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지에 실직자 된 남자 받아준 아내에게 고맙다"

귀농했다기보다는 고향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더 맞겠다. 도시에 살지만 농장이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여느 직장인이 출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을 나서 농장으로 출근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진주시 집현면 봉강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다가 지난해 현대식 시설하우스를 지어 독립해 토마토 농사를 시작한 김규오(41) 씨 이야기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아들 이야기

"오랜 교직생활을 하다 지난 2008년 퇴직했습니다. 고향인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데 마을에 남자가 없었습니다. 50여 가구쯤 되는데 할머니가 대부분입니다. 50대 이상 남자는 네댓 명에 불과하죠. 고향이다 보니 산과 밭 등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죽고 나면 이 밭과 산, 묘소 등은 누가 관리하겠나 싶어 아들을 꾀었습니다."

규오 씨의 귀농이야기를 듣고자 자리를 잡았는데 아버지 김한웅(70) 씨가 먼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40이 넘은 아들이지만 아버지에겐 여전히 품 안의 자식 같은 모양이다. 묻지도 않은 아들의 지난 행적이 아버지에게서 술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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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오 씨./김구연 기자

"아버지로서 아들 셋 중 한 명은 농사를 지어도 괜찮겠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놈은 처음부터 '농사는 절대 안 짓는다'고 내 일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죠. 번듯한 직장을 잡을 시기를 놓쳐버린 아들이 마냥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던지 어느 날 경상대학교 근처에서 식당을 한다며 부모 몰래 계약금을 걸었더라고요. 가게를 운영해보지 않은 놈이 식당을 한다니 걱정이 됐죠. 그래서 '내가 월급 줄 테니 식당 대신 내 일 거들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곤 진주시가 운영하는 농업인대학에 등록하도록 했죠. 1년 과정이었는데 그때부터 농사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아버지 이야기는 쉽사리 그칠 기미가 없다. 규오 씨 이야기를 들으려면 적당한 시점에 끊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다. "내가 지금까지 8년 농사를 지었는데 두릅 고사리 산딸기 콩 고추 배추 등 30여 가지가 넘습니다. 그런데 판로가 좁아 경매장으로 보내는데 가격이 너무 쌉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여도 1년 소득이 4000만 원 넘길 수가 없는 실정이죠. 그래도 하우스 농사는 작황만 좋으면 억대 소득이 나온다고 해서 아들에게 권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내가 짓던 방식과 달라 요즘은 아예 내가 접근하는 것조차 싫어할 만큼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아들 칭찬에 규오 씨가 듣기 민망했던지 아버지 말씀을 잘라준다. "아버지, 일하러 안 가십니꺼? 아버지가 있으면 내가 마음대로 이야기를 못 나눈다 아입니꺼?"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었다. 하지만 아들을 믿고 성공을 확신하는 아버지 마음이 충분히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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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웅 씨./김구연 기자

비정규직 삶이었던 20∼30대 시절

아버지를 강제(?)로 밖으로 보낸 규오 씨가 내 마음을 읽은 듯 '아버지가 모르는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라며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지난 2002년 진주 경상대학교를 졸업한 규오 씨는 사회 첫 출발이 순탄하지 않았다. 임산공학과를 전공한 규오 씨는 컴퓨터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서울에서 컴퓨터 학원에 다녔다고 했다. 그 기간이 1년이었다.

"사실은 졸업도 하기 전에 서울로 갔습니다. 1년 정도 학원에 다녔는데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컸습니다. 생각은 있었지만 내 능력이 모자라는 것 같아 실패했습니다. 결국 2003년 집으로 되돌아왔죠. 이후 '좌절모드'라고 할까요? 한동안 방에 처박혀 두문불출의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뭔가는 해야겠고, 궁리를 하다 생각한 게 내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사업 아이템은 식당이었다.

