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Hearn)은 편도행 표로만 여행하던 작가다" <19세기 일본 속으로 들어가다>란 기행문에서 헌의 증손자가 쓴 말이다. 누군가가 편도행 표를 고집한다는 건 다시는 떠난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사랑했던 일본인'이란 수식어로 유명한 작가 라프카디오 헌은 마지막 정착지로 일본을 선택한 후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근대 이후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구미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그런 경우는 대개 '오리엔탈리즘'이 강력하게 작동한 경우였다. 그러나 라프카디오 헌(1850~1904)은 일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음에서 우러난 그의 일본 사랑은 다른 아시아 국가 사람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할 정도다.

두 번째 정착지인 구마모토에서 헌이 지낸 기간은 고작 3년.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90년대 초 구마모토에선 <도일 100년, 100년 후의 구마모토에서 바라본 라프카디오 헌>이란 세미나가 열렸다. 그가 살던 집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헌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과 존경이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주는 실례다.

그는 그리스 산(産)이다. 그리스에서 근무하던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현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프카디오 헌은 아일랜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1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기자로 활동한다. 카리브 해 섬나라인 마르티니크에서 집필생활을 하기도 한 헌은 <하퍼스 매거진> 특파원으로 일본과 인연을 맺는다. 도일 항해 중 특파원 계약이 파기됐으나, 지인이 중학교 영어교사 자리를 추천하는 바람에 결국 일본에 이르게 된다.

이즈모에서 영어교사로 출발한 헌은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그림자> <동쪽의 나라에서> <마음>과 같은 역작을 쏟아내 서구에서 손꼽히는 지일파(知日派) 작가로 명성을 쌓는다. 이 와중에 일본인 아내를 맞아 귀화한 그는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란 새 이름까지 얻고 완벽한 일본인이 된다.

일본인이 지금도 그를 기리는 가장 큰 이유는 헌이 아무런 사심이나 편견 없이 일본문화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헌은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서구에서 발달한 물질문명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반면 깊이 있는 정신세계를 선호했으며,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는 그 연장 선상에서 완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기행문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장래에 일본 교육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의 천성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19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까지 아우르는 지적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헌은 일본인이 쓰는 표의문자가 두뇌 속에서 만들어내는 영상이, 단순한 부호에 불과한 서양문자와 비교하면 매우 독특하다며 일본 언어문화를 찬탄한다. 학생들에게 '문학에서 영원이란 무엇인가?'란 과제를 낸 후, '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말'이라는 답을 듣고서는 흥미로운 미소로 이를 되씹는 것도 인상적이다.

요컨대 헌은 19세기 서구 지식인으로서 일본이 지닌 정신적 가치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 명과 암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귀화 외국인이 드문 때 일본에 온 걸출한 지식인이었기에 헌은 이후 늘 인구에 회자됐다. 군국주의 일본 또한 헌의 일본 예찬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정도였다. 그리스에서 시작한 그의 '편도 한 장 인생 여정'은 아일랜드, 미국, 마르티니크를 거쳐 일본에서 만개했다. 50대 중반에 병사했지만 그는 지금도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영접하고자 했던 근대 서구 지식인으로 첫 손꼽힌다. 물론 헌을 유인(?)한 건 일본문화가 지닌 저력이다.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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