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건성세(康乾盛世)란 말이 있다. 청나라 전성기였던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치세를, 강희의 강자와 건륭의 건 자를 조합해 만든 단어다. 그런가 하면 이에 대응하는 말로 가도중쇠(嘉道中衰)가 있다. 제국이 쇠락하기 시작한 가경제와 도광제 때를 일컫는 부정적인 사자성어다.

가도중쇠를 연 청나라 7대 황제 가경제(嘉慶帝, 재위 1796~1820)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살림이 내려앉는 꼴을 어쩌지 못한 채 지켜본 불운한(?) 황제로 꼽힌다.

출발부터 그는 삐걱거렸다. 비록 황제에 오르기는 했지만, 아버지 건륭제가 죽지 않고 자리만 물려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경제는 건륭제가 죽을 때까지 무려 4년 동안 별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희대의 탐관(貪官)인 화신이 계속 국정을 농단하는데도, 그저 두 눈 뜨고 이만 부득부득 갈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친정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그는 화신을 잡아 죽인다. 그리고 화신이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 9억 냥을 몰수한다. 9억 냥이란 돈은 당시 청나라 일 년 예산의 12배(일설에는 20배)에 해당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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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경제 초상./위키피디아

화신을 축출한 혁신은 큰 박수를 받았다. 조야(朝野)는 건륭말기 누적된 모순이 이제 바로잡힐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했다. 하지만 새 황제는 이 돈을 국고에 넣지 않고 모두 황실 재산으로 탕진하고 만다. 기대를 모았던 첫 한 수가 악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시중에는 '화신이 죽으니 가경이 배부르게 먹었다'는 조소가 넘쳤다.

후대 평가에 따르면 가경은 범용한 인물이었다. 옹정이나 건륭 같은 통치력도 없었고, 강희 같은 정치력도 부족했다. 제국이 처한 현실을 살필 시야도 지니지 못했다. 곱게 자란 부잣집 아들의 한계라고나 할까! 결과적으로 그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을 문패만 달고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당시 제국은 인구가 3억 명을 돌파할 정도로 팽창했으나 조정은 향락과 부정부패로 시들어 있었고, 수탈을 일삼던 지방관은 통제권 밖이었다. 인구는 느는데 세금은 과중해지니 각처에서 반란이 줄을 이었다. 백련교도 난을 필두로, 묘족, 천리교, 해적 등이 끊임없이 그 뒤를 이었다.

민생을 살펴야 할 힘이 고스란히 반란진압에 소진됐다. 당시 청나라 조정이 백련교도 난을 진압하기까지 햇수로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군비 또한 2억 냥이나 투입됐다. 제국으로서는 반란을 토벌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소모전은 가뜩이나 궁핍한 재정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가경 연간에 서양 열강에서 물밀 듯 들어온 아편은 민간에서 '제국'을 마비시켰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가경은 후기에 이르러 초심을 버린 채 매관매직에 매달릴 정도였다.

강건성세라는 청나라 영화(榮華)는 사실 과장된 측면이 많다. 건륭은 청나라 전성기를 완성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으나, 그가 재임하는 61년 동안 제국은 뿌리부터 썩고 있었다. 방대한 제국을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시스템과 함께 건강한 통치집단이 버티고 있어야 하는데, 한 세기 반 가까이 중국을 다스리는 동안 만주족은 이미 안일이란 수렁에 빠진 후였다.

가경은 이때 '제국 중흥'이란 역사적 책무를 띠고 등장했다. 부러 중흥을 목표로 삼진 않았지만 상황이 그랬다. 하지만 결과는 역사가 입증한 대로다. 화신 제거나 일부 재정복구라는 몇 가지 조치만으로 무너지는 제국을 되돌릴 순 없었다.

가경이후 도광제를 거쳐 마지막 황제 선통제에 이르는 청나라 역사는 연명 수준이었다. 제국은 끝없는 질곡과 외세 침탈 속에서 '아시아의 병자'로 모욕당하다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그에게 해결 책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순서상 가경은 '해결사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 역할을 거부했다. 아니 거부한 게 아니라 역할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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