"내 사업으로 생각하니 식당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식당을 운영하려니 요리사자격증 등이 필요했죠. 2005년 진주산업대(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식품가공학과에 입학해 다니면서 학원도 등록해 요리사 자격증을 따려고 했습니다. 한 1년 다녔는데 뜬금없이 주위 아는 분이 농협에 추천해 줘 엉겁결에 비정규직으로 근무하게 됐습니다."

규오 씨는 2007년 1월부터 농협에서 2년 6개월 정도 일을 했단다. 처음엔 열심히 일을 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할 기회가 올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2009년 10월 결혼 날짜를 잡아둔 상태였는데 결혼식을 얼마 앞두고 갑자기 농협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돼 하마터면 결혼도 못할 뻔했습니다. 지금도 아내에게 고마워하는데 실업자가 된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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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하는 김규오 씨(가운데 좌측)와 김한웅 씨(우측)./김구연 기자

결혼 이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나이도 들어가는데다 비정규직 생활이 반복됐단다. 그래서 생각했던 게 다시 식당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좀 전 아버지 말씀처럼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않고 아내와 상의해 식당을 하려고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가 모은 돈이 제법 있어 부족한 부분은 대출을 하기로 마음먹고 계약금을 걸었죠. 그런데 막상 식당을 개업하려니 겁이 많이 났습니다. 임대료에 시설비까지 몇억을 들여야 하는데 당시 뉴스는 온통 '자영업 실패'라는 것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제가 하려던 것이 베트남 쌀국수를 하는 식당이었는데 호불호가 갈려 아는 분들이 만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뒤늦게 식당 계약 사실을 안 아버지께서 식당보다는 당신 밑에서 농사를 배우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었죠."

떠밀리다시피 시작한 농사, 확신으로 다가온 가능성

적은 금액이지만 결국 계약금만 날린 셈이 됐다. 그런데 당시 판단이 어쩌면 규오 씨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기회이기도 했을 터인데 아쉬움은 없었을까?

"물론 성공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확신을 하고 추진한 게 아니었던 탓에 실패할 확률이 높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든 면에서 쫓기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더구나 당시엔 실패의 연속이었죠. 직장이라곤 비정규직이었고 사업도 그렇고…. 그러다보니 사람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기력했고 의욕도 없었죠. 지금도 적은 몸무게(90㎏ 정도 된다고 함)는 아닙니다만 서울 생활을 접고 집에 돌아와 틀어박혀 있을 땐 몸무게가 100㎏을 훌쩍 넘을 만큼 의기소침한 때도 있었으니까요."

당시에 친구들이 만나자고 전화해도 틀어박혀 있던 규오 씨를 깨운 건 아버지였다. 방 안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던 그를 그냥 오랫동안 지켜봐 주셨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이거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저것은 어떨까' 하고 계속 유도했다고 한다.

아버지 곁에서 농사를 거들기 시작한 규오 씨는 농업인대학에 등록해 열심히 배웠다. 6개월 과정이었지만 실제론 1년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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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오씨와 아버지 김한웅 씨 ./김구연 기자

"좀 전에 아버지께서 내가 전혀 농사일을 안 거들었다고 하지만 사실 주말마다 와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농사일이 그렇게 낯선 게 아니었죠. 농업인대학을 다니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견학도 많이 했고요. 그 과정에서 강소농 교육도 신청했는데 교육받으면서 우리 농업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고 느꼈습니다. 하기에 따라 가능성이 크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지금 진주시 강소농연합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기수별 모임인 자율학습체모임을 통해 사람도 많이 알게 됐고, 선진지 견학 등을 통해 얘기 듣는 것보다 눈으로 현장을 본 것이 느낌이 컸습니다. 요즘도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 이젠 어엿한 농장주

"작년 11월 24일은 저에겐 역사적인 날입니다. 토마토 모종을 하우스에 옮겨 심은 날이죠.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심었다면 9~10월에 정식을 했을 터인데 저는 11월 말에 모종을 옮겨 심었으니 한참 늦은 셈이죠. 지난해 3월 독립했으나 하우스 짓는 과정에서 시작이 늦어지는 바람에 10월에 공사를 하게 됐죠."

