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에 응축된 도시의 이야기들

비행기가 없던 시절 유럽인들이 희망의 땅이라고 여겼던 미국에 가려면 예외 없이 배를 타야 했다. 정치나 종교적인 박해 때문이든, 대기근을 피하기 위해서든 졸지에 난민이 된 그들은 수개월에 걸친 목숨 건 항해를 견뎌내며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출입국관리소가 마련된 뉴욕항 앞 엘리스섬에 도착하기 직전 그들은 바다 위에서 난민들을 향해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거대한 동상 하나를 마주치게 된다.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다.

길면 6개월이나 걸렸던 지옥 같은 항해를 끝낼 즈음 마주친 자유의 여신상에서 난민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억압과 착취, 질병과 가난의 땅을 벗어나 마침내 새로운 자유의 땅에 도착했다는 희열을 온몸으로 만끽하지 않았을까? 낯선 땅에 정착해야 한다는 두려움도 컸겠지만, 동상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큰 격려가 되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궁금증이 문득 생겼다. 여신상이 세워지기 전 뉴욕항에 도착한 이민자들도 희열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을 텐데, 그 정도가 여신상 이후의 이민자들과 과연 같았을까 달랐을까? 달랐다면 어느 정도 차이가 났을까? 자유의 여신상이 버티고 선 뉴욕과 그렇지 않은 뉴욕은 과연 얼마나 달랐을까?

사람들이 특정 도시나 지역을 직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게 만드는 상징적인 지형지물이나 구조물을 흔히 랜드마크(Land mark)라고 부른다. 파리의 에펠탑,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 리우데자네이루의 구세주 예수상,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등이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랜드마크들이다. 랜드마크의 종류는 다양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 건축물일 수도 있고, 고색창연한 문화유적일 수도 있으며, 기기묘묘한 자연환경일 수도 있고,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예술품일 수도 있다.

앞에 언급한 자유의 여신상도 세계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다. 이제는 뉴욕을 찾는 사람 대부분이 비행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관광 코스에 넣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보기 어렵게 됐지만, 비행기 이전 시대에는 미국에서 새 삶을 찾으려는 이주민 누구나 처음으로 마주쳐야 했던 뉴욕, 아니 미국의 상징이었다. 스스로 기회의 땅, 약속의 땅이라고 자부했던 미국인들이 외부인을 맞이할 때 던진 첫 번째 메시지가 바로 '자유'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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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에 대한 프랑스와 미국의 열정이 담겨 있는 자유의 여신상./위키피디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제공한 선물이다. 제막식이 열린 날이 1886년 10월 28일인데, 최초 발의된 날부터 계산하면 꼬박 21년이 걸린 작품이다. 여신상 아이디어가 처음 언급된 것은 1865년 여름에 열린 한 외교 모임에서였다.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였던 라불레(Edouard Lefebvre de Laboulaye)가 미국이 건국 이래로 모범적인 국가상을 보여줬기 때문에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우정의 선물을 제공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호응한 사람들이 수차례 모금운동을 펼쳐 50만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겼다. 100년이나 지난 미국의 독립을 '왜' 프랑스가 축하했을까? 그것도 정부 대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외교 차원에서 자발적인 모금 활동만으로 그 엄청난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프랑스 지식인들은 왜 그토록 미국을 동경했을까? 이런 의문들을 풀어야 자유의 여신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 독립을 프랑스가 축하했던 이유

역사의 뿌리를 찾아보니 프랑스와 미국은 18세기 중반부터 밀착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패권 다툼을 하며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었다. '7년 전쟁(1756~1763)'에서 영국에게 패한 루이 15세는 다시 북아메리카로 전선을 확대해 영국과 맞붙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얻은 병으로 루이 15세가 죽고 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여러모로 통치 능력이 모자란 루이 16세는 취임하자마자 할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미국 독립군에게 거액을 원조했다. 원조액이 금화 20억 리브르였는데, 당시 프랑스 국민 700만 명의 식량과 주택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었다.

루이 16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미국은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하고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을 기점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과도한 전쟁지출로 국가 부도 위기에 내몰렸고, 국민들은 빈곤에 허덕이게 됐다. 이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내놓은 새로운 조세 제도도 서민은 증세하고 부자는 감세하는 내용이라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바로 이 토양 위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은 때마침 독립한 미국이 계몽주의의 이상이라고 여겼던 공화주의를 채택한 소식을 듣고 한껏 고무됐다. 국가 권력이 왕족과 귀족이 아닌 인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공화제가 관념이나 책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됐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미국은 왕정과 교회의 절대 권위에 맞서 계몽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루이 16세는 영국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미국을 도왔지만, 지식인들은 그 미국에게서 혁명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었다.

