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작은 도움에 웃는 이를 보면 제가 더 행복합니다."

아너소사이아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

두 남자가 작은 방에 앉아 손을 맞잡고 웃고 있다. 한 남자는 장애인으로 보인다. 또 다른 남자는 쑥스러운 듯하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다. 너무나 환한 웃음 속에 소년에게나 볼 수 있는 순수함까지 묻어 나온다. 사진 속 주인공은 김태명(56) ㈜리베라 관광개발 대표이사(회장)다. 그는 2014년 7월 1억 원 기부를 약정, 경남 아너소사이어티 37번째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인터뷰 중 나눔을 실천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묻자 그는 스마트폰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보였다. 최근 장애인 가정을 위문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라 말했다. 그리고는 "제가 더 행복해 보이죠. 제가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 그게 행복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5년 동안 장애인 후원회장으로서 도내 장애인을 비롯해 소외받고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직접 찾아가 격려하면서 변함없이 꾸준하게 후원하고 있다. 그의 말과 표정에서 진정한 나눔의 행복을 느끼고 있음이 전해졌다.

'부족한 만큼 돈이라도 벌어 성공하겠다'

김태명 회장은 창녕군 창녕읍이 고향이다. 재제소, 정미소를 하던 부유한 집안의 3남 2녀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아버지 사업이 잘되면서 여유로운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특별하게 어려운 기억은 없습니다. 막내였기에 귀여움을 참 많이 받고 자랐어요. 행복했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당시 창녕 사람들은 창원, 마산보다는 대구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창녕중학교를 졸업한 그도 대구로 진학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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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명 리베라관광개발 대표./박일호 기자

"창녕중학교에 다니다 고등학교는 대구로 진학했습니다. 공부를 그럭저럭 했는데 집에서 바라는 정도로 썩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서 지원을 해줘서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가 않더군요.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그러다 방황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기대가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때는 사춘기라 그런지 반항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허허."

나름 힘든 시기였다. 그러면서 그의 가슴에도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잘하고 못하는 부분이 있고, 또 쓰임이 다르지 않습니까? 공부만 잘한다고 좋은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음을 먹었죠. 어떻게든 나는 성공할 수 있다. 공부가 아니면 돈을 벌어서 출세하겠다는 마음을 그때 먹었습니다. 아버지 도움이 아니라 진정한 내 노력으로 자수성가하겠다고 다짐을 했죠."

그렇게 인생좌표를 수정한 그는 20대부터 돈을 벌고자 전력을 다하게 된다. 우선 일자리를 찾고자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했던 것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도 그를 살갑게 받아주지 않았다. 마땅한 일자리를 찾는 일부터 난관에 부닥쳤고 그럴수록 가슴에는 열의가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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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명 리베라관광개발 대표./박일호 기자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제가 갈 곳이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일자리를 찾다가 강원도 어느 목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허허. 낭만적이요. 그런데 전혀 아니더라고요. 축사에서 똥 치우고, 여물 썰어서 사료 장만하고, 눈 치우고 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더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참 힘들었습니다. 그때가 겨울인데 찬 바람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손과 얼굴이 다 터서 쩍쩍 갈라지고….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숙소에서 많이 울었죠. 그러다 한 6개월쯤 지났을 때예요. 큰 누님이 수소문해서 찾아오셨는데 우시더라고요. '엄마가 없으니 불쌍한 막내가 이런 곳에서 고생한다면서….' 그 길로 누나가 살던 부평으로 따라가서 일신전자라는 공장에서 또 잠시 일하다 군대에 갔죠."

군대를 제대한 그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다녀야만 했다.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일자리를 찾으면서 여러 곳에서 일을 했어요. 그런데 남의 밑에서 일만 해서는 돈을 벌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내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그래서 당구장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밑천 마련하기가 쉽지가 않더라고요.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하려니…. 남에게 사정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했죠. 그런데 처음 시작이 힘들지 시작하니 생각보다 돈을 잘 빌려주더라고요. 누나, 친구, 동네 선·후배 등 웬만한 데는 다 부탁을 했죠. 그동안 농땡이 많이 쳤는데 그래도 신용을 잃지는 않았구나, 남들이 믿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보다 그게 당구장을 성공으로 이끈 밑천이었죠. 믿음에 배신하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박이 났어요. 거기서 번 돈으로 여러 가지 장사를 했는데 그것도 잘됐어요. 참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죠."

당구장을 개업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20대 사장이 된 그는 쉼 없이 일만 했다. 그렇게 꼬박 10년을 넘기면서 그는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었다. 결국 34살 때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거의 하루 평균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어요. 물론 쉬는 날도 없었고요. 당연히 지치죠. 또 그때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도 좀 생겼고요. 그래서 무작정 사업을 접고 외국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그때가 94년이었어요. 한 1년 정도 생각하고 나갔는데 좀 길어졌죠. 3년 정도 돌아다닌 것 같습니다. 이전에 했던 장사가 잘됐지만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좀 제대로 된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갔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찾고 앞으로 어떻게 살까, 어떤 사업을 할까 구상하면서 다녔습니다."

