 우선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열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나눔과 봉사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한 발, 아니 반 발이라도 나아가 실천으로 다가선다면 세상은 조금씩 더 아름다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자기 삶의 가치도 높아지면서 더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저는 나누는 것은 그냥 나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만큼, 그 이상으로 돌려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눔의 방식은 두 가지라 생각합니다. 첫 번째 돈 또는 현물이며, 두 번째가 행동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모두 여유로운 마음으로 세상에 한 발짝 더 다가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분들에게 지금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힘든 시기가 지나면 좋은 때가 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꿈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안 원장은 장애인 치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이후 지금껏 그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덕분에 그는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많아 만약 뭔가 더 할 수 있다면 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제가 지역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조금조금 그 일들을 찾아볼 생각이거든요. 현재 두루뭉술하게 생각하는 것은 장애인 교육시설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14년째 경남은혜학교 학생들을 지켜봐 왔습니다. 졸업 후 취업하는 학생은 10%도 못됩니다. 그것도 몇 개월 못 가더라고요. 나머지 아이들은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모들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 '내가 저 애들보다 오래 살아야 할 텐데' 관용구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어서 그렇지 되씹어보면 정말 가슴 아픈 말이거든요. 쟤들을 누가 돌봐줄까요. 정부가 다 책임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장애인 아이들이 졸업해서 일할 수 있는 공간, 그런 여건도 안 되는 아이들을 위한 평생학습 공간 마련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한 사회에 일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그러한 일에 매진해봤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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