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천사의 위로, 이제는 어엿한 순례자가 되다

6월 29일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29.4㎞

오늘 날씨가 덥다는 정보가 있어 아침도 안 먹고 출발을 했기 때문에 중간중간 쉬며 요기를 했어요. 먹어야 힘이 생기니까요. 하도 매일 걸으니까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막상 먹으려면 많이 먹히지도 않아요, 지쳐서인지. 그래서 의무감으로 먹기도 하죠. 어떤 사람은 카미노에 가면 살 빠진다는 소리를 듣고 왔다가 걸으니 더욱 식욕이 당겨서 더욱 살이 쪄서 갔다는 이야기도 들리네요.

넓은 그라헤라 호수(Pantano de La Grajera)를 지나다 호수 옆에서 간식을 먹고 있는데 한국사람같이 생긴 사람이 지나가기에 물어보니 대만에서 왔대요. 실망스러웠지만 반갑게 인사하고 헤어졌어요. 얼마를 더 가서 그라헤라 고개(Alto Grajera)을 지나는데 철조망에 수없는 나무 십자가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어요. 순례자들이 소망을 담아 십자가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난 십자가를 달지는 않았지만 모든 이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지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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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로뇨를 떠나는 새벽./박미희

오늘도 여전히 쾌청한 날이네요. 하늘은 습도가 없어서 늘 가을 하늘 같아요. 거기에 노란 밀밭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이지만 하도 보아서인지 이젠 감흥도 별로네요. 일찍 출발하였기 천만다행이었어요. 땡볕이 너무 강렬해서 걷기가 힘이 들었거든요. 배낭도 무겁고 이상하게 가슴도 아파져 오더라고요. 그래도 다행히 발은 물집이 생긴 후 더욱 신경을 써서 아침마다 꼼꼼히 바셀린도 바르고 자주 양말을 벗고 쉬어 줘서인지 더 심해지지는 않고 있어요.

나헤라(Najera)에 다 도착해 가는데 동네 입구에 사람들이 나와서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고 있더라고요. 우리나라 목살같이 생긴 것을요. 그래서 동네잔치 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시내로 들어섰는데 청소년들도 많이 나와서 왔다 갔다 하고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고 무척이나 생기가 넘치는 곳같이 느껴졌어요.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를 찾는다고 강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데 강 주변에도 많은 사람이 나와 아까처럼 고기를 굽고 있고 바들도 북적북적, 분명히 무슨 날임에 틀림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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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헤라 초입에서 만난 주민들이 굽던 고기./박미희

아직은 알베르게 찾는다고 힘이드니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물어물어 알베르게를 찾았는데 아까 내가 지나온 곳에 있더라고요. '에고 힘들어라!' 그래도 1시쯤 도착을 했어요. 방에 들어가니 4명이 자는 방에 이미 3명이 들어 있었는데 엄마와 아들 둘 같았어요. 나에게 1층을 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이곳에선 2층에 자지 않는 것만도 행복하거든요. 침대에 걸터앉아 있지도 못하고 2층까지 오르내리며 짐 챙기고 하는 게 참 불편해요.

일단 씻으러 가는데 프랭크 부자, 딸을 로그로뇨에서 보내고 혼자가 된 앤, 자주 만나지는 미국인 켈리 모녀,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데레사도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어요. 자주 보던 얼굴들이라 참 반갑더라고요. 씻고 들어오니 아들 중 큰아들처럼 보이는 아이가 자꾸 말을 걸어왔어요. 고맙게도요. 스페인 사람이고 이름이 미구엘인데 17세라고 했어요. 알고 보니 이모와 함께 온 거였어요. 이모 이름은 로사고, 사촌 동생은 엘도르인데 초등학교에 다닌 데요.

나헤라에서 만난 천사 미구엘

이 가족은 일주일만 걸으러 온 거래요. 많은 이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와서 걷고 가는 걸 봤어요. 꼭 생장에서 출발해 산티아고까지 걷는 것이 아니라 출발하는 시점도 다 다르고 본인들의 계획에 맞추어 와서 얼만큼씩 걷고 가는 거죠. 유럽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걷기 시작해서 몇 달씩 걷는 일도 있어요. 다들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들 이 길을 걷더라고요.

