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가 아니라 시민사를 쓰자

2015년 가을 아일랜드 더블린에 갔을 때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목격했다. 일행들이 머물고 있는 템플바로 가기 위해 아일랜드 중앙은행 앞 건널목을 건너는데 신호등 기둥에 대충 걸어 놓은 듯한 광고판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주요 내용은 이랬다.

'톰 클라크 세미나'

- 일시 : 10월 31일(토) 오후 2~5시

- 장소 : 더블린 시청

"톰 클라크는 부활절 선언문의 최초 서명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더블린 시내에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미나는 1916년 부활절 봉기 당시에 그의 역할을 널리 알리는 데 있습니다."

주관 : 톰 클라크 기념 위원회

주최 : 1916-1921클럽

광고판에 소개된 부활절 봉기는 1916년 부활절 주간 월요일에 일어난 무장 봉기를 일컫는다. 아일랜드에서 우리나라의 3·1절 정도의 비중을 갖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12세기 때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아일랜드는 18세기의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19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민족주의 열풍에 영향을 받아 800년에 가까운 지배를 벗어던지고 아일랜드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이날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 세미나의 주최자인 '1916-1921클럽'은 1940년에 만들어진 조직으로 독립전쟁 당시에 발생한 아일랜드공화국군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광고판에 소개된 톰 클라크는 아일랜드의 공화파 정치인으로 부활절 봉기가 일어나기 전 15년 가까이를 영국 감옥에서 지낸 인물이다. 그를 기념하는 위원회가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더블린 시내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시청에서 세미나를 개최한 것이다. 아마도 올해 있을 부활절 봉기 100주년 기념 행사에 톰 클라크의 위상을 좀 더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위원회가 발빠르게 움직인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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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시내 건널목 기둥에 매달린 '톰 클라크 세미나' 홍보 포스터.

우연찮게 더블린 시내 건널목에서 목격한 이 포스터는 우리나라 상황과 비교되면서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오르게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3·1운동 유공자에 대한 발굴 및 재평가 작업 정도가 될 것 같았다. 상상해보면 서울 광화문의 세종문화회관 앞 건널목을 건너는데 기미독립선언문 최초 서명자 아무개에 대한 세미나가 서울 시민청에서 열린다는 광고가 붙어있는 셈이겠다.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100년 전 역사 인물에 대해 지금도 활발하게 토론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이야기가 시내 한복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건널목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걸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르긴 해도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런 인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지역, 우리 도시에도 재평가하고 널리 알려야 할 인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인물들을 잊지 않고 되새기고 현재 속으로 불러들이는 활동들이 활성화된다면 지역과 도시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서울시의 기억수집 활동

지난해 봄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울문화재단에서 '메모리인(人)서울'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담당자가 1995년 6월 29일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와 관련해 인터뷰에 응해 달라고 요청해온 것이다. 당시 나는 대학생 신분으로 삼풍백화점에서 가까운 서울교대 캠퍼스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그때 어떤 문서에 내 이름이 대학생 자원봉사 조직팀장으로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발견한 담당자가 수소문 끝에 연락을 해온 것이다. 한 시간 가까이 인터뷰에 임한 뒤 역으로 내가 그쪽 직원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메모리인서울'이라는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획돼서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취지가 신선하면서도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메모리인서울' 프로젝트는 서울문화재단이 2012년 6월에 처음 아이디어 회의를 가진 뒤 2013년 신규사업으로 채택한 프로젝트였다. 2013년 25명의 '기억수집가'를 선발했고 2016년 올해 봄에는 제4기 기억수집가 모집이 이뤄졌다. 이 프로젝트 취지를 간단하게 압축하면 '서울시민의 생활사를 채록해 시민의 일상이 곧 역사가 되게 하자'는 것이다. 서울문화재단의 사업 소개문에 따르면 "기억으로의 역사를 목소리로 기록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예술콘텐츠를 창출하여 서울에 문화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사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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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메모리인서울' 프로젝트에서 활동할 기억수집가 모집 포스터.

