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 좋은 친구, 기분 좋은 저녁

◇카스트로 헤리스에서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까지 27㎞

새벽 2시쯤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3시가 지나 짐을 챙겨 주방으로 갔어요. 벌써 준비하고 출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마 그들도 저처럼 잠을 못 이룬 것 같아요. 아침 요기를 하고 출발해서 마을 끝쯤에 가서 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혼자 출발하려니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좀 그렇더라고요.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를 않네요. 그래도 새벽이 되니 날은 시원해서 앉아있기가 괜찮았어요. 저기 부지런한 한국 젊은이들이 먼저 나타납니다. 결국 5시에 출발하네요.

아~! 달빛, 달빛이 아주 좋아요. 며칠째 새벽마다 달빛과 함께 걷는데 오늘은 더욱 느낌이 다르네요. 이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인상적인 풍경 중의 하나가 달빛과 함께 걷는 거예요. 달빛이 비치는 밀밭 사이로 걷는 느낌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답니다. 오늘은 그 감동이 더하는 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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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미스타로 향하는 길에 만난 카스티야 운하. / 박미희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불빛이 반짝이는 카스트로 헤리스가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낮에 보았더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네요. 이 오르막은 모스텔라레스 고개(Alto Mostelares)를 넘는 길입니다. 올라가면서 보니 멀리 어제 지나왔던 작은 동네들의 불빛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다 평원이라서 그런지 멀리까지도 불빛이 보이네요. 고개를 지나 내려가는데 반대편에도 멀리 불빛들이 보여요. 저 마을에 가면 바르(Bar, 카페를 말한다)가 있을까요? 커피와 크로와상이 먹고 싶어요.

이젠 날도 밝기 시작했어요. 한참을 내려가니 샘이 나오네요. 잠깐 쉬면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구불구불 밀밭 사이로 이어진 길에 순례자들이 하나씩 보이네요. 참 멋진 풍경이에요. 저도 저 멋진 풍경 중의 하나였겠지요? 오늘은 처음으로 구름이 끼었어요. 지금까지 너무나 쾌청한 날의 연속이었는데 모처럼 구름 낀 하늘이 반갑기도 하네요. 그래도 비는 노노, 노땡큐예요. 비가 오면 얼마나 불편한지 책을 통해 너무나 많이 보아 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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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미스타 지역을 지나 만난 순례자 조형물과 도로 표지판. / 박미희

혼자서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고 있는데 누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이탈리아 3인방(4일 전부터 길에서 자주 만나는 순례자들) 중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온 거예요. 멀리서 제 옷을 보고 일부러 인사하려고 빨리 온 거죠. 다른 친구들은 걸음이 늦어 뒤에 따라오고 있답니다. 반갑게 인사 나누고 저는 다시 길을 걸었죠. 이탈리아 친구는 친구들과 함께 걸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걸으면서 아무리 찾아도 바르가 보이지를 않아요. 마을은 몇 개를 지났는데도요.

잠깐 길에서 쉬고 걸었는데 근 20km를 걸어와서야 커피와 요기를 할 수 있었어요. 이 마을 오기 전 8km 정도는 아예 쉴 곳조차 없더군요. 메세타의 쓴맛을 보는 날이었죠. 그나마 날씨가 흐려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침 식사를 안 하고 왔더라면 지쳐서 쓰러질 뻔 했네요.

운치 있는 카스티야 운하를 따라

바르에서 그동안 마주쳤던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도 나누며 넉넉히 쉰 다음 프로미스타(Fromista)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걸었던 길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카스티야 운하(Canal de Castilla)를 따라 걷는 길인데 물길이 아주 잘 만들어져 있었고 포플러가 길게 뻗어있고 무엇인지는 몰라도 누런 밀밭이 아닌 푸른 밭이 펼쳐져 있는 게 꼭 한국의 풍경 같기도 하고 무척 정겹게 느껴지는 그런 길이었어요. 이 길의 끝쯤에 프로미스타가 있었습니다. 원래 프로미스타까지 걸으려고 했었는데 프로미스타의 알베르게는 별로라고 소문이 나서 여기서 묵어야 할지 더 가야 할지 고민하다 좀 전에 길에서 만난 아저씨가 3.6km만 가면 호텔에 딸린 알베르게가 있다고 안내문을 준 게 있어서 힘을 내 그곳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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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고 조용한 파블라시온의 알베르게. / 박미희

일단 배가 고프니 점심은 먹고 출발하려고요. 바르에 들어가 시원하게 맥주도 한잔 하고 간단히 점심을 먹는데 프랭크부자가 지나갑니다. 자기들은 여기서 묵어야 한대요. 프랭크가 무척 힘들어 보였어요. 이제 구름도 걷히고 땡볕이 작열하는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요. 그깟 3.6km쯤이야! 거기다 저쪽에 마을이 보이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그늘 하나 없는 한낮의 태양은 그야말로 이글이글! 직선으로 뻗은 4km도 안 되는 길이 천 리같이 느껴졌어요.