이 가족은 정말 친절했어요. 특히 미구엘이요. 한국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휴대전화 앱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소통을 했어요. 제가 슈퍼에 간다고 하니 기꺼이 따라가 준대요. 오늘은 시에스타도 없는지 아니면 큰 슈퍼라서인지 문을 계속 열어 놔서 저녁거리, 낼 아침 거리, 간식을 챙겨 숙소로 왔답니다. 미구엘이 짐도 들어주고 도와줘서 훨씬 힘이 덜 들더군요. 그 많다던 한국인도 만나기 어렵고 반벙어리로 사는 저에게 천사를 보내주셨어요. 이 길에서 천사를 세 번 만난다고 하던데(믿거나 말거나) 맨 처음 홀로 걷기 시작해야 하는 저에게 미국 언니가 천사로 다가왔고 두 번째 천사가 바로 미구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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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헤라 시내를 가로지르는 나헤리아 강./박미희

알고 보니 내일이 성베드로 축일이라서 축제를 3일이나 한다더라고요. 조금 있으니 어디서 음악 소리가 들려요. 창밖을 내다보니 도시 사람이 모두 나온 것 같았어요. 한 무리의 밴드가 똑같은 곡을 연주하며 다리를 건너오는데 손에 맥주나 음료를 든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춤을 추고 들썩이며 밴드의 앞뒤에서 즐기고 있었어요. 밴드를 바꿔가며 곡을 연주했고 아주 천천히 근 한 시간 가까이 다리를 건너오더라고요.

나헤라가 축제의 도시라더니 성인 축일을 이렇게 성대하게 하는 줄 몰랐어요. 이렇게 모든 사람이 나와서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어요. 한국에 있는 우리 동네는 많지 않은 행사 중 가장 크다는 대보름 행사도 없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축제가 많다는 것에 놀랍고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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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축일 축제를 즐기는 나헤로 시민들./박미희

넋을 놓고 난간에서 사진만 찍고 보고 있는데 미구엘이 축제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어요. 당근이지! 얼마나 나가고 싶었는데! 얼른 미구엘을 따라 내려오는데 프랭크랑 마주치자 미구엘이 같이 가자고 합니다. 프랭크도 오케이! 다른 사람 챙길 시간도 없이 사람들과 합류를 해서 우리도 춤을 추고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며 (경쾌한 음악이 수없이 반복되니까 금방 외워지더라고요. 아직도 그 음악 소리가 생생하네요.) 축제를 즐겼습니다.

동네 스페인 아줌마들도 우리랑 팔짱을 끼며 동참을 환영했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주며 좋아해 주더라고요.

물이 쏟아져서 위를 쳐다보니 2, 3층 난간에서 사람들이 내려다보며 물을 막 붓고 있었어요. 약간 취기도 있고 흥분한 사람들은 물을 더 부으라고 야단이고 그 모습에 '하하호호' 다들 즐거운 표정입니다. 그 행렬은 광장까지 이어졌고 그곳에서 콘서트도 열리고 있네요. 하지만 우린 순례자! 10시면 알베르게 문을 닫기 때문에 얼른 가서 저녁도 먹고 해야 해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행렬을 비집고 나와 숙소로 돌아왔답니다.

미구엘에게 내 휴대전화 번호와 이메일을 가르쳐 주며 한국에 꼭 오라고 했어요.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죠. 사 놨던 과일과 태극기 배지 두 개를 주니 너무 좋아했어요. 자신도 기회가 되면 한국에 꼭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잠을 청했어요. 내일 아침이면 우린 새벽에 출발을 할 것이고 이젠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아쉬워서인지 밖이 소란스러워서인지 너무 더워서인지 또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6월30일 나헤라에서 그라뇽까지 28㎞

오늘은 짐을 부치고 걷기로 했습니다. 어제 놀 땐 모르겠더니 가슴도 뻐근하고(배낭 앞 끈을 너무 조여서인지) 무척 피곤하더라고요. 일단 완주가 목표이니 몸을 아껴주기로 하고 큰 배낭은 부치고 작은 배낭에 간식만 챙겼어요. 아침식사를 하는데 프랭크 부자, 켈리 모녀, 데레사도 내려왔고 여럿이서 함께 알베르게를 나왔어요.

어제 축제로 어마무시한 쓰레기로 가득한 시내를 빠져나와 그라뇽을 향해 출발을 했습니다. 이제 탄력이 붙었는지 다들 어찌나 빠른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함께 걷다 보면 용변 문제도 있고 다들 자기만의 페이스가 있기 때문에 무리 지어 걷기가 어려워져요. 저도 어느새 또 혼자 걷고 있네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해가 뜨는 새벽에 음악을 들으며 걸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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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뇽으로 가는 길./박미희

어제 미구엘 덕분에 슬럼프를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감이 생기며 끝까지 걸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조울증 환자도 아닌데 며칠 사이에 기분이 심하게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며 저 자신에게 헛웃음도 났어요. 오늘은 배낭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천천히 여유 있게 흐르는 개울물에 발도 담그며 왔는데도 30여㎞를 6시간 정도에 걷고 11시 좀 넘어서 그라뇽(Granon)에 도착하였습니다. 배낭이 있었더라면 상황이 좀 달라지긴 했겠죠?

