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리 갯길따라 걷는 거제 섬이야기

지석마을 비행기바위에 얽힌 이야기

사등면 지석 마을 14번 국도 갓길을 걷는다. 손수레를 끌고 어르신 두 분이 지나가신다. 인상도 좋아 보이시니 지난번 오량성에서 북데기 타작하던 할머니처럼 팔자 늘어졌다는 퉁은 놓지 않을 듯싶다.

"어르신 여기 지석이 어딥니까?"

"지석이? 지석이가 누고?"

"문디, 지석이 우리 동네 이름 아이가. 여기가 지석 마을인데 와 그라요?"

"여기 지석묘가 어디 있다는데 혹 모르십니까?"

이번에는 두 분 다 못 알아들으셨는지 서로 얼굴만 마주 보신다. 넓적한 바위를 작은 돌로 받쳐 놓은 것으로 아주 오랜 옛날 높은 사람 무덤이 어쩌고저쩌고 한참을 손짓발짓 하는데 두 어른 동시에,

"응, 뱅기 바구(비행기 바위)? 바로 니 곁에 그거 아이가."

바로 옆에 두고도 입이 아프도록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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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조 옥녀./박보근

찬찬히 둘러보니 여느 고인돌보다 많이 옆으로 비스듬히 기운 모습이 영 부자연스럽다. 원래는 바다에 뜬 배 모양이었다고 한다. 바위 머리가 향하고 있는 쪽으로 두 마을이 있다. 지석과 장좌마을이다. 어느 마을이 먼저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먼 옛날 한 마을 이웃에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하나 더 생겼더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새로 생긴 마을에 흉한 일이 끊이질 않았다. 뱃일 나간 젊은이가 풍랑을 만나 불귀의 객이 되거나 이웃 마을과 지척인데도 역질이 이 마을만 쓸었다. 유명한 지관을 불러 패철을 놓아 풍수를 보니 고인돌 머리가 향하는 마을이 망하는 지세더란다. 마을의 안녕을 위한답시고 밤새 온 공력을 들여 바위 머리를 이웃 마을로 향하게 틀어 놓았다. 이제 이웃 마을이 난리가 났다. 패륜이 나고 호환으로 사람이 상했다. 그러자 이 마을에서도 밤새 공력을 들여 돌머리를 원래 향했던 건넛마을로 돌려놓았다. 또 다시 우환이 찾아든 이 마을이 다시 바위를 돌려놓고 저 마을이 다시 틀어놓기를 여러 해가 되었겠다. 이렇게 육중한 바위를 옮기는데 공력을 들이다보니 두 마을 모두 살림살이가 곤궁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당에는 드러내놓고 옥신각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던 스님이 두 마을 장정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더니 그들을 불렀다.

"이보시게들, 내 두 마을이 망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묘책을 알려줄 터이니 함께 공력을 모아 볼런가?"

마다할리 있겠나. 이구동성으로 묘책을 묻는다.

"서로 힘을 모아 돌머리가 두 마을 사이를 향하도록 틀어놓게."

과연 그대로 하였더니 두 마을 모두 우환이 사라지고 번성하여 잘 살았더란다. 예부터 번듯이 잘 놓여진 돌을 제 살자고 남에게 동티나게 하느라 이리저리 돌리고 틀다 보니 이렇게 주저앉고 기울게 되었나보다.

어르신들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TV만 켜면 등장하는 이들이 생각난다. 내 주장만 내세워 꺾지 않고 허물은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는 그들에게 선인들의 지혜를 알려주고 싶다.

"어르신 하나만 더 물어 보입시더. 이 돌이 구석기 껍니까 신석기 껍니까?"

"누구꺼라고? 석기? 그 사람이 이걸 샀는가베. 그란데 글마가 구씬지 신씬지 내가 우에 아노?"

아차! 옆에 안내판이 서 있는데 또 잘못 물은 것 같다. 동기씨 꺼구나. 성은 청씨고 파는 남방식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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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조굴밭./박보근

충무김밥이 아니라 성포김밥, 그리고 물메기탕

형제섬 위로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느라 뒷걸음으로 들어선 작은 포구는 한산하다 못해 고즈넉하다. 가조도가 가로막아선 자리에 동남쪽의 망치산이 서쪽 바다로 자락을 뻗어내어 손아귀 모양의 포구를 만들었다. 성포항이다. 다리가 놓이지 않아 배로 나다니던 시절에는 성포항이 거제의 관문이었다. 부산, 마산 등 영남 해안과 여수, 목포의 호남 해안을 연결하는 중간 기항지로 선창이 사람과 물산으로 북적이었다. 일본 강점기에 일본 사람이 운영하던 타이요마루라는 배가 있었더란다. 부산에서 여수 사이를 오가는 배였는데 큰 목선에 엔진을 달아 300~400명의 사람을 싣고 8시간을 운항하였다. 이 배가 중간 기항지인 성포항에 들어서면 전마선을 타고 배에 오른 통영 아지매들이 근해 권현망 어선에서 잡은 호래기와 가조도 무를 반찬으로 하여 김밥을 말아 함지에 이고 허기진 여객들에게 팔았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충무김밥이다. 물메기탕을 맛보러 들른 성포 토박이 식당 주인은 충무김밥이라 하자 펄쩍 뛴다.