알베르게에 오니 상황이 별로네요. 저번처럼 호텔에 딸려있는 알베르게라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이곳 알베르게는 너무 낡았어요. 그래도 어제의 알베르게보다는 양반이에요. 18개 정도의 침대가 있었는데 5명이 묵었고 호텔에서 순례자 메뉴도 먹을 수 있대요. 그리고 우선 조용해서 좋았어요. 모처럼 기분 좋게 낮잠을 자고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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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들이 각자 마련한 푸짐한 저녁 식사. / 박미희

다행히 어제보다 날씨도 훨씬 덜 덥네요. 일요일이라서 아예 저녁엔 순례자 메뉴를 먹으려고 했는데 마침 문을 연 바르겸 조그만 슈퍼가 있어서 혼자지만 저녁을 해먹기로 했습니다. 마침 어제 남은 쌀이 있어서 가능한 거였지요. 알베르게로 오니 몰도바(유럽 동부 내륙에 있는 공화국)에서 왔다는 알렉스가 자기가 가져왔다는 차를 끓여 먹어 보라고 합니다. 맛이 괜찮았어요. 친구와 저녁준비를 해서 먹는다더군요. 제가 한 밥과 감자국, 스파게티와 샐러드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 와인이 빠질 수 없겠죠. 얼른 뛰어가서 와인을 사왔지요. 기분 좋아하더라고요.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알렉스는 감자국이 맵다고 하면서도 더 먹기까지 하네요. 이 영어 실력으로 우리나라 남과 북의 이야기까지 나누었다는 것은 참 웃긴 일 아니에요? 식사 후 다시 산책하러 나가서 내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인도 하고 성당도 둘러보았지요. 오늘은 잠자리에 일찍 들지 않았어요. 내일 16km만 걸을 예정이고 낮잠도 푹 자서 피곤하지도 않았거든요. 알베르게 앞 벤치에서 음악도 듣고 해가 지기를 기다려 봤어요.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기분 좋은 저녁입니다.

여태 늘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었기 때문에 그리고 알베르게가 10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온전히 해가 지는 것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10시가 다 될 때까지 해가 있고 11시 20분에야 어둑해집니다. 이렇게 늦게까지 해가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그제야 잠자리로 들어와 잠을 청하는데 사방이 정말 그야말로 쥐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에서 카리온까지 16㎞

모처럼 깊은 잠을 잤습니다. 거기다 늦잠도 잤지요. 늘 새벽 2, 3시면 잠에서 깨곤 했는데 오늘은 6시까지 잔 거예요. 알베르게에 사람도 별로 없고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사람도 없고 하도 조용한 마을이다 보니 이런 기분 좋은 일도 있네요. 그리고 모처럼 환할 때 출발을 하게 되었어요. 오늘은 짧은 거리를 걷기 때문에 마음에 부담도 없네요. 오른쪽 길을 선택해서 가라고 안내서에 나와 있어서 저도 오른쪽으로 걷기로 했습니다. 차도를 피해서 가는 길이라서 아는 사람은 이 길로 가는데 10km 정도 가니 다시 길은 만나지고 카리온까지 찻길을 끼고 지루한 메세타가 이어지는데 메세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 찻길을 끼고 있으니 화장실 해결하기도 어렵고 직선으로 이어져 있어 더욱 지루한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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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온 거리. / 박미희

커피를 마시고 가려고 바르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이탈리아 3인방을 만났어요. 매우 반가웠지요. 사진도 찍고 그제야 이름도 주고받았어요. 메모지를 달라고 하더니 이름을 다 적어주고 자기들은 시칠리아에서 살고 있고 어디쯤 산다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세히 알려주더라고요. 오라찌오, 닌니, 로꼬였어요. 귀여운 중년 아저씨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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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온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이탈리아 3인방. / 박미희

그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그곳 바르에 계속 앉아 한국에 있는 남편, 친구, 이웃들에게 전화도 하며 저의 소식도 전하고 느긋하게 다시 일어나 걸었어요.

오늘은 걷는 길이 짧아서인지 늦게 출발을 했는데도 11시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알베르게가 많아요. 내일 걸을 17.5km는 무인구간이라고 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쉬어 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제가 묵으려는 알베르게가 문을 열려면 한 시간이나 남아서 알베르게 앞에 배낭으로 줄을 세워 놓고 바르로 갔습니다. 거기엔 켈리 모녀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버스터미널 겸 바르였거든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또다시 만나니 아주 반가웠어요. 이젠 이들과 스스럼없이 껴안고 반가움을 나눕니다.

