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요리사 부부, 시골 생활을 꿈꾼 까닭

서울 한 대기업 회장 의전팀에서 VIP 음식을 담당했던 젊은 요리사들. 남들이 보기엔 부러울 것 없었던 이들은 서울에서의 삶보다 시골생활을 꿈꾸었고, 운명처럼 두 마음이 맞아 결혼과 함께 그 꿈을 실천에 옮겼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서 알리바바 농장을 운영하며 다육식물과 깨, 콩, 감, 벼농사를 짓는 박재민(36)·박서경(36) 부부다.

귀농 꿈꿨던 청춘남녀, 결혼과 함께 시골로

"막연히 시골에서의 삶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골에 사는 게 꿈이라고 했더니 그 꿈을 이뤄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서울 생활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지만 저하고는 맞지 않았어요. 꽉 짜인 틀에서 움직이는 게 너무 각박하다 여겼죠. 이런 곳에서 애 낳아 잘 키울 자신이 없었습니다. 직장 동료로 호감을 느꼈는데 남편도 시골을 생각했더라고요."

보통 도시인들도 생각하기 쉽지 않은 농촌생활을 젊은 부부가 꿈꾼 이유를 물었더니 아내 서경 씨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요리일을 하면서 남들처럼 살아가는 게 올바른 삶일까 고민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직장생활 하면서 월급 받아 애들 키우고, 내 집 마련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며, 또 퇴출당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동료와 경쟁해야 하나 하는 그런 생각들이었죠. 그런데 이런 고민을 아내도 했던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쇼핑에 명품 좋아하고, 우아하게 외식이나 즐기는 사람이었더라면 이곳에 올 수 없었겠죠. 아니 처음부터 저와 인연이 안 됐을 겁니다."

남편 재민 씨도 똑같은 생각을 했단다. 그러고 보면 귀농은 부부의 운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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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서경 씨./김구연 기자

컴퓨터에서 요리로, 다시 농부로 '화려한 변신'

재민 씨는 대학에 다니면서 컴퓨터를 공부했다.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컴퓨터로는 자신에게 밝은 미래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게 일본요리였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면서 틈틈이 일본어를 공부했었습니다. 그땐 목적을 가지고 일본어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운 일본어가 유용하게 쓰였던 것이죠.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어학원에서 1년을 공부하고 나서 요리전문학교에서 2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어엿한 일식 요리사가 된 것이죠."

재민 씨는 일본어로 고급 대화도 가능할 만큼 능통한데다 요리 실력까지 갖춰 일본에서 직장을 잡으려고 했단다. 하지만, 일본에서 외국인이 일식요리사로 일하기는 쉬운 게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요리와 애완견, 미용 쪽 일은 취업비자가 발급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귀국하게 됐죠. 그게 2008년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재민 씨는 아는 분의 소개로 서울에서 첫 직장을 잡았다. 물론 요리사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기회가 생겼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회장 의전팀 요리사를 구하는데 일본요리가 전문이었다. 일본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일본어에도 능통한 재민 씨는 당연히 경쟁력이 있었다. 그렇게 뽑힌 재민 씨는 의전팀에서 일식 요리를 하게 됐지만 그 생활은 길지 않았다. 그곳에서 한식팀장으로 있던 아내 서경 씨를 만나게 됐다.

"직장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곳이었지만 근본적인 삶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죠. 그 해답이 농촌이었고, 직장 동료로, 또는 상사로 있던 아내를 만나 힘을 얻어 아내의 꿈을 이뤄주겠다며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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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민·박서경 부부./김구연 기자

수상한 부부, 마을 주민들의 관심 대상

일본 유학까지 마친 재민 씨의 귀농을 부모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반대가 심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민 씨 대답은 반대였다.

"부모님께 결혼을 하겠노라며 동시에 귀농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사실 걱정은 좀 됐습니다. 어느 부모가 30대 초반 젊은 부부의 시골생활을 찬성했겠습니까. 하지만, 저희 부모님 대답은 달랐습니다. 당신들은 기꺼이 자식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응원했습니다. 한편으로 자식이 부모 가까이 온다는 데서 위안을 삼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재민 씨는 부모님의 든든한 응원을 등에 업었지만 되도록 부모님 간섭을 안 받는 곳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다. 그러던 중 함안 군북에 아이들 농사체험이 가능한 집과 터를 임대한다는 소식을 주간정보지에서 보고 곧바로 계약했다. 그게 2012년 6월이었다.