"토영(통영, 거제 사람들은 이렇게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아지매가 팔았다고 충무김밥인가? 성포에서 팔았으니 성포김밥이지."

그렇게 번성했던 작은 항구는 거제대교가 놓이면서 옛 명성을 잃어가다 가조도를 잇는 다리마저 생기자 한적한 어촌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연산 회를 즐기는 사람이나 제철 바다 별미를 맛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곳이다. 요즘은 제철인 물메기탕이 칼칼하고 시원한 맛으로 미식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거창 가조면과 거제 가조도의 관계

거제에 딸린 섬 중에서 칠천도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섬인 가조도로 건너간다. 성포항을 가로막고 앉아 풍랑을 막아주는 가조도는 열두 폭 치마를 펼치고 앉은 여인의 모습이다. 거제에는 옥녀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봉우리가 4곳이나 된다. 이 곳 가조도의 옥녀봉과 칠천도의 옥녀봉, 일운면의 옥녀봉과 둔덕의 옥녀봉이다. 남해안 일대를 비롯하여 내륙에도 흔한 이름인 옥녀봉 전설은 어디를 가도 비슷하다. 옥황상제의 딸인 옥녀가 금지된 사랑을 하여 지상으로 쫓겨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산봉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지닌 네 옥녀봉이지만 섬이라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근친간의 패륜을 경계하는 이야기가 가미된 일운면의 옥녀봉을 다음에 오르기로 하고 가조도에서는 아담한 옥녀의 자태만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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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조멸치./박보근

경남의 북쪽 거창군에 가면 가조면이 있다. 이 가조도와 한자말은 다르지만 그 먼 곳의 지명과 이곳의 지명이 같은 사연에는 고향을 버려야 했던 옛사람들의 아픔이 배어있다. 삼남 지방은 왜구의 노략질로 편할 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거제도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와 가장 가까워 그 피해가 막심했으리라. 특히나 가을걷이로 창고가 그득한 겨울에 들어서면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한다. 약탈할 재물도 많아서 이기도 하지만 쓰시마 해류를 타고 올라와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는 관군이 나오면 북서풍에 돛을 올리고 내빼버리니 조정에서도 어쩌지를 못했다. 급기야 사람이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1271년 고려 원종은 섬을 비우라 하고 거제 백성들을 거창의 가조현으로 옮겨 살게 하고 거제의 이름까지 거창으로 옮겨 제창현이라 했다. 이후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피난 갔던 후손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때 가조현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가조도라 했단다. 가조도 연육교를 놓을 때 일부 섬사람들은 반대했다. 인심이 사나워지고 오염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역시 돈 앞에 장사 없었나보다. 지가 상승의 돈바람에 인정과 환경은 뒤로 밀렸다.

거제도 하면 멸치라 마을 앞 바닷가에 말리는 멸치 한 마리를 집어 먹는다. 짭조롬하니 맛이 좋다.

"훠이! 무슨 놈의 인(人)갈마구가 이리 많노?"

머쓱해서 덜렁 한 박스 사버렸다.

남해안의 섬들에는 유난히 성이 많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다 보니 쌓았겠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쌓은 성도 있다. 이를 왜성이라 하는데 거제에서 대표적으로 남아있는 왜성은 장목면의 구영등성이다. 가조도를 나와 고개를 넘으면 제비날 등 언덕 아래 바다를 향해 앉은 돌성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사등성이다. 이 성은 왜성이 아니라 명색 한 나라의 도성이었다. 삼한 시대 변한의 한 나라였던 독로국의 도읍지로 조선초 거제현이 돌아왔을 때 관아를 두고 읍성으로 삼았다가 성이 협소하고 물이 부족해 관아를 고현으로 옮겼다 한다. 오량성에 비해 많이 훼손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명색 도읍지였으니 주작대로 격인 북문과 남문을 잇는 마을 안길을 걷던 할머니가 포로수용소 짓는다고 다른 곳은 헐어 갔어도 이곳은 주민들이 손도 못 대게 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한창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또 드라마 세트장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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