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간판 그리다 전업작가로…"죽을 때까지 그리겠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자택에서 만난 김대환(88) 화백. 요즘 두문불출한다는 원로 화가는 확실히 예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2년 전쯤 마산 홍화집 문화예술인 모임에서 빛바랜 사진을 들고 과거에 함께 했던 동료에 관해 이야기하던 때와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붓을 놓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는 높았다. '죽을 때까지 그림 그리겠다'는 말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 많이 들었다"

요즘 노환으로 몸이 좋지 않아서 모임에는 잘 나가지 않는다는 김 화백은 준비했다는 듯이 자신의 일대기를 줄줄 쏟아냈다.

그는 일본 오이타 현(大分縣) 오이타 시에서 1929년 3월에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4살 때부터 집에서 낙서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춘일초등학교 3학년인 10살 때 일본 사쿠라 화구 주식회사가 주최한 '일본 어린이 크레파스 대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교포들끼리 축하 잔치를 열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다수 미술대회에서 입상하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대분중학교 3학년까지 일본에서 생활했다.

개인의 인생이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일본이 전쟁을 벌일 때 일본 내 군수 공장에 동원됐다. 오이타 뱃부 온천 쪽에 살다 시모노세키 모지 철도국 학도로 동원됐다. 일본 강점기, 광복, 한국전쟁 등으로 유년기, 청년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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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화가 김대환 화백./박일호 기자

1945년 해방이 되면서 17살에 귀환동포로 한국에 돌아왔다. 동네에 그림 잘 그리는 청년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귀국 후 간판점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그림을 따로 배우지 못했지만 연극인 안윤봉 씨가 그를 알아봤다. 안 씨는 그에게 다른 화가와 함께 그림을 출품해 전시회를 열자고 했다. 흔쾌히 동의했다. 1947년 19살 때 마산백화점에서 열린 '제1회 미술전람회'에 서양화 그림을 냈다. 골목길 풍경을 수채화로 그린 것이었다. 참여 작가 중 최연소자였다. 전시장에는 내로라하는 경남 지역 작가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등 전국 작가들의 그림이 함께 걸렸다. 임호, 이림, 문신, 이준, 최운, 김종영, 양달석, 김기창 등 40여 명의 작가가 11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가위에 찔려 왼쪽 눈 실명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일하며 생활을 하던 중 사고가 났다. 간판점에서 일하던 다른 동료의 실수로 가위에 왼쪽 눈이 크게 찔린 것이다. 점심때에 식사를 하고 쉬던 중에 동료 2명이 가위로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그 가위가 김 화백의 눈을 찔렀다. '내가 운이 나쁜 사람'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마산과 부산의 안과를 찾았지만, 치료가 어렵다는 답만 들었다. 주변에서는 '화가가 눈이 나쁘면 어떡하느냐?'라며 걱정을 했다. 김 화백은 나고 자란 일본에서 눈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거대한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던 소년은 2년 후 조그마한 밀선에 몸을 실었다. 몇 날 며칠을 굶으면서 배를 기다린 끝에 파고가 낮을 때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바다를 건널 때 얼마나 착잡했을까.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에 사는 셋째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누나는 시댁 식구를 보내서 동생을 집으로 데려왔다. 무사히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에서도 치료 시기를 놓친 눈을 고칠 수는 없었다.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누나에게 그림을 잘 그리는 분을 알려달라고 했고, 마침내 스승인 목교당을 만나게 됐다. 김 화백은 어릴 적 중학교 강당에서 본 목교당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4번씩 5개월간 동양화를 배웠다. 스승은 김 화백이 인물화에 소질이 있다고, 특기를 살리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단시간에 자신의 마음에 들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제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목교당의 권유로 오이타현 미술대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누나가 시집간 일본 성을 따서 '가쓰모토'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냈고, 당당히 입선을 했다. 1년가량 누나 집에서 보내며 그림을 배우는 사이에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불법으로 입국했기에 돌아가야 했다. 김 화백은 그림 스승 목교당을 잊지 않고자 자신의 호를 '교당'으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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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화가 김대환 화백./박일호 기자

18년간 간판 그림 그리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극장에서 간판에 배우들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당시 전라도 출신의 이옥도 사장이 운영하는 국제극장에 취업했다. 국제극장은 건축가 출신인 이 사장이 일본의 극장을 본떠서 지었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불행이 반드시 불행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쪽 눈을 다쳐 실명인 김 화백은 눈 탓에 징집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마산 구석에 있는 성냥공장에 청년들을 모아놓고, 징집자를 가려냈다. 신체검사를 해서 징집 대상자를 가리던 중에 눈을 이유로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김 화백은 "나는 그때 다친 눈이 덜 나아서 빨갰다. 우리 친구는 다 끌려갔는데, 나는 여기서 살았다. 눈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많이들 죽었다"고 회상했다.