부부는 처음 이곳에 들어와 2년 가까이 아이들 체험농장을 했다. 그렇다고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수용할 상황도 아니어서 마산, 창원, 진해 지역 소규모 어린이집에 600통 정도 팸플릿을 보냈단다. 봄에는 감자나 양파캐기 체험을, 여름엔 옥수수 따기와 미니수영장에서 물놀이 체험을, 가을엔 고구마 캐기와 단감따기 체험을 했다. 마을 어르신들이 젊은 부부가 돈벌이도 없는데 걱정이 됐던지 바로 집 옆 100그루 정도 감나무가 있는 감밭을 임대료도 받지 않고 줬단다. 부부는 기계도 없이 괭이로 밭을 일궜다고 했다.

"대부분 귀농하는 사람들은 어릴 적 살던 곳이거나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귀농귀촌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린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들어오다 보니 마을 어르신들의 관심거리가 됐죠. 처음 왔을 땐 말들이 많았었나 봅니다. 왜 이런 강촌으로 왔는지, 무슨 큰일을 저지르고 온 게 아닌지 궁금했던 거겠죠. 우리가 서울서 직장 생활하다 시골이 좋아서 들어왔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그렇게 한 1년 정도 지켜봤을까? 시간이 지나니 수상한 우리 부부를 진짜 농사지으러 온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그때부터 묵정밭도 내어 주고 온갖 도움을 주더라고요."

서경 씨도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하루는 동네 어른들께서 보증금 얼마를 주고 임대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5000만 원을 들였다고 했더니 시골집에 누가 그런 비싼 돈을 들이느냐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간난 애가 있는 젊은 부부가 굶어 죽는 게 아닌지, 심지어 할머니들이 종종 집에 들르기도 했죠. 얘들이 뭘 할까, 농사지을 줄도 모르는데 뭘 심어놨나, 잘 심었나 못 심었나 매일 보고 다녔던 거죠. 그러면서 괜찮으냐, 궁금한 게 있으면 배우러 와라, 지금 뭐 심을 철인데 씨앗 줄 테니 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저희는 몰랐는데 우리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일 동네에 생중계되고 있었던 겁니다. '니네 어제 뭘 했다면서'라고 할 정도로 우리 가족 일이 동네 얘깃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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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민·박서경 부부./김구연 기자

마을 주민 귀염둥이 된 부부와 아이들

젊은 부부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시골에 들어와 동네 어른들의 온갖 관심을 받기까지는 부부의 특별한 노력이 있었을 것 같았다. 비결이 뭐였을까? 서경 씨는 고향 전북 진안에서의 어릴 적 생활을 기억했다고 했다.

"어릴 때 시골에 살았던 덕에 어른들이 이렇게 하면 좋아하더라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저녁에 할 일을 끝내면 일주일에 한두 번 꼭 할머니들이 모여서 노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물론 애들도 데리고 가 함께 TV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군것질거리가 생기면 들고 가서 할머니들과 나눠 먹곤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한참 하고서 집 계약기간이 다 돼 지금 있는 이곳 아랫동네로 이사를 한다고 하니 되게 섭섭해 하더군요. 말벗도 되고, 객지에 있는 손주들 재롱 대신 우리 아이들 커 가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놀잇감(?) 같은 존재가 사라진다고 하니 서운했겠지요. 멀리 이사 가는 게 아니라 윗마을과 아랫마을 거리는 200~300m에 불과한데 나이가 많아 마을회관까지 못 내려오니 그렇더라고요."

부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할머니들의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다 싶었다. 귀농한 그해 10월 결혼식을 올리고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마을에서 아이를 출산한 부부이니 동네 사람들의 관심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젊은 부부가 밤이면 아기를 안고 마을회관으로 와 군것질거리도 나누고, 친딸과 손주 이상의 재롱을 피웠으니 오죽했을까 싶었다.

재민 씨가 큰아이 출생신고 때 재미난 사연도 들려줬다.

"면사무소에 가 민원을 담당하는 분에게 서류를 물었더니 뒤에 앉아계신 웃분에게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면사무소인데 농촌지역에 얼마나 출생신고하는 젊은 부부가 없었으면 계장님이 직접 출생신고 업무를 처리할까 싶더라고요. 계장님도 제가 출생신고하러 왔다는 말에 어찌나 반가워하시던지…."

