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때 내민 손은 생명도 지킬 수 있죠"

아너소사이아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힘든 순간 누군가 내미는 작은 손이 꺼져가는 생명을 지키고 다시 세상을 살아갈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더 보태고자 제 인생 마지막 큰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진규(81) 김해 생명의 전화 이사장. 그는 지난해 11월 19일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기부를 약정하면서 경남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 58번째 회원이 됐다. 동시에 최고령 회원이라는 타이틀도 얻게 됐다.

지난 1월 12일 그의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교육자로서, 그리고 사회사업가로서 살아온 그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본다. 

공부가 하고 싶었던 소년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셋을 맞은 이진규 이사장은 충남 연기군이 고향이다. 지금의 세종시라고 보면 된다. 가난한 농부의 3남 3녀 중 맞이로 태어난 그는 당시 대부분 농촌 사람들이 그랬듯이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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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 김해 생명의 전화 이사장./박일호 기자

"농사라고 해봐야 뭐 없었어요. 논이 고작 5마지기(1000평)도 안됐으니까요.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죠. 물론 그 당시는 다 그랬으니 뭐 고생이라고 할 수도 없죠."

하지만 가난은 그의 꿈을 막아섰다. 중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뻔히 형편을 아는 탓에 그는 아버지를 조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옆집 1년 선배가 원서를 보내줬어요. 제 자랑 같지만 초등학교 때 공부를 곧잘 했어요. 그러니 아까웠던 모양이었겠죠. 저희 면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공주중학교로 가서 시험을 쳤어요. 아버지에게 말도 안 했는데 덜컥 붙어버린 거예요.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으시더라고요. 걱정도 됐고 고민도 됐겠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학을 했어요."

이후에도 가난은 단계 단계마다 그를 잡아 세웠다.

"중학교 때도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 진학을 목표로 두지 않아 인문계 대신 사범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당시에 사범학교 졸업하면 초등교사가 되고, 사범대학 졸업하면 중등교사가 됐거든요. 그런데 사범학교 졸업을 앞두고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사범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 말이죠. 학비는 제가 벌어서 졸업하겠다고 집에 사정사정해서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나마 아버지께서는 장손이니 마다하지 못하고 한 놈이라도 공부를 시키자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밑에 동생들은 저 때문에 학교에 제대로 못 갔어요. 그러니 너무 미안하죠."

어렵지 않게 입학을 했지만 졸업까지 가는 과정은 전혀 쉽지 않았다.

"몇 번 제적당하고 재입학하고 하면서 졸업했습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제적당하고 그러면 아르바이트해서 돈 모아서 또다시 학교 다니고…. 학교 다닐 때에는 중고등학생 과외를 해서 돈을 벌었는데 그것으로 방세, 생활비 하고 나면 등록금이 모자라죠. 그러니 방학 때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항상 찾아야만 했죠. 한번은 친구랑 전라도를 돌면서 외판원을 한 적도 있어요. 비누, 빙초산, 고무줄 이런 것을 농촌마을에 다니며 팔았는데. 같이 다니던 친구가 힘들고 스트레스 받으니까 젊은 나이에 구안와사가 와서 돌아온 기억이 있어요. 참 힘들게 졸업을 했습니다. 찔끔찔끔 다니느라 공부는 시원하게 못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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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 김해 생명의 전화 이사장./박일호 기자

교사의 길은 운명

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충남을 포기하고 서울 발령을 신청한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배치받은 곳은 경상남도였다. 전혀 연고가 없는 곳이었다.