도착을 하니 그곳의 오스피탈레로(Hospitalero. 알베르게 운영자나 봉사자를 이렇게 부른답니다)가 너무 격하게(?) 반겨줍니다. "오~ 꼬레아!" 하며 끌어안고 야단인데 술 냄새도 살짝 나는 게 좀 부담스럽더군요. 거기다 아직 제 배낭이 도착을 안 한 거예요.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거기에 짐이 다 들어 있는데 잃어버리면 큰일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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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뇽 초입./박미희

'그것 봐~ 지고 가자고 했지? 오늘 거리도 멀고 해서 보내고 온 거잖아~!' 맘속에서 난리가 났어요. 약간 취한 호스삐딸레로도 '잘 모르겠다' 그러고요, 또 한 명의 봉사자에게 물어도 '자기도 오늘 여기가 처음이니 기다려 봐라'고 하는데 답은 없더라고요. 일단 접수를 하는데 알베르게도 영 별로였어요. 성당에 딸려 있었는데 봉사자들이 운영을 하고 있었고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쭉 누워 자는 형태로 되어 있더라고요. 좀 깨끗해 보이지도 않고요. 하지만 저는 순례자! 편하고 깨끗한 곳만 찾으려면 집에 그냥 있거나 호텔을 찾아야겠죠. 켈리 모녀는 먼저 와 반갑게 인사를 하였고 조금 있으니 프랭크 부자, 앤도 이곳으로 들어오더군요. 약속이나 한 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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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뇽 마을 끝에서 바라본 풍경./박미희

매일 같은 일과, 매일 다른 느낌

아직 짐이 안 와서 씻지도 못하고 밖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으니 1시쯤 배낭이 도착을 했습니다. 에고~ 얼마나 반갑던지요. 앞으론 배낭을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도 해 봅니다. 씻고 살짝 낮잠을 자고 일어나 광장에 나가니 프랭크는 또 그림을 그리고 있네요. 피터도 옆에서 글을 쓰다가 저더러 앉으랍니다. 프랭크가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보여 주기에 화가인지 물었더니 화가가 아니고 건축사랍니다. 이제야 프랭크의 본 직업을 알게 된 거예요. 그림이 너무 멋지다고 칭찬해 주고 나도 그 근방에 앉아 일기를 썼어요. 그리고 내일은 어디까지 걸을 것인지 혼자서 궁리하다 보니 날마다 하는 일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고 걷고 씻고 널고 일기 쓰고 내일 어디까지 갈 것인지 고민하고 자고, 정말 단순한 반복인 것 같은데 왜 이리 하루하루가 다른 느낌일까요? 참 신기하죠.

이곳에서 저녁식사는 봉사자들이 와서 준비를 해 주고 순례자가 알아서 기부를 하는 형태로 운영을 하고 있었어요. 봉사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어요. 저도 식사준비를 거들다가 미사가 있다고 해서 성당으로 갔어요. 미사를 하는 내내 눈물이 났어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간의 맘고생 때문에 제풀에 서러웠던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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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사다 성당 앞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과 함께./박미희

울음 뚝 그치고 식당으로 갔어요. 혼자 온 분들도 많네요. 이 길에는 70, 80대가 정말 많아요. 혼자이거나 부부가 함께 오지요. 오늘도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제법 보이네요. 한국 정서 같으면 힘든 일인데 참 부럽더군요. 그중에 빨간 티를 입은, 자기 집 앞에서 출발해서 석 달째 걷고 있다는 70 이상은 거뜬히 되어 보이는 독일 할아버지가 인상적이었어요. 내 옆에 앉았었는데 친절하게 대해 주시더군요. 그렇게 크지 않은 알베르게라서 사람이 많지 않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였답니다. 식사 중에 봉사자들이 노래를 불러 주었는데 참 듣기가 좋았어요. 힘들 텐데 유쾌한 모습들이 보기 좋았지요.

식사 후 모두 힘을 합쳐 설거지를 하고 나니 10시 가까이 되었네요. 술이 약간 취했던 봉사자가 우리를 성당 다락방으로 데려갔어요.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촛불을 켜고 돌아가며 기도를 하게 하고 다들 포옹으로 끝을 맺었는데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훈훈한 마음으로 내일은 20㎞ 정도만 걸을 예정이니 좀 늦잠을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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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 성당./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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