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해 과거를 보관하고 현재를 기록하라

"아무 쓸모짝도 없는 고물들을 왜 모으냐"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소년은 굴하지 않았다. 그 후 청년은 아버지 몰래 추수한 쌀 네 가마와 바꾼 카메라로 고향 산천을 찍었다. 또 박봉의 공무원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주는 아내에게 감사하며 그는 기억 저편의 역사를 한곳에 모았다.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주남로 93-11. 주남저수지와 마주보고 있는 창원향토자료전시관. 이곳엔 소년의 손때 묻은 물품 2만 8000여 점과 기억의 잔상이 담긴 사진 30여만 장이 살아있는 타임캡슐로 자리 잡고 있다.

34년 공직을 함께한 카메라

"저거 말똥가리네. 박 기자 잠시만 한 컷 먼저 찍읍시다 요즘 잘 안 보이던데 오래간만에 떠 올랐네."

양해광(66) 관장은 재빨리 소파 옆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새 한 마리를 찍기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단 한 번 들리는 셔터음 '찰칵'. 그 흔한 연속 촬영도 없이 단 한 장 촬영 후 인터뷰 자리에 앉는다.

"요즘 주남저수지 주변에서 맹금류는 흔치 않은데 오늘 때마침 날아줬네. 아무튼 뜻깊네. 그런데 내가 뭐 자랑할 것도 없는데 인터뷰를 해야 하나요. 그냥 취미로 시작해서 모으고 찍은 것이 전부인데 남 부끄럽네요."

인터뷰 시작 전 취재에 손사래를 쳤던 그는 사진 촬영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수만 장의 셔터를 눌렀던 손가락은 카메라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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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박민국 기자

"사진이론보다 아날로그 카메라로 실기를 먼저 배웠죠. 처음부터 수동 카메라로 입문해서 조리개, 노출 맞추고 셔터스피드 조절하고 피사체를 담았죠. 지금이야 장비가 좋아서 자동으로 다 알아서 맞춰주지만 저는 수동 조작이 더 익숙합니다. 그리고 계획하고 촬영하는 것도 일상이 되어 한 번 촬영에 필름 한 장이죠. 카메라를 디지털로 바꾸었지만 아직도 촬영의 원칙은 '원샷 원킬'로 찍죠. 방법이 좀 구식이죠."

그의 카메라 촬영 방식은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품성은 34년간 공직에 머무르면서 빛을 발휘했다. 1974년 창원군 농촌지도소에서 공직에 첫발을 디딘 후 2007년 12월 창원시 대산면 부면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는 카메라와 함께 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퇴직금과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주남저수지 앞 논 세 마지기를 팔아 '그때 그 시절에' 창원향토자료전시관을 개관한 것이다.

"1950년대부터 사용하던 생활용품을 국민학교 시절부터 모으기 시작했는데 개관 당시 2만 4000여 점 정도 모았었죠. 또 1969년부터 찍었던 사진이 30여만 장 되더라고요. 물건이나 사진이 제 개인 사물이지만 시간이 흘러 역사적 가치를 더하면 제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죠. 그래서 전시관에 기증했죠. 그리고 미래세대에 잘 전하기 위해서 비영리법인도 만들었죠. 나라가 부강하려면 정치, 경제도 중요하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전수해야죠. 그래서 저는 도서관, 박물관, 기록전시관 등이 가장 중요한 문화의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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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박민국 기자

아버지의 기록 DNA와 낙동강변의 그리움

양 관장은 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며 한학에 박식했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일대기를 적어 어린 해광에게 주었다. 양 관장이 10살 되던 해였다. 또 부친은 농업에 관해서도 집안의 대소사에 관한 사소한 기록도 놓치지 않았고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양 관장에게도 기록하는 일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또 어린 해광에게 영향을 준 것은 낙동강변과 논, 밭, 들판 등 고향의 풍경이었다.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이 동요가 국민학교 2학년 때 배운 것인데 국어책에도 나와 있었죠. 학년이 올라 갈수록 전 학년이 그리워 책을 버리지 못하고 모으기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네요. 지금까지 한 2만 8000여 점 물건을 모았는데 그것은 전부 제 삶과 관계를 맺었던 것들이죠. 10살 때부터 56년간 모았네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2000년 제가 귀향하기 전까지 잘 보관해주신 덕에 오늘날 향토자료전시관이 탄생할 수 있었죠."