힘든 시기였지만 외국에서 접한 문화와 문물은 그의 새로운 도전에 밑거름이 돼 주었다.

"97년에 돌아와서 곧장 중저가 복합 쇼핑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뭐 거의 한국 최초라 보시면 될 겁니다. 10월에 ㈜하이프랜드라는 브랜드로 문을 열었어요. 국내에서 중국,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중저가 물건을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세계를 돌아보면서 트렌드를 읽는 눈이 생겼고 그래서 자신 있게 투자를 했습니다. 그때가 IMF 외환위기가 시작되는 때였거든요. 당시에 경기가 안 좋다 보니 고가 브랜드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대신 실용적인 물품이 많이 팔리는 시기였죠. 그러니 딱 시기가 맞아떨어진 겁니다. 주로 10대, 20대를 위한 의류, 화장품, 선물, 문구, 팬시, 잡화, 액세서리를 파는 곳인데 전국 6곳에 대형매장이 있었어요. 마산에는 창동에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거예요, 하이프랜드라고 하면."

그의 말처럼 시기가 맞아떨어졌다. 세부적인 영업전략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성공 비결은 차별화된 전략으로 업계 선두주자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하이프랜드 상품개발은 주로 중국, 일본에서 진행했는데 대표적으로는 국내 최초로 중국산 바구니를 수입해서 유통한 겁니다. 이 바구니를 발렌타인 초콜릿 종합선물세트로 개발해 전국적으로 유행시켰어요. 대박이 났죠. 그뿐만 아니라 일본 신주쿠에 구매팀을 상주시켜 유행하는 액세서리를 대량으로 수입해 판매했어요. 국내 상품이랑 비교되지 않을 만큼 차별화된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죠.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 티셔츠를 제작해 전국에 1000만 장 판매기록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허허. 연매출이 2500억 원가량 됐습니다. 다른 매장에 있는 상품은 거의 원가에 공급하고 다른 매장에 없는 상품은 자체 개발·판매해서 수익을 내는 전략이 먹힌 거죠. 한 마디로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해서 유행을 앞서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과감한 도전으로 위기를 넘다

복합쇼핑몰이 번창하던 당시 그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리베라호텔 건립을 추진한다. 2000년 터를 사들인 그는 이듬해 호텔 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하지만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매번 순탄하게 진행된 사업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찾아온 고비는 이전에 겪었던 파도 수준이 아니었다. 2003년 토목공사 진행 중에 태풍 매미가 동반한 해일에 공사장은 쑥대밭이 돼 버린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설상가상으로 태풍 매미 피해 이듬해인 2004년 대기업 홈쇼핑이 등장하면서 ㈜하이프랜드 또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한 달에 매출이 10%씩 급감했다.

"쇼핑몰 사업이 급격히 쇠락하면서 결국 사업을 접었죠. 6개 매장 모두 손실이 나면서 더는 견딜 수 없어 처분을 했습니다. 미련이야 없을 수 없겠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대신 호텔 사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두 접으라고 했어요. 호텔 운영해서는 비전이 없다는 말과 또 해일 등이 오면 그땐 완전히 망한다고…. 사실 호텔 사업이 실패하면 사업 전체가 무너질 위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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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컨벤션 모습./박일호 기자

그 순간 다시 그는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는다.

"제가 가장 존경하고 인생에서 본보기로 삼는 사람이 이순신 장군입니다. 장군과 관련된 책은 어릴 적부터 읽어서 아마 안 본 게 없을 겁니다. 연구 논문도 거의 찾아서 봤습니다. 장군의 인생, 그 내면을 관통하는 철학은 어려운 이웃과 백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 정의를 위한 원칙과 소신, 자력으로 행하는 독립심. 이 네 가지 정도로 정리됩니다. 미리 철저히 준비해서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싸워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었죠. 그 철학이 제 인생 길잡이지요. 나눔을 실천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보면 됩니다. 중요한 순간이 오면, 장군이라면 어떻게 결정했을까 생각하고 그에 따릅니다. 리베라호텔 건설 때도 칼을 뽑았으면 강력하게 추진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도망칠 곳도 없었고요. 배수진 치고 이것 못하면 죽는다 생각하고 진행했죠."

결국 리베라호텔 마산은 2004년 12월 문을 열었고,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2005년에는 ㈜리베라관광개발을 설립해 부동산 개발사업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대표적인 것이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리베라컨벤션과 대구 프라이비트 건물 개발사업이다. 최근에는 베트남 개발사업에도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김 회장은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는 ㈜리베라관광개발과 ㈜리베라관광호텔, ㈜리베라컨벤션 3개의 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그는 특히 리베라호텔과 리베라컨벤션 건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냥 건물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지었습니다. 인테리어도 차별화 고급화에 상당히 공을 들였고요. 주변 사람들은 사업이 실패할 것이라 우려했지만, 저는 우수한 시설이라는 하드웨어에 섬김의 서비스 정신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결합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특급 호텔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창원 시민들 덕분에 사업이 잘되고 있습니다. 저희 마진율이 5% 수준입니다. 이익을 최대한 줄이고 시민에게 보답하고 상생하는 마인드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고객 감동은 김 회장의 승부수였다. 높은 만족도가 입소문을 타면서 올해 리베라 컨벤션 매출은 지난해보다 150% 신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김 회장은 예식은 이미 6개월, 돌잔치는 1년 치가 예약된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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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명 리베라관광개발 대표./박일호 기자