재민 씨는 이런 동네 주민들의 지나친(?) 관심에 정이 듬뿍 들어 이젠 정착할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처음 이곳으로 들어올 때 보증금으로 들인 5000만 원이 우리 전 재산이었습니다.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는 다들 처음부터 집을 사서 들어가지 말고 임대해 살면서 충분히 시골생활을 경험해보고서 집을 구하라 하더군요. 여차하면 다시 빠져나와야 한다는 의미였겠죠. 우린 운이 참 좋았습니다. 윗동네에서 살던 집 계약기간이 끝나가는데 마침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임대로 나왔더라고요. 이 마을에서 몇 년 살아보니 정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하고 남은 돈으로 집터를 마련해 뒀습니다. 아직 여유가 안돼 짓지는 못 하지만 조만간 우리들의 집을 지을 계획입니다."

도시보다 더 바쁜 농촌, 그러나 마음은 넉넉

부부는 동네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에서 점점 마을 일을 도맡는 일꾼으로 성장하고 있다. 취미생활로 시작한 다육식물을 중국으로 수출해 이젠 부부의 최대 수익원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고령화로 동네 사람들이 지을 수 없어 부부에게 준 밭들의 감나무가 350여 그루가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벼농사도 1000평 정도 되며, 올해는 참깨 1000평에 콩을 1500평 정도 심을 계획이다. 그러다 보니 육체적으로 여간 고단한 게 아니다.

서경 씨는 "이렇게 바쁠 줄은 몰랐습니다. 도시 생활보다 더 바쁜 것 같아요. 여기서는 시간을 분 단위로 움직입니다. 도시 친구들이 밤엔 뭐하느냐고 그러는데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잠자기 전까지 다육식물 인터넷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밤낮이 없습니다. 더구나 농사를 뭘 지을지, 어떻게 지을지 모르니까 공부도 해야 하죠."

그렇지만, 마음은 그렇게 넉넉할 수가 없다고 했다. 서경 씨는 "하루는 남편에게 물었죠. 혹시 서울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고요. 그랬더니 비록 이제 5년차 귀농이지만 잘 왔다고 생각한다더군요. 사실 이게 내가 하고 싶던 말이었습니다."

서경 씨가 말을 계속 이었다.

"직장생활처럼 꾸준한 수익이 없으니까 불편함은 있죠. 돈이 필요할 때 일정하게 나오는 게 아니니 그게 불편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은 감수하겠다고 마음먹고 귀농했기에 못 살겠다 이런 것은 아닙니다. 주부로, 또 아내로 가계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감이 없지는 않습니다. 부딪히다 보면 뭔가 탈출구가 생기고 하나씩 실마리가 풀리거나 주위 도움을 받기도 하죠."

재민 씨도 "여기서는 남들에게 내 겉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내 차종, 내 집 규모, 직장에서 내 직위, 내가 갖고 다니는 것 이런 것들이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세수 안 하고 다녀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 없습니다. 흙이 묻으면 흙 묻은 대로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겉치레가 필요 없습니다. 이게 농촌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점점 늘어나는 빈집… "마을 지키는 일 해볼 것"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서경 씨가 어려운 점이 많은 모양이다. 대답을 가로챈다.

"남편 때문에 종종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애들은 아직 어리고 일은 쌓여 있는데 남편은 교육에다 새마을지도자 일에다 모임을 핑계로 나가면 혼자 일을 해야 합니다. 바깥일이 좋으면 집안일은 적게 벌려야 하는데 대책 없이 일을 크게 벌려 허리가 아플 정도입니다."

이쯤 되면 재민 씨가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서경 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다육을 키우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우릴 보고 엄청 답답해하죠. 다육에 올인해도 충분히 소득이 보장되는데 뭣 하러 힘들게 다른 농사를 짓느냐는 것이죠. 땡볕에 애 업고 일하느라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고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린 이렇게 사는 게 좋습니다. 지금 힘들어도 나중엔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이 있으니까요."

결국 서경 씨의 '남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행복한 엄살이었다.

앞으로 다육 재배를 더 늘릴 계획이라는 재민 씨는 마을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낸다.

"우리가 여기 들어와서 지금까지 마을 주민들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해가 갈수록 주위에서 빈집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10년 정도 지나면 마을에 남아 있는 어르신은 몇 분 안 될 겁니다. 마을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마을기업 같은 것도 해보고 싶고,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노력하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매력 있는 부부다. 재민 씨와 서경 씨의 엉뚱하지만 확신에 찬 앞으로의 농촌생활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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