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파리 테러로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핵심은 극단주의자를 비난하는 목소리지만,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무슬림은 원래 평화주의자"라고 부르짖는다.

이 말에는 역사적 연원이 있다. 이슬람 자체가 포용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12세기 중동을 다스렸던 걸출한 군주 살라딘(1138~1193)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모범을 보인 때문이다. 아랍 세계를 통틀어 역사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살라딘은 본명이 살라-앗-딘 유수프 이븐 아유브(Salah-ad-din Yusuf ibn Ayyub)이다. 살라딘은 이 이름을 서양식으로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시리아를 다스리던 장기(Zangid) 왕조의 핵심인 아버지를 둔 덕에 살라딘은 유복한 가운데 이슬람 계율을 철저히 몸에 익힌 무슬림으로 성장한다. 전란이 끊이지 않던 시대상황 속에서 전사(戰士)가 되기 위한 갖가지 덕목을 익힌 것은 불문가지.

살라딘이 역사에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술탄 누레딘의 사위가 되어 이집트 원정에 나서면서다. 사령관인 숙부 시르쿠가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점령한 후 갑자기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이집트를 확실하게 장악한다. 그런 후 본국 술탄인 누레딘이 병사하자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까지 접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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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라딘./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중동의 패자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살라딘은 이윽고 무슬림들의 여망인 예루살렘 탈환에 나선다. 당시 레반트(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해안) 지역은 1099년 1차 십자군 침공 이후 1세기 가까이 기독교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몇 차례 접전을 거쳐 살라딘은 드디어 1187년 6월 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살라딘이란 이름을 역사에 깊이 각인시킨 사건은 이때 발생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기독교도들을 죽이지 않았다. 약간의 몸값만 받고-그나마도 없던 사람들은 그대로 방면-모두 풀어주었다.

1099년을 기억하는 참모들이 기독교도들을 모조리 죽이자고 주장하자, 살라딘은 "우리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연약한 포로들을 죽인다면 저 배타적인 기독교도와 다를 게 무엇인가? 저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저들과 같은 부류가 될 뿐"이라고 답한다.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십자군은 성안에 살던 무슬림 수만 명을 모조리 학살했다. <집사>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 성전 앞 광장은 무슬림들이 흘린 피로 사람들의 발목까지 피범벅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끔찍한 역사를 기억하는 살라딘 군은 '이에는 이'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살라딘은 기독교도들을 풀어줌으로써 '아랍적 관용'이란 미덕이 살아있음을 몸소 실천한다.

무용, 명예, 약자 보호와 같은 덕목은 원래 중세 유럽에서 발원한 기사도 정신에 속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덕목을 실천한 이는 유럽 기사들이 아니라, 무슬림 살라딘이다. 덕분에 살라딘은 이슬람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칼리프, 술탄, 아미르 중에서도 가장 찬연한 위치를 점한다.

물론 그가 도덕군자였다는 건 아니다. 정치군사 지도자가 갖춰야 할 모든 악덕(?)-배신, 찬탈, 모략 등등-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그러나 그는 사적 영역에서는 절제와 청빈을 생활화했으며, 백성들을 대할 때는 자비와 관용을 끝없이 베풀었다. 살라딘의 궁정은 그래서 늘 탄원자들로 들끓었으며, 그래도 그는 짜증 내지 않고 사람 좋은 웃음을 늘 흘렸다고 한다.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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