미국 독립이 완성되고 6년 뒤인 1789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테니스코트 선서와 함께 국민회의(Assemblee nationale)가 조직됐고 한 달 뒤인 7월에는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대혁명이 시작된다. 1791년 6월 루이 16세 가족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다가 실패한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에서도 공화제 도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1782년 8월 국민회의는 드디어 공화제 도입을 선포하고 178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처형한 뒤 공화국 헌법을 발효시켰다.

그러나 프랑스의 공화제는 도입되자마자 역풍을 맞았다. 혁명정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펼쳤던 로베스피에르는 이듬해 내부 반란으로 처형됐고, 그 공백은 젊고 유능한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차지했다. 그는 공화국을 탄생시킨 국민회의를 해산시키고 종신통령에 취임하더니 1804년 12월에 마침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프랑스 정치체제는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한 뒤 동맹군이 프랑스를 공격해 1814년에 파리를 함락시켰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는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 1830년에는 7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를 주창한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올랐고, 1848년에는 2월 혁명이 일어나 다시 공화정이 시작됐지만 같은 해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익히 알려진 나폴레옹과 무관한 사람이다)가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1852년 '나폴레옹 3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두 번째 황제가 됐다. 1870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세 번째 공화국은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일명 보불전쟁)에서 패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렇게 성립된 공화국체제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게 패하면서 잠시 끊겼다가 다시 부활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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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공수되기 전 1885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완성된 자유의 여신상을 그린 삽화./위키피디아

다시 앞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혁명과 반동이 반복되는 좌충우돌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 공화주의자들 눈에 프랑스의 도움으로 공화국을 세운 뒤 100년 동안이나 흔들림 없이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 얼마나 대단하게 보였을까? 라불레가 최초로 아이디어를 냈던 1865년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그때는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지배하던 프랑스의 두 번째 제국 시대로 전제 정권이 시퍼렇게 살아있었지만,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이제 막 끝났을 때였다. 이처럼 미국이 내전을 끝내며 굳건한 공화국으로 자리 잡는 모습이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에게는 크나큰 자극과 격려가 되었을 테고, 그 희망이 자유의 여신상이라는 구체적인 선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21년에 걸친 자유의 여신상 프로젝트는 선물을 받을 미국뿐만 아니라 선물을 하는 프랑스에게도 적지 않은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1870년에 시작된 프로이센과 프랑스간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한 후 승자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을 건설했지만 패자 프랑스는 세 번째 공화국을 선택했다. 자유의 여신상 프로젝트 때문에 공화정이 성립됐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또 모금에 응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이 프랑스 공화국의 밑거름이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후 프랑스는 다시는 왕정이나 제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 앞바다에 선보인 1886년은 프랑스와 미국 모두 자신감과 자부심에 가득 차 있던 시기였다. 그들은 동상 받침대에 새겨진 엠마 라자루스의 시처럼 세상의 모든 "지치고 가난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와서 자유롭게 호흡하라"고 자신 있게 외쳤다. 두 나라가 지난 백여 년간 흘린 피와 땀, 시행착오에 대한 이야기와 세상을 향한 자유의 메시지가 이 동상에 압축돼 있는 것이다.

더블린 첨탑에 반영된 아일랜드의 자부심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상징적인 공간은 오코넬 거리(O'Connell Street)다. 18세기에 형성된 이 거리는 1916년 4월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가 일어나면서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이 거리의 중앙에는 거리 이름을 딴 아이리시 민족주의자 다니엘 오코넬부터 시작해 아일랜드 독립과 교육의 영웅들이 동상으로 만들어져 줄지어 서 있다. 500미터 남짓한 이 거리를 꼼꼼하게 들여다만 봐도 아일랜드 역사를 일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2003년 1월에 이 동상들 사이로 120미터 높이의 뾰족한 첨탑 하나가 새로운 랜드마크로 들어섰다. 이 '더블린 첨탑(Spire of Dublin)'을 세우기로 한 2002년은 아일랜드가 자신들을 무려 800여 년간 지배한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을 처음으로 앞지른 해였다. 그 기쁨과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으로 절묘하게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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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초 더블린에 세워진 영국의 넬슨제독 동상. 1966년 아일랜드공화국군의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위키피디아

