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도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행복이 더 크다

남들보다 한참 이른 30대 나이에 귀농해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부부가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둑방길을 손잡고 걷거나 때론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도 하며 여유를 즐긴다. 함안군 법수면 윤내리 2000평 비닐온실에서 파프리카를 재배하는 귀농 4년차 백승완(42)·박미애(40) 부부다.

무대포 초보 농부 좌충우돌 귀농기

"전혀 준비 없이 무작정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죠. 주위 믿을만한 분이 '비닐 온실이 하나 나왔는데 해볼래?' 하더군요. 그런데 더 결정적인 건 아내 얘기였습니다. '우리 농사 지을까?' 하기에 '그럴까' 하고 내가 대답하고 무엇에 끌리듯 이곳으로 오게 됐습니다." 승완 씨가 귀농하게 된 다소 황당한 계기를 남 이야기하듯 들려준다.

정말 30대 귀농이 '의기투합'한 부부 이야기가 전부였을까? 승완 씨가 당시 가졌던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한창 일할 나이인 마흔을 겨우 넘겼는데 명퇴 당할 수도 있고요. 막연히 생각했던 게 앞으로 농업이 괜찮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파프리카만 해도 올해는 시세가 많이 떨어졌지만 귀농을 결심할 당시엔 고소득 작목이라 가격이 좋았죠. 한번 도전해 볼만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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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완·박미애 부부./박일호 기자

부부는 7년 전 결혼했다. 포항이 고향인 승완 씨는 처가가 있는 마산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당시 승완 씨는 직장이 김해였지만 미애 씨가 맞벌이를 해 마산에 집을 얻어 출퇴근을 했다. 직장도 사원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아주 모범적인 곳이었다. 1년에 두 차례 10일씩 휴가를 주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잘 아는 그런 회사였다고 했다. 그처럼 안정되고 사원 복지가 잘 된 회사에 다니면서 더구나 30대에 귀농을 꿈꾸는 게 가능했을까?

"도시에서 직장생활 한다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보기에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하기가 쉽지 않잖습니까? 더구나 내가 회사에 계속 다닌다면 3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현재 직장 상사들이 내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죠."

승완 씨가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조직생활이라는 것이 상사가 퇴근도 못하고 일하는데 내가 먼저 집에 가겠다고 호기 있게 자리를 일어설 상황이 안 되잖습니까? 또 어쩌다 회식이라고 하면 늦게까지 술 마셔야 하고, 이런 걸 겪으면서 '과연 이것이 나의 행복한 미래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내가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을 가꾸는 일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귀농 첫 해, 세 차례 태풍에 호된 신고식

그렇게 마음먹은 부부는 2012년 여름 이곳에 들어와 생전 처음 파프리카 농사를 시작했다. 7월에 파종해 이듬해 6월까지 수확하는데 작황이 좋아 파프리카가 많이 달렸더란다. 부부는 한껏 꿈에 부풀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파프리카를 보는 부부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자연은 부부의 부푼 꿈을 여지없이 부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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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완·박미애 부부./박일호 기자

"그 해 경남 쪽으로 태풍 세 개가 지나갔습니다. 처음 태풍 두 개는 그나마 큰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죠. 그런데 세 번째 태풍 '삼바'는 달랐습니다. 그날이 우리 부부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걱정스러워 온실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온실이 바람에 들썩였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당장에라도 바람이 온실을 무너트릴 것 같은 생각에 밖에 나갔더니 다른 집 온실 비닐이 다 날아가더군요. 그렇게 마음 졸이며 발을 구르다 바람이 지나간 뒤 우리 온실을 보니 8동 중 3동의 비닐이 벗겨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벗겨진 비닐이 아니었다. 파프리카 줄기가 천장에 매단 줄을 따라 올라가도록 집게로 중간지점을 잡아뒀는데 바람이 몰아치면서 파프리카 줄기가 쓸려 집게가 파프리카 열매와 잎을 다 훑어버렸더란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부부는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가끔 TV나 신문에서 볼 수 있었던 실의에 빠진 농민·어민들의 한숨 쉬는 표정이 이해되더란다.

"그때 그래도 농촌이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는 게 우리에게 농장을 판 분이 자신의 농장도 비닐이 날려 피해를 봤는데 일꾼들을 데리고 우리 농장 복구작업을 하러 오셨더라고요. 하지만 집게가 훑어버린 파프리카 줄기는 맨 꼭대기 잎만 두세 개 달랑 남아있는데 뭘 먹고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식물의 자생력은 대단했습니다. 컨설팅하시는 분이 줄기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시더군요.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는다며 오히려 손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게 한 달쯤 되니 피해를 보지 않은 줄기만큼 따라가더라고요. 게다가 충격을 크게 입은 파프리카여서 작황은 안 좋았지만 집중출하 시기를 벗어난 시점에 수확을 해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태풍을 수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하우스에 불이 났다. 전기가 흐르는 선이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모른 채 농사를 지었는데 물이 떨어지면서 합선이 돼 비닐하우스 뒤쪽 바람막이 커튼에 불이 옮아 붙었던 것이었다. 이래저래 시련이 컸던 1년차였다.

동네 주민의 엉뚱한 오해 "어, 우리말 한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도시를 탈출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니 남들이 겪지 않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했다. 이곳에서 농사짓기를 권했던 분의 말만 믿고 무식하게 농사가 쉬운 줄 알고 들어왔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부부는 이 정도로 힘든 줄 알았으면 안 들어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엄살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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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완·박미애 부부./박일호 기자

승완 씨는 "시설온실이라 작기가 시작되면 자리 비우기 어렵습니다. 사실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는 없지만 아직 초보이다 보니 마음 편히 멀리 떠나 본 기억이 없습니다. 휴가철이나 단풍철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관광버스를 보면서 '남들처럼 직장에 다녔으면 나도 저 무리에 속해 버스에 앉아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죠. 그렇지만 금방 '저 버스에 앉아 있다면 오늘 당장은 기분이 좋겠지만 업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잘한 선택이라고 스스로 위안합니다."

