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경제 성장을 멈추자고 주장해야 한다

교도관으로 일하던 중 투옥된 문익환 목사를 만난 게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을 때 험난한 길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묵묵히 헤쳐 나왔다. 타고난 글재주로 시집도 냈으며 녹색당 대표까지 지낼 정도로 환경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해왔다. 그런 김석봉(58) 씨가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 골짜기에 둥지를 틀었다. 부부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아들 내외도 함께 시골생활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두 시간 가까이를 달려가서 만나봤다. 처음부터 거창한 주제로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평범하게 시골에, 농촌에 적응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튀지 않으려고 한다는 그의 말 속에는 커다란 꿈이 녹아있었다. 

-고향이 하동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찌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들어왔나요?

"그냥 와서 보고 첫눈에 반했어요. 땅은 주인이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냥 왔는데 너무 좋았어요. 아내와 다시 와보고는 24일 만에 이사했습니다. 그게 벌써 8년 하고도 3개월 전이네요. 우리 나이쯤 되면 나중에 시골 들어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잖아요. 나도 딱 그 정도였어요. 귀농하겠다고 계획을 세우거나 마을이나 땅을 찾거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어요.

- 귀농·귀촌한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에 텃세도 있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마을주민들과 관계. 별거 있나요. 텃세는 자기가 텃세를 부리게끔 하면은 텃세를 부리는 거고, 텃세를 부리게끔 하지 않으면 부릴 이유가 없지. 그냥 맹목적으로 텃세를 부리지는 않을 거잖아요. 나는 텃세를 느끼거나 그런 일은 없었고, 무슨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그런 게 있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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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 전 녹색당 대표./정성인 기자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그래도 제법 돈이 들었을 텐데….

"요즘 같으면 못 들어왔겠죠. 땅값이 엄청나게 올랐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집 살 정도는 되더라고요. 집 사서 조금 수리하고, 농사는 동네 논·밭 빌려서 살고 있습니다. 한 2000평 정도 하는데, 내년부터는 조금 줄일 생각입니다. 힘들어서 못 하겠어요. 농사일로는 돈도 안 되고. 농사를 지어서 이해타산 따지고 하지는 않지만 너무 힘들어요. 논은 벼농사. 식량은 농사지어서 자급하네요. 밭농사는 돈 될 거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소소하게는 버네요. 고구마를 많이 해서 100만~200만 원 정도 벌이는 하고. 봄에는 고사리 두릅 따러 가고 가을에는 오미자 따곤 합니다. 올가을에는 한나절씩 세 번 나가서 오미자를 한 40㎏ 땄어요. ㎏에 1만 5000~1만 8000원 했으니 몇십만 원 벌이는 했죠."

환경운동을 하기까지

1983년이라고 했다. 고향인 하동군 옥종면을 떠난 게. 교도관 시험에 합격해서 청송교도소로 배치됐을 때이다. 이후 진주교도소로 발령났고, 그때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바로 고 문익환 목사를 죄수와 간수로 만난 것. 큰 감화를 받았고, 잘 다니던 교도관 생활을 접었다. 교도소를 그만두기 전에도 '남도시 동인'이라 해서 문학단체 활동을 했지만 1989년 11월 공무원에서 민간인이 되고 '진주청년문학회' 창립에 함께했다.

"교도관을 그만두고는 <주간 전국노동자신문> 진주지국장을 했어요. 자전거를 타고 온 진주시내를 돌아다니며 신문을 배달했지요. 그러면서 진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많은 민주인사를 알게 됐고 한동안 진주지역에서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 당시 '닭띠 계'라는 게 있었지 않습니까? 당시 35세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만.

"그랬지요. '새날회'라는 이름으로 지역 연대활동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개신교 박광희 목사, 성공회 이윤호 신부, 구세군교회 이태룡 사관,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이석행 씨, 택시노동자 이규영 씨, 노동자 문화운동을 하던 하계윤 씨, MBC 노태선 씨, 인창주유소를 하던 최성철 씨, 사천지역 민주화운동을 하던 최인태 씨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한참 혈기왕성할 때였죠. 지금은 몇 명을 빼고는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연락이 안 되네요."

-그 그룹 멤버들이 진주지역 민주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압니다만, 민주주의민족통일 서부경남연합이라는 범 진보진영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이었고요. 한데 어느 날 보니 환경운동연합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더군요?