더구나 이 첨탑이 세워진 곳은 옛날 영국의 전쟁 영웅인 넬슨 제독을 기리는 동상이 높이 서 있던 자리였다. 1809년에 세워진 넬슨 동상은 약 35미터 높이의 도리아식 기둥 위에 올려져 더블린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 눈에 이 동상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아일랜드의 대표 시인 예이츠도 "이 동상은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동상과 기둥은 결국 1966년 부활절 봉기 50주년 때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이후 공터로 유지되다가 더블린 첨탑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자리를 놓고 1990년대 말 국제 공모가 진행됐는데, 최종 당선작인 더블린 첨탑을 제안한 작가가 영국의 건축가 이안 리치(Ian Ritchie Architect)였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지배를 상징하던 동상과 기둥은 아일랜드공화국군이 허물었지만, 같은 자리에서 아일랜드의 발전을 상징할 첨탑은 영국 건축가가 세운 셈이다. 게다가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건축가 이안 리치(IRA)는 약자까지 동일해 세간에 화제가 됐다. 당시 더블린 정부가 이런 세부적인 상황까지 고려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입에 올리며 더블린 첨탑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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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국민소득이 영국을 앞지른 것을 기념해 2003년에 넬슨제독 동상 자리에 세워진 더블린 첨탑./위키피디아

튈 것인가 담을 것인가

'자유의 여신상'과 '더블린 첨탑'은 이른바 도시의 랜드마크에 그 도시의 역사와 스토리를 상당히 응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잘 고안된 랜드마크는 그 도시가 겪었던 과거와 그 도시공동체가 지향하는 비전을 직관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랜드마크가 항상 도시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크다는 이유로, 아름답다는 이유로, 신기하다는 이유로 랜드마크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구조물들도 많다. 다른 도시에는 없는, 그 도시만이 가지는 특징이 될 수 있다면 그 랜드마크는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시 정부가 랜드마크와 관련해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 중에 하나는 바로 '크기 경쟁'이다. 특히 마땅히 내세울 만한 스토리가 없는 도시들이 이 경쟁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세계적으로는 사막 위에 도시를 세운 아랍 국가 도시들이 유명하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아랍에미레이트의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할리파 타워)다. 2010년 초에 문을 연 이 빌딩은 지상만 163층에 높이가 830미터에 이른다. 이에 질세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문 도시 제다에서는 2019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168층에 1007미터 높이의 부르즈 알 마물리카(킹덤 타워)를 건축하고 있다. 넘치는 석유 달러로 가장 손쉽게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우리나라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대부분의 지자체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면 세계 최대(혹은 최초)나 아시아 최대(혹은 최초), 그것도 벅차면 국내 최대(최초)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대부분이 크기 경쟁이다. 창원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2014년에 개장한 진해 솔라타워를 소개하는 첫 번째 문장에도 "단일 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600kW), 최대 높이(136m)의 태양광 발전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홍보문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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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해양공원에 세워진 120미터 높이의 솔라타워./경남도민일보DB

크기 말고 예술과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랜드마크들도 많다. 역시 자기 스토리가 취약한 도시들이 그나마 부드럽고 세련된 방법을 모색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가 대표적이고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박물관은 쇠퇴하던 도시를 되살린 구세주 대접을 받고 있다. 이런 랜드마크에는 과거의 응축은 없지만 미래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도시 이야기를 만들어갈 가능성이 많다.

우리나라에도 빌바오의 구겐하임 모델을 본떠 도심 한복판에 낯선 디자인의 건물을 지은 사례가 있다. 바로 이라크 출신의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그것이다. 초창기에 많은 비판과 걱정을 산 건물이지만, 워낙 입지가 좋아 방문객 수나 프로그램 유치면에서 목표치를 이미 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건물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DDP가 들어선 동대문 운동장 부지는 쇠퇴하던 빌바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 공간에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역사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스포츠의 핵심적인 역사가 축적돼 있었다. 그 엄청난 스토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느닷없으면서도 낯선 디자인센터가 랜드마크로 들어서는 게 과연 타당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도시들은 중동 산유국의 도시들처럼 척박한 사막 위에 어느 날 갑자기 세운 것들이 아니다. 도시마다 세워진 역사 박물관들을 찾아보면 예외 없이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한반도 구석구석은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이 없을 정도로 인문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다. 짧게 대한민국 시대의 역사만 살피더라도 역동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지 않은 도시가 없을 정도다. 일제에서 벗어나자마자 열강의 지배를 받으며 분단을 경험했고,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거쳐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온 압축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도시 아니던가?

이런 관점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나라 도시들이 추구해야 할 랜드마크 정책도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오일머니로 중무장한 사우디 제다의 킹덤 타워와 높이 경쟁을 계속하기보다는, 스페인 빌바오처럼 낯설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만 집중하기보다는, 자유의 여신상이나 더블린의 첨탑처럼 공동체가 간직한 이야기들을 응축하는 새로운 상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나라 도시들에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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