전혀 준비 없이 덜컥 마을에 들어와 농사를 짓다 보니 마을 주민들도 의아해했던 모양이었다. 미애 씨가 귀농 초창기 마을 주민들과 얽힌 재미난 일화를 들려줬다.

"아마 이 동네에서는 거의 첫 번째 귀농 케이스쯤 되나 봅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우리를 다문화가정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죠. 남자가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고 농사를 지으러 온 것으로 생각했더라고요. 하루는 농장에 일하러 온 할머니들이 남편과 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어 한국말 한다. 한국사람이다'라고 하더군요. 친분을 쌓기도 전에 비닐하우스 일을 먼저 시작했으니 할머니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 했죠."

둑길 걷다가 발견한 빈집, 소중한 보금자리로

부부는 악양 둑과 가까운 곳에 산다. 여름철 부부가 손잡고 둑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이다. 집 앞 텃밭에 푸성귀도 심고 닭도 기르며 재미있게 산다. 크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여유로운 삶을 산다고 자부한다.

"마산에서 처음 이사를 와 이곳에서 좀 떨어진 빌라에 살았습니다. 하루는 둑길을 걷다가 원두막에서 쉬려고 앉았는데 빈집이 하나 보였습니다. 아내가 '저런 집에 우리가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더군요. 나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우리가 여기에 살게 되리란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래도 주인을 만나 이야기는 나누고 싶었죠."

부부는 돌아오는 길에 동네 할머니를 만나 빈집에 대해 물었더니 주인을 잘 아는 집이라고 하더란다. 크게 기대는 안 해서 전화번호도 남기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겁니다. 다시 둑길을 걷고 오다가 그 할머니를 만났는데 반갑게 붙잡더군요. 도시에 사는 집주인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젊으니까 임대하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오랫동안 묵혀 둔 집이라 임대료는 적게 받는 대신 직접 수리해 살라고 해 그렇게 하기로 했죠. 이곳에서 산 지가 벌써 1년 좀 넘었네요. 사실 시골에는 빈집이 많습니다. 귀농자금이 넉넉지 않다면 이런 빈집을 활용하면 좋을 듯싶네요."

말이 나온 김에 예비 귀농귀촌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승완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장 먼저 농촌생활을 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농촌생활 즐기고 꿈을 찾겠다고 생각하면 좋지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 같습니다. 농사라는 게 어느 해에는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한 해 농사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몇 년 농사지으니 이젠 저도 익숙해졌습니다. 우린 벌어둔 돈도 없고, 지금까지도 번 돈을 빚 갚는 데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족하는 건 도시생활에서 찾을 수 없던 것을 여기서는 즐길 수 있죠."

미애 씨도 한마디 거든다.

"농촌으로 오기 전 많은 사람을 만나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귀농귀촌 교육도 좋지만 내가 생활하려는 곳의 주민들과 만나 정보를 얻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우리는 무턱대고 들어오다 보니 귀농정책자금을 한 푼도 지원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분도 꼼꼼히 살펴보면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작물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당연히 낫겠지요. 아무려면 '우리말 할 줄 안다'라는 오해는 받지 않아야죠."

부부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부부에게 찾아온 귀한 인연, 엄마·아빠 된다

귀농 4년차 미애 씨는 자신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미래가 항상 순탄할 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이젠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다.

"이 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출은 평균 2억 5000만~3억 원 정도 되는데 난방비, 인건비 등 부대비용이 80% 가까이 들어가 순수익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시세가 좋지 않아 반 토막이 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여기 와서 지금까지 재투자 비용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첫 해 전기 난방시설 설치에 1억 원이 들었고, 이듬해 비닐교체에 3000만 원, 또 배지를 지면에서 높이는 벤치시설 설치에 1억 원이 들었습니다. 3년 동안 생각보다 많은 투자가 됐죠. 당분간 이런 비용은 줄어들 것이고 비닐온실 구입에 든 대출금도 계획대로 갚아가는 중이어서 우리가 잘 해내고 있다고 봅니다."

승완 씨는 요즘 더 큰 만족을 느끼면 산다. 이전 직장생활과 비교해 수입은 많은 차이가 없지만 삶이 여유로워졌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직장 다닐 땐 새벽 6시에 출근해 7~8시가 돼야 퇴근했습니다.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내 컨디션 따라 쉬기도 하고, 또 필요하면 새벽부터 일하기도 합니다. 여긴 온 이후 운전하는 게 달라졌습니다. 끼어들기, 과속도 참 많이 했는데 이젠 그런 게 없죠. 한번씩 창원이나 마산에 나가면 운전하기가 겁이 날 정도입니다."

미애 씨는 "여기 와서 제일 아쉬운 점은 마음대로 쇼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창원 마산의 대형 마트에 나가면 마치 신세계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아마도 아직 도시에서의 생활습관이 남은 탓이겠죠. 그렇지만 다시 도시로 돌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다소 불편한 것은 있겠지만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행복이 더 큽니다."

올해 승완 씨와 미애 씨에게는 참 귀한 인연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올해 마침내 그 인연이 부부에게 왔다.

"오늘은 정기검진을 받는 날입니다. 빨리 인터뷰 끝내고 병원에 가야 해요."

은근히 인터뷰를 끝내자며 압력을 넣는 미애 씨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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