선발된 기억수집가들은 약 두 달간에 걸친 소양 교육을 받고 1년간 활동에 들어간다. 미시사의 이해, 구술 채록의 기초, 인터뷰법, 서울의 근현대사 등을 익힌 기억수집가들은 고성능 녹음기를 가지고 서울 시내를 누비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들을 녹음해 한 공간(http://www.sfac.or.kr/memoryinseoul)에 축적해나간다. 내가 참여했던 2015년 봄까지 서울시민 약 1,000여 명이 참여해 1,000여 건의 인터뷰를 축적한 상태였다. 또 서울도서관 1층에 '메모리 스튜디오'라는 베이스캠프를 만들어 시민들이 직접 찾아와 자기 사연과 추억을 녹음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동하는 스튜디오인 '메모리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기억수집가와 자발적 기억 제공자들 외에 특정한 지역과 주제를 정해 집중적으로 기억을 수집하는 활동도 병행했다. 2013년 첫해에는 우리나라 영상산업의 요람인 '충무로'에 대한 기억을 집중 축적했고, 이듬해에는 '서울을 기억하는 세 가지 방법'이란 기획 프로젝트로 '서울의 아픔 : 삼풍백화점', '서울의 추억 : 동대문운동장', '서울의 환희 : 2002년 월드컵' 이렇게 세 가지를 진행됐다. 나에게 연락이 왔던 전화는 바로 이 기획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메모리인서울' 프로젝트의 목적은 '축적'인 동시에 '활용'이기도 하다. 주최측은 축적된 이야기를 토대로 다양한 2차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서 소개한 '충무로'를 비롯해서 수집된 기억 속의 '한강'을 주제로 별도의 전시와 기록물을 남기는 방법이다. 특히 2014년부터 2015년까지 기획 프로젝트로 수집된 삼풍백화점 관련 콘텐츠들은 특집 전시와 인쇄물, 그리고 영상물로 만들어져서 서울시민청에서 한 달간 특별전시가 이뤄졌다.

2015년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502명의 사망자와 6명의 실종자, 937명의 부상자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관련해서 105명의 시민이 증인으로 나섰다. 그중에 유가족 중 한 분인 김문수 씨는 다음 뉴스펀딩에도 소개돼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주최측은 기억수집 활동과 다음의 뉴스펀딩을 연계했다). 이처럼 서울시의 메모리인서울 프로젝트는 서울 시민이라면 함께 겪었을 슬픔과 여러 가지 기억들을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불러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공동체들과 함께 나누는 데도 성공했다. 특히 삼풍백화점 특별전은 2014년에 있었던 세월호 사건과 자연스럽게 중첩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서울시민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1980년대에 발견한 '민중'

서울시의 '메모리인서울'에서 역사를 써내려가는 저자는 시민이다. 훈련받은 기억수집가들은 시민들이 자기 언어로 자기 역사를 구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이자 프로듀서 역할을 할 뿐이다. 역사는 시민이 써내려간다. 이 말은 도시 역사의 주체로, 도시 역사의 스토리텔러로 시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의 주체 논쟁이라면 1980년대에 태동한 민중사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사학은 지배 엘리트나 자본 엘리트가 아니라 피지배 상황에 놓인 민중을 역사와 변혁의 주체로 보고 역사 다시 쓰기를 해나갔다. 지금은 이 관점이 상당 수준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독재정권이 북한과 연결된 체제 전복적인 개념이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일삼았다. 특히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2월 12일 <한국민중사>를 발간한 풀빛출판사의 나병식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사건은 현대판 분서갱유로 비유되며 역사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논쟁을 이끌어냈다.

이와 같은 민중의 발견은 사실 기독교 신학에서 먼저 이뤄졌다. 1975년 3·1절 예배의 설교에서 안병무 목사가 '민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바로 다음 달인 4월 서남동 목사가 '민중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함으로써 이른바 '민중신학'이 돛을 올렸다. 민중신학이 그 시점에 싹을 틔운 결정적인 배경은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인 개발 독재 아래서 자기 몸을 불살라 저항했던 평화시장 재단사 출신의 전태일은 당시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고 또 본질적인 반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는 동학농민전쟁과 3·1 운동, 그리고 4·19 혁명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피지배 계층의 저항을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민중'이라는 개념이 기초로 놓이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된다. 민중사학을 비롯해서 민중미술, 민중문학이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역동성을 만들어냈다. 시위 현장에 대형 걸개그림이 내걸리고, 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선보였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들면서 민중사관은 급격하게 퇴조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사회 전반이 빠르게 변화할 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 컸다. 민중사학자들은 여전히 변혁의 주체라는 이념화된 민중상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90년대의 민중은 대부분 변혁의 현장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80년대의 관성 속에 있었던 민중사학계는 그들의 삶을 제대로 포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민중사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민중 없는 민중사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고, 그 결과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실제 민중의 삶 속으로 천착해 들어가려는 노력이 여러 갈래로 시도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을 수집해 역사를 구성해가는 구술사적 접근도 이때부터 활발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 성과로 민중의 생활사 혹은 미시사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기존 민중론에선 다뤄지지 않았던 이주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기록도 축적되기 시작했다.