나눔문화 작은 실천 확산

리베라컨벤션이 고객 신뢰를 얻은 데에는 또 하나의 특별함이 있다. 예식장이지만 축하화환을 전혀 받지 않는다. 대신 사랑의 쌀을 받아 이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지역의 작은 나눔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오픈을 하고 하루는 예식 화환이 200개가 들어오면서 놓을 자리가 없더라고요.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민을 좀 했죠. 고작 한 시간 진열하고자 화환 하나에 10만 원씩 2000만 원을 소비한다. 이거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리 주변 어려운 이웃 중에는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도 수없이 많은데…. 자신의 과시욕을 위해 그 많은 돈을 허비하는 것은 어쩌면 어려운 이웃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머리를 모아 쌀을 생화 화환 대신 기부받는 방법을 생각해 냈죠."

반발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제는 예약을 하고자 찾아오는 사람 중에 리베라컨벤션에서는 화환을 받아 진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오는 이가 많지만 처음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환을 받지 않는다는 말에 발길을 돌리는 고객도 많았다.

"처음에는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많아서 손님을 많이 놓쳤죠. 다른 곳에서도 시도하다 실패한 곳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설득하고 이해시켰죠. 이제는 그 뜻이 좋다며 일부러 찾아오는 고객도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이죠. 허허"

이렇게 해서 리베라컨벤션에서는 생화 화환을 볼 수가 없다. 대신 컨벤션에서 마련한 인조 화환이 놓이고 여기에 사랑의 쌀 포대가 차곡차곡 쌓인다. 이 쌀은 혼주와 신랑·신부의 뜻에 따라 그들 집으로 배달되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대신 전달되기도 한다.

"대부분 기부를 해달라고 해요. 사회에 새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좋은 일을 하게 돼 오히려 축복이라고 동의하는 분위깁니다. 그러면 쌀은 혼주와 신혼부부의 이름으로 어려운 이웃에 전달되고, 그 명단을 그들에게 다시 전해 드리죠. 작은 나눔 문화로 확산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화환업체에는 죄송하지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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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명 리베라관광개발 대표./박일호 기자

"제가 더 행복하더라고요"

김 대표는 2014년 7월 28일 1억 원을 기부해서 경남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하지만 그는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15년 전부터 도내 18개 시군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 나눔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가정, 다문화 가정, 외국 이주민 합동결혼, 소년소녀 가장, 한부모 가정, 동서문화상 지원 등 그의 나눔 실천은 손을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매년 2억 원가량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에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장애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자신이 장애인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한쪽 눈을 다쳐 실명하셨고요. 저희 형님은 6·25 때 피난 가다 총알이 머리를 스치면서 중증 지체·정신 장애인으로 사시다 16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장애인 그리고 그 가족의 아픔과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죠. 형님 돌아가시고 제 사업에 여유가 생기면서 그때부터 어려운 장애인에게 나눔을 실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꼭 15년 됐네요."

그가 나눔을 실천하는 방법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금전·물품을 지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능하면 시간을 내서 직접 찾아 뵙고 이야기 나눈다.

"기부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직접 만나서 마음을 전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아니면 받는 사람, 주는 사람 모두 관례적이거나 습관적으로 변해버려요. 그분들은 이야기할 사람들이 많지 않아 외로운 이들이거든요. 저는 직접 만나서 마음을 전하고 따뜻한 울타리가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위로이면서 희망이 될 수 있죠. 제게도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고요. 지금쯤 우리의 나눔과 기부문화가 형식에 치우친 경향이 없나 반성해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신문을 보면 연말에 현수막 걸고 나눔 행사를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어요. 나눔문화가 상당히 확산한 증거죠. 그런데 아쉬워요. 이게 너무 관성화, 형식화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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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명 리베라관광개발 대표./박일호 기자

그가 나눔을 실천한 근본적인 계기는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 또 다른 자신을 돕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큰 돌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초석이 되고 사회를 떠받치는 것은 큰 돌보다 작은 돌이 모여서 가능한 것이거든요.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만 중요하게 여기고 없는 사람들은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더 소외되죠. 저도 어렵고 소외된 시절을 지내봐서 조금은 알죠. 그러니 더 출세하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르죠. 돈도 어느 정도 벌고 나이가 들어 되돌아 보니 나만 잘살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딘가에 또 다른 옛날 그때의 내가 있을 텐데…. 그래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조금씩 나누고 봉사하려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행복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눔과 기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또한 개선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제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정치 나오려고 하는 것 아니냐, 남에게 내세우고 내보이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제 진심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인터뷰와 언론에 비치는 것을 피합니다. 이런 문화 또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너무 예민하게 보지 말고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또한 나눔을 확산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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