고향의 그리움을 늘 간직하던 그는 대산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경남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68년 부산대학교 상업대학에 낙방한 그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군에 가기 전까지 3년간 농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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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박민국 기자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에 내려와 대산면 모산리에서 보낸 68, 69, 70년까지 3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때 묻지 않고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은 위대하고 솔직했어요. 일한 만큼 대가를 돌려주었죠.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모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곳인지를 깨우쳐주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그 당시 내 전속 노래도 나왔어요.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날으는, 꽃피고 새가 우는 논밭에 묻혀서. 씨 뿌려 가꾸면서 땀을 흘리며, 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가 딱 나의 인생을 노래한 대중가요였죠."

쌀 네 가마와 바꾼 카메라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시절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있었다. 바로 카메라였다. 1969년 같은 동네에 살았던 네 살 위의 이웃 형은 베트남전쟁에 파병을 갔다 돌아왔다. 그 형은 귀국하며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여러 가지 귀중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고 그중에 카메라도 있었다.

"말로만 들었지 카메라라는 것을 처음 봤죠. 딱 한 번만 찍어보고 싶은데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해 가을 벼 추수가 끝나고 카메라를 사야겠다고 결심했죠. 당시에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쌀뿐이 없었죠. 부모님 몰래 쌀 네 가마를 리어카에 싣고 방앗간에 내다 팔았죠. 그 길로 부산 광복동 미화당백화점 뒤 카메라 골목에 가서 일본제 야시카 카메라를 샀어요. 그런데 카메라를 사면 뭐하노. 드러내놓고 찍을 수가 없는데요. 당시 촌에서 농사 짓는 놈이 카메라 들고 다니면 미쳤다고 했을 때죠. 필름 한 통이 쌀 세 되 값이었으니 사치품이지. 그래서 카메라를 숨겨가지고 다니며 찍었죠. 그래서 내가 원샷 원킬로 한 번에 한 장씩만 찍는 것도 그때 생긴 버릇이에요. 한 장을 찍기 위해 머릿속에서 구도를 그리고 언제 어떻게 찍겠다 계획을 하고 촬영을 했던 거죠. 그래도 그 카메라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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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박민국 기자

청년 해광의 눈에 들어온 고향의 산과 들은 사진으로 남아 역사의 기록이 되어갔다. 35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3개월 준비 끝에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그는 1974년 창원군 농촌지도소로 발령을 받았다. 제대 후에도 농업과 관련된 일을 계속하겠다는 그의 첫 번째 목표가 달성된 순간이었다.

"결혼 전까지는 대산면 모산리 고향집에서 여객버스 타고 마산 서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창원 군청이 있는 신마산 댓거리까지 통근을 했죠. 당시 버스가 주남저수지를 거쳐 다녔는데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시간 나는대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 또한 주남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공무원이 된 후에도 그의 카메라에 대한 애착은 운명처럼 이어진다. 농촌지도소 업무 특성상 잦은 출장에 그는 카메라와 동행을 잊지 않았다. '보는 것이 믿는 것' 그의 사진 기록은 계속됐고 훗날 창원지역 농촌의 근대사를 증명해주는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태어나도 공무원으로

양 관장은 매일 8시 30분 창원향토자료전시관으로 출근을 한다. 그는 문화해설사 한 명과 함께 2만 4000여 점의 전시물을 관리한다. 2층 규모의 전시관으로 개관을 했지만, 전시관 운영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 현재는 2층만 운영하고 1층은 음식점으로 임대를 주고 있다.