규오 씨는 처음으로 지난해 자신의 농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버지 그늘에서 아버지 농사를 돕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어엿한 농장주가 된 것이다. 아버지 땅이 있었기에 정부로부터 후계농업경영인 정책자금 융자 등 2억 5000만 원으로 시설하우스를 마련했다.

"전체 3300㎥에 시설하우스는 2400㎡(740평) 정도 됩니다. 다른 시설하우스에 비해 규모는 적은 편이지만 저에겐 의미 있는 농장입니다. 아직 재배기술 등이 남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규모보다는 시설 쪽에 신경을 썼습니다. 아무래도 시설을 고급화하면 작물이 병충해에 걸릴 확률이 줄어드니 실패할 확률도 낮습니다. 2월 말이나 3월 초부터 수확해 6월 말이나 7월 초까지 이어집니다. 일단 토마토가 자라는 데까지 키워볼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처음 시작한 농사라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인다. 작목선택은 어떻게 하게 됐을까?

"아버지가 여러 가지 농사를 짓지만 단동의 작은 시설하우스에서 토마토도 길렀습니다. 남들은 처음 농사짓기엔 고추가 쉽다, 뭐가 쉽다고 하는데 제가 가꿔본 작목이 아무래도 쉽지 않겠나 싶어 토마토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르던 토마토와는 또 다르더군요."

규오 씨는 평당 50~60㎏ 수확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일반 시설채소는 평당 10만 원 정도의 수익을 보는데 15만 원 정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평당 15만 원으로 계산해 1억 1000만∼1억 2000만 원 정도 수익을 기대한다. 여기에서 감가상각비와 연료비, 운영비, 기타 비용 등을 뺀 순수익은 4000만~5000만 원 정도는 올릴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런 계산은 별 탈 없이 토마토를 수확했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지요. 토마토 시세가 변동폭이 크기도 하지만 처음이니까 이런 기대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요? 토경에서 양액재배하는 것만큼 수익을 올리고 싶습니다. 올해 농사를 바탕으로 올여름 휴경기엔 땅심을 살리고자 거름도 직접 만들어 넣어 볼 생각입니다. 한 번 도전해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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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오 씨와 아버지 김한웅 씨./김구연 기자

아버지 위한 체험농장 만들고 싶어

규오 씨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토마토 농장은 그가 혼자 만든 작품이 아니었다. 규오 씨의 가장 든든한 멘토는 다름 아닌 아버지였고, 아내는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군이었다. 아버지와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인터뷰 내내 묻어 나왔다.

사무실 겸 휴식공간으로 사용하는 시설하우스 입구가 족히 20평은 돼 보인다. 규오 씨는 독특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머무는 이 공간이 사실 아까운 곳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여기에 '팜 카페'를 열고 싶습니다."

이 황당한 발상에 고개를 갸웃하자 규오 씨가 궁금증을 풀어준다.

"돈을 받고 음료수를 파는 카페를 연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이 길을 동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데 그분들이 여기에서 커피도 마시고 휴식도 취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카페를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규오 씨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주 멋진 아이디어가 될 것 같다. 규오 씨 이야기가 이어진다.

"오랫동안 학교에 계셨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연세도 있으시니까 이젠 아버지가 짓는 농사 규모도 줄여 이곳을 어린이집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체험농장으로 꾸며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느껴진다.

규오 씨는 마지막으로 늘 믿고 기다려준 아내에게도 고마움을 또 전한다.

"아내와는 고모님 소개로 선을 보고서 2년 넘게 연애를 하다가 결혼했습니다. 연애하던 시절부터 결혼 이후에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끝까지 저에게 용기를 준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 가장 큰 힘이 돼 준 것이 아내와 두 아이입니다. 너무 고마운 일이죠."

그랬을 것 같았다. 순간 궁금한 것이 떠올라 물었다. '위축되고 무기력해 보였던 규오 씨와 결혼하자고 마음먹은 이유가 뭔지 아내에게 물어봤냐'고.

"아뇨. 겁이 나서 지금까지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왜 나랑 결혼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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