"우리 농업 지키기 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을 두고 우리 농업을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클 때였어요. 92~93년 무렵이었어요. 산청군 거림 쪽 양수댐 반대운동이 시작됐죠. 97년 IMF가 터지고 98년 지리산댐 얘기 나오기 시작하고 그랬어요. 하여튼, 환경운동으로 가기 전 '우리농업지키기 진주진양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는데 사무실을 진주환경운동연합 사무실 한 켠을 빌려서 쓰고 있었어요. 거기서 환경운동을 처음 만났습니다. 가만 보니 '아! 이게 굉장히 중요한 운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94년부터 환경운동 쪽으로 자리를 바꿨어요. 95년 말인가 이때 진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강대승 변호사가 의장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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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 전 녹색당 대표./정성인 기자

-이후 전국 환경련 의장까지 환경운동 중심에 서 있었죠?

"1998년이었을 거예요. 진주환경운동연합 강대승 의장이 진주시장 선거에 나선 적이 있어요. 당시 진주지역 민주인사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처럼 말이죠. 강 의장을 민족민주 후보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었죠. 어쨌거나 선거에 출마했고 낙선했어요. 이후 진주환경운동연합 의장을 맡았고, 당연직으로 경남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까지 맡았어요. 그렇게 지역에서 환경운동에 힘을 쏟고 한참을 지냈지요.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가 4대 강 사업을 추진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던 환경운동연합을 친 겁니다. 그때 활동가들이 상처를 많이 입고 떠났습니다. 대표단이 다 사임하면서 비상 상황이었지요. 환경운동연합 거듭나기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다시 대표진을 구성하는데 전국 현장활동가들이 나를 추천했어요. 2009년 3월부터 전국 환경운동연합 9기 대표를 지냈지요. 임기 3년이니까 2009~2011년까지 했습니다."

- 녹색당 대표까지 지냈지 않습니까?

"환경운동연합 의장 할 때인 2009~10년 이 무렵에 녹색당 창당 움직임이 있었어요. 발기인도 모집하고. 나도 발기인으로 참여했어요. 환경련 대표는 정당 당적을 가질 수 없었어요. 의장뿐만 아니라 국장급 이상은 당적 보유는 안 돼요. 하지만 정식 정당으로 출범한 것도 아니니 발기인이므로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일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정당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지요. 사실 환경운동연합 안에서는 녹색당에 대해 미묘한 견제 같은 게 있었어요. 거의 안 움직였는데, 내가 어찌 보면 간부 중에서는 최고 간부가 녹색당 만드는 데로 들어간 거죠. 2012년 3월 4일 창당했잖아요. 창당대회장에서 두 명의, 당 대표라 안 하고 공동운영위원장 이렇게 하는데 여자 1명 남자 1명 선출하는데 거기서 추천을 받아 공동운영위원장이 됐지요. 아마 한국 정당 역사상 가장 짧은 대표직을 내가 맡았을 걸요? 한 달 했어요. 법적으로 정당 총선에 참여해 2% 이상 득표 못 하면 중앙선관위가 당 해산 명령을 내리잖아요. 우리가 2012년 3월 4일 창당하고 4월 6일인가 총선에 참여해서 0.48% 얻었어요. 그러니까 자동으로 해산되는 거죠. 공식적으로는 창당한 그 시점으로부터 선거가 끝나고 해산 통보를 받은 시점까지 한 달 남짓 되잖아요. 한국 정당 역사상 당 대표로 선출돼서 한 달 남짓하고 그런 사례는 없을걸요?"

-헌법소원이 있었죠?

"그렇죠. 정당 만들어도 총선에 참여하지 않으면 관계없어요. 당명을 못 쓰게 하는 것은 위헌이라 해서 이겼어요. 그래서 지금은 녹색당으로 다시 났죠. 그러니까 그해 해산됐다가 10월에 재창당을 하는데 나는 운영위원장직을 맡지 않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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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 전 녹색당 대표./정성인 기자

그냥 마을 주민으로 녹아 살 뿐

-환경운동에 오래 몸담았는데 귀농 후 삶을 보면 그냥 시골에서 오래 살아온 것 같은 시골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듯합니다.

"이웃들과 똑같이 살아요. 특별하게 내가 환경운동을 했으니까, 내가 녹색당 대표를 했으니까 해서 이웃들과 다른 삶을 살려고는 생각 안 해요."

-그래도 환경활동가로서 지역에서 뭔가 해보고 싶은 일도 있을 텐데요?

