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구성원들이 자랑스러워할만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가

2014년 11월 대전상공회의소는 대전 지역 대학생 500여 명을 대상으로 '지역 기업 인식'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는 '한화'가,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는 '성심당'이 가장 많은 응답률을 보였다. 특히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 브랜드로 꼽힌 성심당은 50.5%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역 대표 기업이자 지역 연고 프로야구팀인 한화 이글스가 9.7%를 받는 데 그친 것과 비교되는 결과다.

조사 대상이 중장년층이 아니라 20대 초반 대학 재학생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성심당이라는 대전의 오래된 빵집이 추억을 먹고사는 중장년층 뿐만 아니라 한창 새롭고 매력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20대 초반의 청년들에게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무슨 이유로 성심당을 대전의 대표 브랜드로 내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은 걸까?

스스로 자기 도시에 집착하는 성심당

지난여름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에 있는 성심당 본점에서 작은 전시회가 두 달 가까이 열렸다. 1956년에 창업한 이 빵집이 60주년이 되는 내년 전시회를 미리 맛보는 일종의 시범 전시회였다. 전시회 타이틀은 '나의 도시, 나의 성심당'으로 잡았다. 도시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성심당을 부각시킨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시는 당연히 대전을 가리킨다. 이 타이틀은 내년 기념 전시회까지 그대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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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과 성심당의 성장 과정을 표현한 미디어아트, 대흥동 성당 앞에서 시위대들에게 빵을 나눌 때 튀김소보로도 함께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성심당 본점과 바로 옆 케익부띠끄 2층 '플라잉팬'에서 마련된 이 전시회에서 나의 눈길을 끈 코너는 '튀소 기네스'였다. 1980년 5월 20일에 태어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오늘날의 성심당을 있게 한 1등 공신인 튀김소보로를 주제로 다양한 기록들이 이 코너에서 소개됐다. 성심당에 따르면 튀김소보로가 개발된 지 35년이 된 올해까지 모두 3860만 개의 튀김소보로가 판매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 튀김소보로들을 만드는 데 밀가루 1274톤, 팥 115억 8000만 개, 계란 980만 개, 식용유 5453톤이 들어갔다.

숫자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튀김소보로 3860만 개는 대전 시민 150만 명 기준으로 1인당 25개를 먹은 양이다. 밀가루 1274톤은 대전월드컵 경기장 3개 크기의 밀밭에서 생산되는 양이고, 팥 115억 8000만 개를 나래비 세우면 서울과 대전을 536회 왕복한단다. 계란 980만 개를 한 줄로 세우면 대전 지하철 노선을 왕복 네 바퀴 돌 수 있고, 식용유 5453톤은 한밭 수영장 2개를 채울 양이란다.

'성심당, 대전을 만나다'라는 미디어아트 전시에서는 시대별 성심당 성장 과정과 대전시의 성장 과정을 한 화면에 녹여냈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는 대덕연구단지가 생길 때 성심당이 지금의 은행동 153번지로 이전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1980년대 초 대전 시내에서 민주화 시위가 있을 때 시위대와 전경들에게 빵을 나눠줬던 이야기,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될 즈음에 성심당도 2배 확장했다는 소식을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해 소개하는 식이다.

이처럼 성심당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대전에 집착한다. 서울 소공동에 있는 롯데백화점 본점에 입점해달라는 요청을 직접 받았지만 고사한 이유도 대전에 기반을 둔 성심당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대신 성심당은 대전 소재의 롯데백화점과 대전역에 분점을 열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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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당 59주년 전시회 때 전시된 '튀소기네스'

대전과 성심당이 함께 만든 이야기

성심당을 세운 창업자 고 임길순 씨는 대전 토박이가 아니다. 그는 함경남도 함주 태생으로 1950년 12월 23일 가족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바람 찬 흥남부두를 탈출한 피난민이다. 거제와 진해를 거쳐 대전 땅에 정착한 때가 1956년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울 가던 기차가 대전에서 고장 났기 때문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대전 대흥동 성당에서 밀가루 두 포대를 지원받아 대전역 앞에서 성심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찐빵 장사를 시작했다. 성심(聖心)은 거룩한 마음, 즉 예수의 마음을 가리킨다. 임 씨는 피난길에 신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실제로 임 씨는 그렇게 살았다. 그날 찌고 남은 찐빵은 이튿날 팔지 않고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혹시 기다릴 사람들이 염려돼 늘 넉넉하게 찐빵을 만들었다. 이 전통은 훗날 찐빵집에서 정식 빵집이 됐을 때도, 1980년대 초 2대째인 임영진 대표가 성심당을 맡았을 때도, 그리고 바로 오늘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매달 기부하는 빵이 어느새 3000만 원어치에 달한다.

