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의 시대이던 70년대, 긴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여가수가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들었던 맑고 순수한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워낙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녀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중학교 음악교사였던 신귀복을 찾아가 학교 강당에서 테스트를 받고 악보를 받았다. 앞으로 이 노래가 그녀의 생에 어떤 인연으로 다가올지 모른 채,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울 마포에 위치한 동도중학교, 1967년 3월 2일 신학기를 맞은 첫 교무회의는 평소보다 무척 길어 보였다. 그날따라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무료해질 정도로 따분해지자, 맨 뒤쪽에 자리했던 음악 선생 신귀복은 지루함을 느끼며 옆자리의 생물 선생 심봉석에게 "제목은 '얼굴'로 정했으니 사귀는 애인을 생각하면서 가사를 지어보라. 나는 곡을 쓰겠다"라며 다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심봉석은 메모지에 낙서를 하듯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고, 애틋한 마음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한 편의 시를 적어 신귀복에게 내밀었다. 의기투합한 두 젊은 교사는 5분 후 끝난 교무회의와 동시에 곡을 완성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얼굴'은 거침없이 단 5분 만에 만들어진 즉흥곡이었던 것이다.

노래 '얼굴'은 윤연선의 대표곡이지만 최초로 노래한 가수는 아니다. KBS 라디오 음악프로인 '노래고개 세 고개'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던 신귀복 선생은 '악보 보고 부르기' 코너에서 출연자들에게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르게 하였다. 가수로는 국내 최초의 포크 보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의 출신이던 성악가 석우장이 처음으로 노래했다. 당시 '얼굴'은 사회교육방송 전파를 타고 해외까지 알려져, 악보를 요구하는 7000여 통의 편지가 국내외에서 답지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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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음반은 신귀복 가곡 1집(1970년)을 통해 최초로 발표되었는데, 소프라노 홍수미가 가곡으로 노래했다. 한동안 '얼굴'이 대중가요가 아닌 가곡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신귀복에게 악보를 건네받은 윤연선은 1974년 10월, 방송 DJ 박원웅의 주선으로 가수 박승룡과 함께 한 공동 앨범에 포크송 '얼굴'의 첫 음반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속사 악단의 트로트풍 연주와 파트너와의 이질감으로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음반이 되었고, 결국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처음에는 '얼굴'이 가요로서 대중을 끌어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윤연선은 두 번째 앨범 '고아/얼굴'(1975년)이 수록된 음반을 발표한다. 총 11곡이 녹음된 이 앨범은 이정선, 오세은, 김의철, 신귀복, 박광우, 민병진, 이수만, 이필원 등 당대 최고의 한국 포크 작곡가 8명이 참여한 쟁쟁한 음반이었다. 막상 음반이 발매되었을 때, 반응을 얻은 노래는 '얼굴'이 아니라 타이틀곡인 '고아'였다. 그런데 오세은이 번안한 '고아'의 가사 내용이 불신 풍조 조장이라는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을 받는다. 다급해진 음반사는 은밀히 금지곡인 '고아'를 빼고 '얼굴'을 타이틀로 내세우면서, 이수만의 '마음', '바닷가 모래 위'와 이필원의 '미련' 등 3곡을 급히 추가해 재판을 발매하였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을까. 타이틀곡인 '얼굴'은 방송과 다운타운가의 신청곡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흘러나오는 이변을 연출했고, 음반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렇듯 윤연선의 '얼굴'은 70년대 포크송의 대표곡으로 거듭나며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고아'라는 노래에 애착을 가졌던 그녀의 아쉬움은 너무 컸고, 다시 부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엄청 속상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고아'가 수록된 초판은 희귀 음반이 되었고, 금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인정되어 2005년 CD로 재발매되었다.

한편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던 윤연선에게 방송 출연과 음반 제작 제의가 수없이 밀려들었지만, 상업주의로 일관하는 가요계의 일면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옛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채 가수의 길을 그만둔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어느 날, 70년대 그녀와 함께 활동했던 통기타 가수들이 그 시절의 노래들을 부르는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그녀를 찾게 되었다. 이때 한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가 콘서트를 소개하는 기사를 쓰면서, 윤연선도 함께 오랜만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고 적으며, 그녀는 아직도 미혼으로 혼자 살고 있다는 문구를 기사에 덧붙였다. 그 한 줄의 기사가 그녀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르면서.

가수 시절 그녀는 같은 동네에 살던 의대생과 사귀게 되었다.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그 남자는 반대하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그녀와 절교를 하고 맞선으로 만난 여자와 결혼하고 말았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노래도 그만두고 조용히 은둔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30년 만에 무대에 다시 서서 노래를 부른다는 기사를 그 남자의 두 딸이 보게 된 것이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첫사랑 연인이 그 유명한 노래 '얼굴'을 부른 윤연선이었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오래전 이혼하고 혼자인 남자에게 두 딸은 그녀가 콘서트를 한다는 기사를 내보이며, 아버지의 첫사랑이 아직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만나 볼 것을 권유한다. 망설이는 남자는 딸들의 집요한 권유에 못 이겨 홍대 근처에서 그녀가 운영하는 라이브카페 <얼굴>을 찾아갔지만, 그날따라 가게를 비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메모를 적어두고 왔지만 연락이 없자, 남자는 딸들의 강요에 못이겨 또다시 그녀를 찾게 된다. 사랑의 약속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30년 만에 만난 윤연선은, 가슴 깊이 묻어둔 이별의 아픈 상처와 오랜 시간 동안 혼자 견뎌왔던 세월이 야속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몇 번의 만남이 지난 후 남자는 다시 청혼을 하게 되고, 그녀는 고민 끝에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

윤연선은 '얼굴'이 묘한 노래라 했다. 그 노래 때문에 결혼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녀의 묘한 노래는 무심코 한 줄 덧붙인 기사가 묘한 인연으로 다가왔고, 30년 세월을 뛰어넘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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