"시골에 살면서 대외활동이 솔직히 힘들어요. 에너지도 너무 많이 낭비되고 비용도 그렇고, 농사도 못 짓고. 그렇게 살 것 같으면 뭐하러 시골 와서 살겠어요, 도시 살아야지. 마을에 들어와서 2008년부터 지리산 둘레길을 만드는 사단법인 숲길의 상임이사를 1년 동안 했어요. 지리산 북부권역 50㎞ 노선은 내가 책임지고 만든 거죠. 2008년 그걸 하다가 2009년 환경운동연합 대표로 추천되면서 환경운동연합 대표가 100% 정부기금에 의존하는 사업을 하는 법인 상임이사를 겸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사임했습니다. 그러고는 환경운동연합에 몰두했고요. 녹색당 활동도 마치고 여기서 마을기업을 하려고 했어요. 경관이나 여러 가지 자원이 풍부하니까 주민하고 조직해서 마을기업 준비를 했는데 2014년 마을기업으로 선정됐어요. 생태마을 수련관도 만들었는데, 그게 정부가 지어준 거예요. 산촌 개발사업으로 지어주고, 건물주는 함양군청인데 여기 영농조합법인에 임대해서 내가 관리하고 있어요. 이익금은 마을로 환원하고요."

-조금씩 형태나 지원 주체는 다르겠지만 전국 각지에 비슷한 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어쨌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경관이 참 좋잖아요. 수용도 80명 이상 할 수 있고, 방이 펜션형으로 돼 있고, 강당은 교육장이나 회의실로 쓸 수도 있어요. 집사람 맛있는 밥 해주지. 집사람은 궁중음식 연구원 15년 다니고 있어요. 경남 일대서 우리 집사람만큼 전통음식을 정통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없어요. 원래 솜씨가 좋은 데다 15년 이상 다녀 궁중음식 체험지도사 인증서까지 받고 지금 궁중음식 하는 최고 연구자 24명이 있는데 거기 멤버예요. 서울에 있는 에코밥상이라는 비록 바지사장이지만 친환경 식당에 대표로 돼 있죠. 거기에 나오는 메뉴를 개발하고 했어요. 요새도 무슨 요리 프로그램이라든지 나와달라고 하는데 일절 안 나간대요. 우리 집사람이 만드는 왕의 음식을 먹으면 맛있어요. 그래 그냥 이렇게 삽니다."

-아들 내외도 함께 들어와 살지요?

"아들은 지리산생명연대 활동가로 일하고 며느리는 카페를 하고 있어요. 오미자 오가피 생강 대추 등 다 동네서 난 것으로 운영합니다. 처음에 아들이 내려온다고 했을 때는 사실 안 그랬으면 하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어요. 하지만 가까이 사니 좋네요. 가족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인터뷰하는 날은 마침 아들이 쉬는 날이라 둘이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음식도 배우고, 대추차가 다 팔렸다며 새로 고아야겠다며 부탁도 하면서 즐겁게 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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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인 기자

지리산 권역 주민들 마음 상처 치유 필요

"시골에서도 우리 이웃 주민들이나, 글쎄 다른 시골이라면 다를 수도 있겠는데 이 지리산 주변 산촌은 상처가 굉장히 많고 심해요. 그래서 많이 폐쇄적이죠. 폐쇄적이라는 것은 나눌 줄을 모르고 시기심도 많고. 어찌 따지고 보면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도 같아요. 장점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볼 때. 그러면 왜 저렇게 됐을까 따지고 들어가 보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시골 사람들을.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지리산권역은 아무래도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의식이 크겠지요.

"해방공간에서 지리산권 산촌은 다 그랬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밤에는 빨치산 세상이었고 낮에는 국방군 세상이었으니까. 이 마을도 그랬다더라고요. 그러니까 뭐 권력 눈치를 봐야 하고, 역사적으로 그게 있는 거죠."

-그런 피해의식이 어떻게 나타나던가요?

"주민 180명 정도 되는 큰 마을이에요. 살아보니 대부분 이문에 밝고, 시골 사람들도 공짜가 없어요.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할머니가 고추밭에 약 치려고 약통을 지고 힘들게 가는 거예요. 너무 힘들어보여서 '내가 해드릴께요' 하고 내가 짊어지고 가서 내가 약을 쳐 드렸어요. 그러면 그냥 고맙다는 표현만 해도 되는데 반드시 그날 밤 뭔가를 들고 와요. 냉장고에 꽁꽁 얼어있던 고깃덩어리를 들고 오거나 사례를 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습성화 돼버렸어요. 빈 경운기를 끌고 가면서 이웃집에 감자를 캐는 할머니가 있으면 감자박스를 좀 실어줄 수 있는데도 안 실어줘요. 실어주면 돈을 줘야 해요. 그래서 참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내버려두고 가는 것보다는 서로 나누고 돕고 이렇게 하는 삶이 어떤 것이다하는 것을 알게 해줄 필요가 있지 않겠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마을 공동사업을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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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 전 녹색당 대표./정성인 기자

-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가 그것을 치유해주느냐. 치유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그래서 나는 작으나마 마을 공동사업을 한번 해보려고 하고 있고 마을 기업을 통해서든 어떻든 마을 공동사업을 통해서 나누는 게 어떤 것이라는 것을 같이 한번 해보고 싶어요. 서로 시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서로를 입지를 인정해주며 살아가는 옛날의 마을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까지 받아온 상처 이런 것을 치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안 될까 이런 생각이 있는 거죠."