군 보급대로 동원됐다. 거기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전쟁터에서 쉬는 틈틈이 외국에서 온 UN군의 초상화를 그려서 벌이를 했다. "종이에 얼굴 그림 그려주면, 치약도 주고 해서 한 보따리 싸서 집에 갔다. 총각 때 그렇게 가져와서 이웃과 나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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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화가 김대환 화백./박일호 기자

전쟁이 끝나고 마산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극장 선전부장으로 간판 그림을 그렸다. 국제극장은 강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1년 23살이던 김 화백은 중매로 만난 20살 김금선 씨와 결혼했다. 부인 김금선 씨는 "그때는 직장이 없던 시절인데, 직장도 있고 벌이도 좋고 해서 일찍 결혼했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18년간 간판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다. 그러면서 최운(1921-1989), 문신(1923-1995) 선생과도 교류가 잦았다. '운이 행님', '문신 행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김 화백은 셋 중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돈벌이는 가장 먼저여서 술 한잔 사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어떤 그림도 그려내지만 특기는 미인도

'언제까지 간판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는 18년 만에 간판 그리는 일을 관뒀다.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서다. 교방동, 추산동 등에서 거주하던 그는 두척동으로 집을 옮겨 작업을 해나간다.

40대에 들어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 마산 창동 '왕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이듬해 1969년 10월 마산 창동 '한성다방'에서 개인전을 잇달아 열었다. 이후 사천, 진주 등에서 개인전 7∼8회를 열었다. 개인전은 비용 등을 이유로 많이 열지 못했다.

19살부터 현재까지 70여 년 동안 어떤 그림을 그려왔을까. 그는 "닥치는 대로 다 그렸다. 내 그림이 대중성이 있다. 미인도를 그리니 여자들이 더 좋아하더라. 나는 무조건 그렸다. 수채화, 펜화 가리지 않고 그렸다. 안 한 게 없다. 특기가 인물화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인도 화가라도 미인만 그려서는 안 된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미인도는 초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경치도 그린다. 안 기린 게 없다. 인물화는 (머리) 꼭지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안 중요한 게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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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화가 김대환 화백./박일호 기자

인물화, 풍경화, 포대화상도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지만, 전시회에 미인도를 많이 냈다. 어떤 미인일까. 그는 "한국의 미인을 상상해서 그렸다. 누님을 많이 떠올리며 그렸다"고 했다. 한국의 미인. 김 화백이 상상한 한국의 미인은 쪽진 머리를 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단아한 여인이다. 시대에 따라서 동전과 옷고름 길이를 달리하면서 그의 붓끝에서 잊힌 여인들이 살아났다.

종이에 아교를 끓여서 백분 가루를 타서 그림을 그렸다. 나무를 대서 천을 탱글탱글하게 해서 거기에 풀칠을 해서 날씨 좋을 때 동양화 물감으로 화폭을 채웠다. 목탄으로 윤곽을 잡고 그 위에 연필로 선을 그었다. 목탄을 털고, 부드러운 천으로 지운 후에 먹으로 선을 그어서 붓으로 고쳐가면서 그림을 완성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일까. "많이 그렸다. 기릴(그릴) 때 최고를 기린다(그린다). 최고로 힘들게 해서 보낸다. 그래서 어느 작품이 최고였다고 말할 수 없다. 전부 다 힘들게 만들었다. 내 생애 최고작은 모두다.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그림 그릴 것

김 화백은 요즘은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작품 구상 등을 하며 일상을 보낸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작품을 그리고는 있다. 달마도, 포대도 등의 일필화를 그린다. 많이는 못 하고 있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 죽을 때까지 그릴 것"이라고 작품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2년 전부터 노환으로 집에서 지내는 그는 고질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엎드려서 세필화 그림을 그리다 보니 허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밥도 많이 묵고 매일 산책도 하면서 90세까지 살라고 용을 쓴다. 술 많이 먹는 사람이 일찍 죽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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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화가 김대환 화백./박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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