"욕심을 너무 부렸죠. 허허∼. 서울 안 되면 충남이라도 될 줄 알고 상향지원을 했는데 생각도 안 했던 경남에 발령이 난 거죠. 그게 운명인가 봅니다. 그때는 걱정도 되고 후회가 막심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축복이었어요. 제가 군대 입대해서 강원도 홍천에서 있을 때 산청군 신등중학교 발령을 받았습니다. 연기를 해서 제대하고 일을 한 거죠. 말 그대로 오지였습니다. 전교생이 96명인가 그랬는데 한 9개월 정도 근무하고 진해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함안, 진주 지역 학교와 도교육청에 파견돼 근무를 하다 마흔 젊은 나이에 교감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어 통영, 김해지역 학교와 도교육청에서 근무하다 쉰 살이 되면서 교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생활지도장학관, 인사담당장학관, 김해교육장, 김해건설공고 교장을 역임하고 밀양교육장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교직 생활 중에 가장 힘들었던 때가 80년대 말께 전교조가 결성되는 시기였어요. 그때 제가 도교육청 담당 장학관을 맡았는데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국가에서는 지침을 세워서 시키죠. 저는 담당 장학관이니 위에서 시키는 일을 안 할 수는 없고…. 다 동료 교사들이잖아요. 그때 탄압을 받아 전국에서 많은 교사가 구속되고 해직됐는데…. 그런 갈등과 괴리감 때문에 사표를 제출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그는 교사였기 때문에 행복했던 때가 더 많았다고 했다.

"제자들이 잘돼서 다음에 찾아오거나 연락 올 때가 제일 행복하죠.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제가 밀양교육장으로 있으면서 학생 교육을 위해 무안면에 의견(義犬)상을 만들었던 적이 있어요. 그런 것들도 소소한 기쁨으로 남아 있죠. 밀양 향토지 무안면에 개가 주인을 살린 일화가 나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의견상 건립추진위를 결성하고 지역 업체인 한국화이바 지원을 받아 건립했습니다. 밀양에서 무안으로 고개 넘어가다 보면 길가에 잘 보입니다. 아주 멋있고 대견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허허.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보람을 느낀 때는 제가 생활지도 장학관 2년을 했던 때입니다. 그 자리는 제일 피하는 자리예요. 학생들이 사고를 치면 뒷수습하는 자린데, 별 공은 없고 책임만 많은 자리죠. 항상 현장 다니며 사고 조사하고 상담하고, 대책 세워서 보고하고 그런 일이 주요 업무죠. 그런데 한 2년 하면서 청소년 문제를 줄일 방법을 곰곰이 고민하게 됐습니다. 일단은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아이들이 자란다는 사실을 확신했죠. 그런데 그건 제가 바로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 다음으로 우리 아이들 소외되고 힘들어 할 때 누군가 고민을 들어주고 다독거려준다면 사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했습니다. 그때 경험 탓에 나중에 청소년 상담실을 계획하고 그러면서 김해 생명의 전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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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 김해 생명의 전화 이사장./박일호 기자

김해 생명의 전화

김해 생명의 전화는 그가 김해교육장으로 재직하던 1993년 만들어진다. 올해로 벌써 23년, 청년기를 맞았다.

"애초에는 청소년 상담실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제가 생활지도장학관으로 있을 때 청소년 문제가 점점 늘어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하는 시기였죠. 또 청소년에게 대화, 상담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방편이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법인을 만들려면 3억 원이 필요하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모금을 시작했죠. 지역사회와 학교들이 많이 도와줘서 한 2억 원 정도 모았는 데 그게 잡음이 조금씩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았는데 딱 생명의 전화가 매치되더라고요. 그때가 전국적으로 생명의 전화가 확산하는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생명의 전화를 출범하고 김해는 여기에 청소년 문제 해결과 진로 지도라는 업무까지 포함해서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전화는 1963년 호주에서 자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시작됐다. 우리나라에는 1967년 이영민 목사가 도입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19곳으로 퍼져 나갔다. 김해 생명의 전화는 1993년 13번째로 만들어져 4년 전 단독법인으로 독립했다.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김해에서만 운영되고 있다.