그렇다고 성심당이 '착한 일'만 한 것은 아니다. 2대 경영이 시작된 1980년대에 성심당은 서울 빵집들도 부러워하던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우선 1980년에는 단팥빵과 소보로, 그리고 도넛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튀김소보로'를 개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튀김소보로는 지금도 줄 서서 구입하는 성심당의 대표 브랜드다. 1985년에는 국내 최초로 생크림 케이크를 서비스했고, 1988년에는 3시간 동안 얼음을 유지하는 포장 빙수를 개발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대전 시민들은 대전역이나 고속터미널에서 성심당의 포장 빙수를 사들고 떠나기를 즐겼다. 다른 도시에서는, 심지어 서울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제품이었기에 자랑하기 좋았던 것이다. 성심당은 이처럼 대전시민에게 착할 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빵집이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1990년대 들어 도시 외곽에 신도시(둔산 신도시)가 생기면서 원도심 공동화가 진행됐고, 크라운베이커리를 비롯해 SPC그룹과 CJ가 빵 사업에 뛰어들면서 원도심에 주차장을 갖추지 않은 성심당의 매출 증가가 둔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2대 경영인인 임 씨의 친동생이 성심당 이름을 가지고 독자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이다 부도가 나서 엄청난 규모의 빚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이라이트는 2005년 1월 22일 토요일 늦은 오후에 발생한 화재였다. 대전 원도심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그 시각에 성심당은 활활 타올랐다. "성심당에 불났다"란 외침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고,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와 불구경(?)을 했다. 시민들도 제빵업계도, 심지어 경영자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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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화재가 난 성심당 현장.

그러나 직원들이 일어났다. "우리 직장은 우리가 살린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전 직원이 복구작업에 나섰다. 중고 기계를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매장 그을음을 직접 뗐다. 불이 난지 5일 만에 다시 빵을 구워냈을 때 직원들 모두가 감격해서 눈물을 쏟았다. 그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대전시민들도 응답했다. 화재 복구 첫 달 매출이 기존 매출보다 30%나 증가하는 기적을 이룬 것이다.

화재 사건은 역설적으로 직원을 결속시키고 성심당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경영진과 직원들은 '성심당스러움'이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시류를 쫓기보다는 대전시민에게 어머니 같은 성심당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제일 먼저 빵 크기를 키웠다. 핵가족 시대에 맞춰 빵 크기가 작아지던 분위기를 정면으로 거슬렀다. 정해진 시간마다 종이 울리면 푸짐한 시식 코너를 열었다. 한 바퀴 돌며 시식만 해도 배를 채울 수 있게 넉넉하게 제공했다. 기름에 튀겨서 정크푸드라고 냉소 받던 튀김소보로도 전면에 배치했다. 인테리어도 바꿨다. 가난한 사람도 주눅 들지 않고, 부자도 품위를 잃지 않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애썼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대전시민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단골손님에서 한 발 나아가 적극적인 홍보대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등장했다. 마침 블로그와 소셜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그동안 성심당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맛있는 빵 때문에 단골이 된 손님들이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지지자로 진화했다. 지금은 그 흐름이 한창 탄력을 받고 있는 중이다. 가파른 매출 증가에 힘입어 어느새 직원이 400명에 이르고, 연 매출 300억 원 이상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대전의 대학생들이 자기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은 단지 유명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명하기로는 한화이글스가 훨씬 뛰어나다. 적어도 지역의 대표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도시 구성원들에게 '자랑스러움'을 안겨줄 필요가 있다. 다른 도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꺼낼 때 근사해 보일 만한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대전에서는 바로 그 부분을 성심당이 채워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토착 기업의 문화적 잠재력

도시는 생활공동체이면서 경제공동체다. 흔히들 도시의 경제 수준을 이야기할 때 지자체의 재정자립도를 내세운다. 이 숫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도시 내에서 경영되는 기업의 세수가 곧 지역 경제의 지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세금 많이 내는 기업은 그만큼 일자리를 많이 제공할 가능성이 높고, 또 소비도 촉진시킬 것이기에 도시 경제를 전반적으로 나아지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여기에서 한 발짝 더 욕심을 낸다면 '토착 기업의 활약'이다. 거대 기업의 지사나 공장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뿌리 내리고 성장한 토착 기업이 도시 경제 생태계에서 활약해준다면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시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 국민들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우리 기업'이라고 여기고, 소니와 애플, 샤오미와 알리바바를 '외국 기업'으로 여기듯이, 도시 경제 안에서도 토착 기업에 대해 '우리 기업'이라는 강한 애착이 형성될 수 있다.