"원래 1층에는 농경물품 전시관을 열려고 했죠. 모든 산업의 뿌리는 농업이잖아요. 또한 제가 농업 관련해서 모은 것도 꽤 많은데 안타깝죠. 2013년 창원시에서 조례가 만들어져서 연간 500만 원 사업비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창원향토자료전시관을 무료로 운영하기 때문에 돈이 제법 들어가서 1층에 농경물품전시관 마련은 포기했죠. 그뿐만 아니라 전시관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습니다. 제가 찍은 창원의 자료 사진이 30만여 장이 있는데 이 모두가 필름이에요. 하루빨리 디지털로 변환시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하는데 이제 3만여 장 했습니다. 갈 길이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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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박민국 기자

전시관 한쪽 사무실엔 그가 36년 동안 찍은 사진 원본 필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이곳 사무실 책상에서 하루에 필름 200여 장을 디지털로 변환하고 있다. 이것도 얼마전에 마련한 장비 덕분이다. 그전에는 일일이 사비를 들여 필름현상소에서 자료를 구축했다. 양 관장은 이 작업을 평생 과제라고 했다. 사진을 찍은 것은 자신이지만 이제 그 자료는 모두와 함께 공유하기 위해 매일 작업을 한다고 했다.

"사실 불안하죠. 여기 있는 필름이 제 청춘과 바꾼 것이지만 또 이것은 살아있는 역사기록이라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렇게 원본으로 놔두었다가 분실되면 고스란히 역사가 묻히니 그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변환 작업을 하고 있죠. 디지털 데이터가 구축되면 시청 자료실에도 보내고 지역 신문사에도 보내고 도서관에도 보내서 기록이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제 소망인데 혼자 하려니 힘에 부치네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공무원이 되지 않았으면 이루기 어려운 일이었죠. 전 아직도 공직에서 일한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정리합니다. 그것이 퇴임한 공무원의 자세죠. 다시 태어나도 지방행정공무원이 제 꿈입니다."

양 관장은 그의 사진을 책상 서랍 속 자신만의 자료가 아닌 역사의 기록으로 보존하고자 오늘도 책상 앞에 앉는다.

사라지는 말과 언어를 기록하라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와 창원향토자료전시관을 둘러보았다. 그는 '1973년 11월 15일 육군 제28사단 전차중대 발급 전역명령서' 전시품 앞에서 꿈 많았던 청춘 양해광을 회상하며 전시관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곳 전시관이 우리 삶의 흔적을 모아두었지만 그 본질은 자연입니다. 저기 보이는 필름통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둔 것도 자연을 보호하고 기록하고 추억하려는 뜻이죠. 전 이곳을 다녀간 관람객들이 자연을 더욱 사랑하고 보호하고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역사의 기록'을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바로 지역민의 말과 글이었다. 그는 한평생 동고동락한 고향의 언어를 모으고 있다.

"작년에 1945년부터 2015년까지 창원 대산면 모산리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모아 600페이지 '영상실록 모산리' 화보를 발간했습니다. 고향분들 도움으로 집집마다 다니며 옛 사진들을 모으고 편집해서 만든 모산리의 역사책이죠. 화보 발간 이후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말과 언어입니다. 함께 살아온 물건도 모았고 사진도 남겼으니 이제는 지역 방언을 모아 세상에 남겨 놓으려 합니다."

그는 2002년 창원시청 공보실 홍보기획계장으로 재직 시절 2500여 단어의 사투리를 가나다순으로 표준말 설명과 함께 기록한 <창원말사랑>이란 지역 방언 책을 발간한 적이 있다. 지금 양 관장은 이 기록을 보다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

"2012년 결성된 경남방언연구보존회에서 경남을 넘어 부산, 울산까지 하나 되는 갱상도 표준말 책을 2016년 발행할 예정이죠. 올해는 방언을 모으고 기록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습니다. 토박이말을 보존하는 것이 바로 지역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죠. 얼마나 우리말이 구수합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박 기자 별 이야기꺼리 없는 인터뷰 한다고 억수로 욕봤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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