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던 알렉스. 그 꿈을 위해 비행기를 타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러 가던 중 그는 죽는다. 그가 사랑한 안나는 알렉스가 절실히 바랐던 꿈을 대신 이뤄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를 대신해 힘차게 달린다. 달리고 달리다 보면 날 수 있을지 모른다.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마지막 장면에서 안나는 분명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면이 검게 변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오른다. 지금까지 다섯 번쯤 본 영화다. 나의 '첫' 영화,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Mauvais Sang).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난 영화를 즐겨보지 않았다. 물론 가끔 영화관에 가긴 했지만 영화에 특별한 흥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한 번 보면 그걸로 끝이었다. 어쩌다 <나쁜 피>를 보게 된 건지 시간이 흘러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즈음 자주 교류하던 친구 때문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나쁜 피>는 1986년 작품이라 극장에선 볼 수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한 DVD를 CD 플레이어에 넣는 순간, 세계가 변했다. '영화'에 빠졌다. 이 영화는 이전까지 내가 보았던 영화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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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쁜 피> 스틸 컷.

다시 영화로. 어느 미래, 알렉스의 아버지인 쟝이 죽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쟝의 동료인 마크와 한스는 그를 '미국 여자'가 죽였다고 생각한다. '미국 여자'에게 빚이 있었던 쟝이 그 빚을 갚지 못하니 죽여버린 거라고. 둘은 미국 여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신들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STBO 백신을 빼돌려 빚을 갚기로 계획한다. STBO는 사랑 없이 섹스한 사람들이 걸리는 새로운 바이러스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 걸린다. 젊을수록 걸릴 확률이 높다.) 마크와 한스는 손이 빠른 알렉스에게 이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고, 새로운 삶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알렉스는 이를 받아들인다. 마크, 한스와 인사하는 자리에서 알렉스는 마크의 젊은 정부 안나에게 첫눈에 반한다.

이 영화는 STBO 백신을 훔치기 위한 범죄물에 가깝다. 하지만 이 영화가 완전히 다른 건 난해하면서 개성 강한 연출,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미장센, 짙게 깔린 세기말적 정서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STBO가 에이즈의 비유임을 알면 이 범죄물은 절절한 멜로가 되기도 한다. 한 번 보고는 대강의 줄거리도 가늠하기 어려운 이 영화를 며칠 생각하다가 결국 다시 봤다. 한 번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영화를 소개하며 다시 봤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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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쁜 피> 스틸 컷.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를 보는 것은 하나의 세계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 영화가 세계를 다루는 방식에 젖어드는 것과 같다. 레오 카락스였다가 스탠리 큐브릭이었다가 장 뤽 고다르였다가 데이비드 린치였다가 쿠엔틴 타란티노였다가….

어느덧 열일곱 번째, 매달 영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어쩜 단 하나. 내가 얼마나 영화를 많이 봤는지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얼마나 근사하고 똑부러진 해석을 하는지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고, 영화를 빌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줄줄 해대는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그저 내가 소개하는 이 영화가 우연히 (나에게 <나쁜 피>가 그러했듯이) 누군가의 처음이 되는 일. 누군가에게 이 세계에 함께 가보는 건 어떠냐고 손을 내미는 일. 그렇다면 기쁘고 행복할 것도 같다, 이렇게 컴퓨터 모니터를 마주하며 씨름하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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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쁜 피> 스틸 컷.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흐르고 알렉스가 힘차게 달린다. 그리고 알렉스가 묻는다. "순간의 사랑을 믿어요? 순간적으로 찾아와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그럼요, 믿고말고요. 제가 영화한테 딱 그러고 있는 걸요. '나쁜 피'가 흐르게 됐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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