성심당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공적인 토착기업은 도시에 생생하고도 풍성한 이야기 자원을 제공한다. 특히 문화재나 역사처럼 과거가 아니라 현재 살아서 움직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도시에 엄청난 생동감과 활력을 제공해준다. 토착 기업은 경제적인 숫자뿐만 아니라 일자리와 서비스라는 형태로 오랜 시간에 걸쳐 시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상호 작용해왔다. 그 기업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곧 도시의 중요한 화젯거리가 되고, 그 기업이 만들어내는 문화가 곧바로 도시 문화의 하나로 스며든다. 토착 기업은 도시 자원을 자양분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기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그 토착 기업에게 투사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도시 정부는 토착 기업에 대해 경제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가치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 2012년과 2013년 동안 총 61회에 걸쳐 세계 장수 기업을 소개한 KBS의 <백년의 가게> 제작팀(책임 프로듀서 이학송)이 낸 같은 제목의 책에 보면 프랑스의 장수 기업 지원 정책을 소개한 대목이 나온다.

프랑스는 지난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장수 기업 지원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EPV(살아 있는 문화유산 기업 국가위원회)는 오래된 가게들이 살아남고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세금을 감면하고 수출을 장려하는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주된 목적은 이 장수 기업들이 지속 가능하게 발전하도록 보조하면서 고용과 부를 창출하고, 프랑스의 경제적 문화적인 우수성을 국외에 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취재진이 밝히는 우리나라의 장수 기업 현실은 우울하다. 취재진은 우리나라에서 11개의 기업을 발굴해 방영했지만 정작 책에는 한 곳도 수록하지 않았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방송은 했지만 책에 실을 정도는 못됐기 때문이다. 1906년에 문을 연 '이명래 고약'은 후계자 문제로 제조법을 전수 못 해 결국 간판이 바뀌었고, 1916년에 개업한 '종로양복점'은 빌딩 개발에 밀려 터를 옮긴 후 제대로 경영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으며, '성광성냥공업사'는 성냥 자체가 사양산업이라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

경남의 토착 기업

경남에도 적지 않은 토착 기업이 있다. 올해로 110주년을 맞은 몽고식품이 대표적이고, 100년이 다 돼가는 S&T모터스(1917년 설립·창원)와 60년 이상 된 피케이밸브(1946년 설립·창원), 현대모직(1951년 설립·양산), 경전여객자동차(1951년 설립·진주), 50년 이상 된 넥센타이어(1958년·양산), 중앙건설(1958년·옛 마산), 진주햄(1963년·양산)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몽고식품, 경전여객자동차, 넥센타이어, 진주햄 등은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식품이나 소비재, 그리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이다.

경남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대전에서 한 것과 같은 조사를 했을 때 과연 순위 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토착 기업이 몇 개나 될까? 경남지역 대학생들 중 어느 정도가 이들 토착 기업들을 '우리 기업'이라고 여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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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한일합섬 부지, 지금 이곳엔 메트로시티 대단지 아파트가 서 있다./경남도민일보DB

경남지역에서 시민과 기업 사이에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밀착됐던 토착 기업은 단연 '한일합섬'이 아니었을까? 단일 공장에 2만여 명이 근무하는 아시아 최대 공장이었던 한일합섬은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누이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혹은 자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주야 3교대로 닭장 같은 기숙사 환경을 견뎌내며 땀을 흘렸던 곳이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해 세운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운동장을 조성할 때 각자 고향에서 가져온 흙이 보태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공장과 학교를 잇는 거리는 어묵과 떡볶이 파는 분식점으로 즐비했고, 주말에는 부림시장 먹자골목 또한 이들이 다 먹여 살렸다는 전설도 있다. 그만큼 한일합섬은 지역 사회에 엄청난 일자리를 제공해주면서 동시에 엄청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일합섬과 마산시는 시민들과 함께 소통하기보다는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한일합섬은 1998년 마산시로부터 공장용지를 주거용지와 상업용지로 용도변경을 받으면서 3000억 원 이상의 시세차익을 챙겼고, 2005년에는 마침내 그 터를 건설사에다가 팔고 미련 없이 마산을 떠났다. 마산시도 시민을 등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마산시장이었던 김인규 씨는 이때 인허가 때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돼 시장직에서 중도 하차하는 불명예를 얻었다. 지금 그 터는 창원 지역 전체를 따져봐도 가장 비싼 주거지 중 하나가 됐지만, 그곳을 거쳐 간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사연과 애환을 기념할 만한 공간 한 평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 엄청난 이야기 자원이 사라진 것이다.

토착 기업은 단순한 도시의 경제인 주체만은 아니다. 시민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하면서 문화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생산하는 문화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래된 토착 기업에 대해 '문화유산 기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프랑스의 정책은 참고할 만하다.

지역 사회와 결속하면서 오랫동안 생산성을 유지한 토착 기업들에 대해 종합적이고도 입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동시에 도시와 시민의 자원을 토양으로 사업하는 토착 기업들도 지역 사회와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도시 속의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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