모녀 둘 다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이곳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이틀 머물다 레온(Leon)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올 때도 버스를 타고 온 듯해요. 알베르게 문 열 시간이 되어 작별하고 알베르게로 갔습니다. 이곳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인데 봉사자인 호스피탈레로들도, 수녀님들도 아주 친절했습니다. 수박을 잘라 놓고 도착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고 표정들도 아주 밝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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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온의 수녀원 알베르게 수녀들의 공연. / 박미희

한국인 청년들과 즐거운 한 때

먼저 슈퍼에 가서 장을 봐다가 점심 요기를 했어요. 며칠 전에 만났던 태훈이도 이곳에 함께 머무르게 되었네요. 그리고 태훈이랑 같이 다녔다는 한국 누나 3명도요. 와~ 프랭크 부자도 같은 곳이네요. 아는 얼굴들이 많으니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한국인 청년 한 명이 곤란한 얼굴로 앉아 있었어요. 알고 보니 캐나다 교포 선근이인데 어찌하다 보니 돈이 다 떨어져서 가족이 돈을 보내주길 기다리며 있답니다. 이틀째 수녀원에서 묵고 있었어요. 내일이면 돈이 오나 본데 오늘은 요기 할 돈도 없나 봐요. 제가 5유로를 주며 일단 요기나 하라고 했더니 안 받으려고 손사래를 치다가 정말 괜찮다고 했더니 고맙게 받더군요. 잠깐 없어졌던 태훈이는 음식을 한가득 사서 들어왔습니다. 알고 보니 이 알베르게는 각자 서로 준비해온 음식으로 저녁상을 차리는 게 전통이랍니다. 그걸 알고 태훈이는 선근이 몫까지 음식을 많이 사서 온 것이죠. 너무 기특했습니다. 저도 다시 슈퍼에 가서 음식을 사 왔고 모처럼 한국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6시부터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었어요.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짧게 저를 소개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눈치채셨지요? 왜 그리 짧았는지요. ㅜㅜ 귀여운 수녀님이 기타를 치며 모두 함께 노래하는 흥겨운 시간이었어요. 아는 노래는 몇 안 되었지만요. 그런데 누구든 나와서 노래를 하라고 하니까 선근이가 젤 먼저 손을 들고 나가더군요. 그래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엥~! 찬송가를 부르는 거예요. 기타를 치면서요. (나중에 물어보니 아는 노래가 없었다네요. 휴~ 그러니까 수녀님께서 아리랑을 부르라고 추천을 해 주시더라고요. 아마 그동안 많은 한국인이 아리랑을 불렀던 모양이에요. 노래를 마치니 많은 사람이 엄지를 들어주며 좋아 해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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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온의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과 함께한 즐거운 저녁. / 박미희

끝나고 나서 이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데 정신을 팔려 그만 미사에 늦고 말았어요. 모처럼 저의 말문이 트여 정신이 없었나 봐요. 성당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니 다행히 아직 미사가 끝나지는 않았어요. 늦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신부님의 축복도 받고 수녀님들께서 직접 만드신 행운의 별도 받았지요. 이 별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곳에 있어도 별이 빛을 밝혀줘 길을 잃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리고 음식을 나누는 시간, 기본적으로 수녀원에서 수프를 끓여주셨고 각자 준비한 음식으로 봉사자들과 저녁을 차렸는데 어머! 근사한 식탁이 차려졌어요. 영어를 잘하는 태훈이와 선근이 덕분에 프랭크와 그동안 안면 있던 사람들과 조금은 소통을 하기도 했어요. 한국의 전통 주법과 예의에 대해 설명해 주니 아주 흥미로워하더라고요. 그때부터 프랭크는 나를 볼 때마다 두 손으로 뭘 주는 시늉을 해서 한바탕 웃었고요. 수녀님들도 다시 기타를 들고 나오셔서 분위기를 띄워 주셨어요. 화기애애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태훈이가 시간이 많이 없어 내일 레온으로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하더라고요. 아까 켈리 모녀가 어디서 버스를 탔는지 알고 있어서 태훈이랑 선근이와 함께 나와서 버스 타는 곳도 알려주고 거기서 맥주도 한잔 사 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10시 맞추어 알베르게로 돌아왔습니다. 내일 이 친구들은 늦잠을 잘 것이고 이젠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작별인사도 나누었어요. 아쉬웠지만 이곳에선 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니 어쩔 수 없지요.

아참~! 아까 시몬(순례길 초반에 만난 캐나다 여성)을 오랜만에 만났어요. 수녀님께서 누구의 발을 치료해 주고 있어서 보니 시몬이었어요. 한동안 만나지 못 했는데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 된 거예요. 시몬의 발은 물집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치료 중인 시몬은 엉엉 울고 있었어요. 너무 안타까워 위로해주었고 눈물을 닦게 화장지도 갖다 주었어요. 그리곤 그 후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 했는데 완주하고 돌아갔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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