"생명의 전화는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인간존중 철학과 '도움은 전화처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신념으로 세계로 확산했습니다. 현재 김해 생명의 전화에는 120여 명의 전화상담사가 24시간 돌아가면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유급 상근 직원이 3명이고, 저와 김병식 원장님은 무급 상근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또 김해시로부터 수탁을 받아 노인통합지원센터를 부설기관으로 운영하는데 이곳에 직원 7명이 근무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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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 김해 생명의 전화 이사장./박일호 기자

김해 생명의 전화는 고뇌와 갈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고민과 위기, 복잡한 문제 해결을 위한 전화, 사이버 카운슬링 봉사활동이 핵심사업이다. 이 밖에도 시민상담 봉사자 교육, 자살예방 상담 전문가 교육, 청소년 생명존중 양성과정 교육, 좋은 부모 되기 교육, 자살예방 캠페인, 자살예방교육, 노인복지센터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모든 사회문제의 시작은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행복하면 모든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요. 발생한 문제들도 가정에서 스스로 해결이 되죠. 그래서 최근에는 좋은 부모 교육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도내 중학교에 다니면서 자살예방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25개 학교에서 진행을 했습니다. 저희 사업 하나하나 중요한 사업이죠. 또 생각나는 사업이 하나 있다면 홀몸 어르신들 생신 챙겨드리는 사업을 10년 가까이 100회 넘게 진행했습니다. 최근에는 예산이 적어 1년에 두세 번 묶어서 진행을 하는데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참 기억에 남는데 예산이 항상 문제죠."

나눌수록 커진다

그가 1억 원 기부를 약속한 것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 우선 그동안 잘 살았던 데 대한 보답이며 두 번째는 김해 생명의 전화에 조금 더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고생을 좀 했지만 부모 밑에서 고생은 고생도 아니잖아요. 그나마 어른이 되어서는 보람 있는 일 하면서 큰 어려움 없이 세상을 살았습니다. 부모님과 동생들의 희생을 비롯해 주변의 도움 덕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충남 촌놈이 경남에 와서 괄시·차별받지 않고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축복이고요. 그러니 그 도움에 대해 보답을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평생 선생을 해서 큰돈은 없지만 퇴직 연금 저금해서 만든 돈으로 기부를 하게 됐습니다."

그는 1억 원 기부 중 일부는 김해 생명의 전화 사업에 사용되기를 바라며 지정기탁을 했다. 청년기를 맞은 김해 생명의 전화가 다시 거듭나는 데 작은 보탬이 되려는 마음이다.

"저는 이사장이지만 돈 10원 하나 받지 않습니다. 그냥 보람만 받아 가는 거지요. 그런데 갈수록 사업이 힘들어져요. 돈이 들어갈 곳은 많은데 후원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그렇죠. 저희가 하는 부설 사업들은 웬만한 공공기관에서도 하고 있어요. 그곳은 국가 예산으로 하지만 저희는 그러지 못하니 힘이 들죠. 김해 생명의 전화가 23살을 맞았습니다. 한창 더 일할 때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저희 기관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동안 한 일이 많지만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죠. 그때는 제가 없겠지만 100년 뒤를 기약해야죠. 그때도 더 좋은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다시 도약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사실 제 재산의 많은 부분을 떼어서 기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사장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제 처 이름이 유영희입니다. 저보다는 한 살이 적은데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만나 연애하다 제 나이 서른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 사람도 퇴직하고 이제는 퀼트 작가로 활동을 합니다. 지난해에는 작품전시회를 열어 거기서 마련한 돈 500만 원을 김해 생명의 전화에 기부했습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너무 행복했고요. 그리고 이번에 1억 원 기부도 아내가 더 권유해서 하게 된 겁니다. 집사람 은혜 죽어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는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지고 함께 행복해지기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나눔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처음이 힘들 뿐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적극적인 동참을 권했다.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죠. 살아보니 사실 복이라는 것은 타고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요즘 이야기하는 은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니죠. 그렇다고 복이 없는 사람은 한평생 불행하게 살다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주변의 도움으로 잘 살았듯이 그런 도움이 모이면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고민하는 순간 진실한 한 통의 전화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생명 그보다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다. 저희 김해 생명의 전화가 항상 어렵게 어렵게 운영되다 보니 매번 주변에 부탁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마시는 커피 한 잔 값 5000원. 한 달에 5000원, 만 원 그 정도만 후원을 해도 지금 힘들어하는 이웃 한 사람 생명을 살리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저희에게 후원을 해주면 고맙겠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주변 어려운 이웃에 관심을 주고 또 시간이 나면 그들을 위해 몸소 봉사를 실천하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내 이웃을 행복으로 이끌고, 나아가 나와 우리 사회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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