앞서 소개한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메모리인서울' 프로젝트도 어떤 의미에서는 진보된 민중사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대신 이 프로젝트는 '서울'이라는 공간적 범위 안에서 시민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방법론을 택했다. 학자나 전문가가 기술하는 서울의 역사가 아닌 시민의 기억을 조합하는 방식이었다. 아직은 초창기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지만, 2013년부터 4년 연속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안팎으로 평가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시민을 발견하자

우리는 시민이 투표해서 시장과 의원을 뽑는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 도시의 리더십이 100% 시민의 손에서 탄생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의 역사에서 과연 시민이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실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도시 역사책에서도 시민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 책에는 시민 대신 행정 기관과 구역, 그리고 사회 및 산업 구조의 변화만 잔뜩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도시사 대부분이 행정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의 우리가 역사의 주체인 민중을 발견한 것처럼 이 시대에는 도시 역사의 주인공으로 '시민'을 발견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닐까? 오늘날의 도시를 만들어낸 사람들, 그들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일을 했는지를 밝혀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100%의 선거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행정기관이 정한 정책이나 주요 기업이 만들어놓은 일자리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할까?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과 시스템을 만들어낼 줄 아는 역사의 주체일까?

오늘날의 도시(정부)가 시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가 있다. 바로 시장이 수여하는 '명예 시민증'이 그것이다. 명예시민은 도시 권력인 시장이 어떤 인물을 모범적인 시민으로 생각하는지를 잘 드러낸다. 도시 권력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와 철학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창원시를 예로 들어보자. 2010년 마산과 진해, 창원시가 통합 창원시으로 합쳐진 뒤 2011년 7월 창원시 통합 1주년을 기념하며 박완수 전 창원시장은 제1호 명예시민을 중복 발표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였다. 기념식 당시에는 창원시 통합의 결정권자였던 당시 행정자치부 맹형규 장관을 1호 수상자로 발표됐지만, 그보다 4개월 전인 3월에 스웨덴 기업인 노키아티엠시의 띠모 엘로넨 사장에게 이미 명예 시민증을 발급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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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형규 장관(오른쪽)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하는 박완수 창원시장(왼쪽)./경남도민일보DB

박 전 시장은 왜 노키아티엠시 사장을 첫 번째 명예시민으로 선택했을까? 또 맹장관에게 명예 시민증을 주며 그것이 1호라고 발표했을까? 통합된 창원시의 명예 시민증 명부를 분석한 이윤기 마산YMCA 사무총장에 따르면 당시까지 마산, 창원, 진해 등에서 명예 시민증을 받은 36명 중 절반이 기업인(대표)이었고, 나머지 상당수는 행정가들이었다. 물론 실제 창원시민이 아닌 사람 중 창원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니 명망가가 주로 물망에 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거의 예외 없이 기업인과 행정가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박 전 시장이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역사도 시민 중심으로 재구성할 때가 됐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훑어내리는 향토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이 도시를 만들고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의 역사를 써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더블린에서 마주친 포스터처럼 오늘날 우리 도시를 만드는 데 공을 세우고 헌신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발견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지 않을까? 서울시가 진행하고 있는 기억수집활동처럼 평범한 시민들이 품고 있는 우리 도시의 기억을 커다란 모자이크로 구성해가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우리 도시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빚을 지고서 굴러가고 있다. 으리으리한 행정가와 기업가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상공인, 예체능인들과 맛집 주인, 교사와 학생, 청소부와 경비원 등이 유기적을 연결되고 협동할 때에야 도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도시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서의 시민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시민사'를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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