-마을 공동사업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저까지 원주민 11명이 동의해 조합을 만들었어요. 처음 조합 만들어 활동할 때 주변에 말도 많았어요. 도시에서 들어온 사람 뭘 믿고 그러느냐, 출자한 것 다 떼이고 말 거다 그런 얘기도 공공연히 나돌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이제 사업은 시작됐으니 마을 어르신들께서도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사업을 벌여나가야죠."

국가가 마을 관리사 육성하고 배치해야

-한 마을만의 문제가 아닐 텐데요, 농촌 문제에 대해서도 느끼신 게 많을 듯합니다만….

"농민의 문제는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고, 농촌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어디 큰 절 앞이나 보물 앞에 가면 문화해설사가 와서 설명을 잘해줘요. 또 어디 숲에 가면 숲 해설가가 나와서 잘해주죠. 그런데 이런 마을에 여행을 오면 마을을 설명해주고 알려주는 사람은 없어요. 마을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요. 너그 알아서 살아라고 버려져 있는 거죠. 보물, 생태숲도 중요하지만 어찌 보면 국가 근간이 되는 게 마을입니다. 세포가 되는 게 마을인데, 그 마을을 관리하는 프로젝트를 국가가 해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마을 관리사 그런 거는 국가가 육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생태마을 같은 것으로 지정되면 마을 사무장을 두긴 하는데 그 사람들이 마을에 대해 잘 몰라요. 시설 관리나 하는 거죠. 마을의 생태, 마을의 역사, 마을의 산업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마을 관리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꼭 이 마을이 아니더라도. 마을을 관리하는 그런 것을 양성하고 그런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시골에 와서 살아가게 하고 그래서 마을 주민과 함께 공동체 사업을 해나가게 하고 그래야 농촌이 안정됩니다. 농촌문제 해결할 길은 사람이 들어와 사는 데 있습니다. 마을을 이해하는 사람이, 원주민과 화합하고 소통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이 들어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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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 전 녹색당 대표의 집./정성인 기자

-귀농·귀촌도 많지 않습니까?

"귀농·귀촌 많지만, 귀촌은 글쎄 군청은 좋을 겁니다. 고급 자가용 가지고 저택 짓고 재산세 많이 내고. 군은 좋죠. 시골 마을에는 하나도 좋을 게 없어요. 우리 마을에도 인근에 17가구가 와있는데 거의 주말에나 왔다 갔다 하는 집이에요. 그 사람들은 주민도 아니죠. 그러면서 이 마을에 와서 이 마을 주민들이 지금까지 다듬어놓고 보호해놓은 이 자연을 자기들끼리만 만끽하며 살고 있다고요. 주민으로 의무나 권리는 행사하지도 않는 그런 식의 귀촌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거죠. 귀촌은 기본적으로 시골 와서 사는 거니까 연금을 많이 받거나 임대수입이 많거나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겁니다. 경제활동을 시골에서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귀농은 기본적인 경제활동을 시골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이런 산골에서는 할 수가 없어요. 농사로는 자립할 수가 없다고요. 그러니 귀농은 도시 근교로 다 가는 거예요. 하우스 짓고 하는 거죠. 이런 데는 귀촌이라고요. 경치 좋고 공기 좋으니까 나이 들고 하면 오는 거라고요."

-결국 농촌에서 경제적인 자립이 가능하느냐는 문제군요.

"농업의 문제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고 봐요. 그건 하면 되는 거니까. 실현 불가능한 것을 정책으로 하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힘이고. 정치력이죠. 그것이 진짜 필요한 정책이라고.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경제 성장을 그만하자고 해야 하는데

-녹색당 당원인데, 정당이라면 정권을 잡는 게 목적이잖습니까? 지금 녹색당은 어떤가요?

"글쎄 녹색당에 대해 잘 모르고, 나는 당원으로서 당비만 낼 뿐이고. 그래도 뭐 이 시대에 하나의 대안정당임에는 분명하지요."

-전 세계적으로도 녹색당은 많은데 실제 집권한 사례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독일에서 녹색당이 연정에 참여한 적은 있습니다. 그때 독일에서 탈원전 정책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일정 정도 화석에너지나 원전 이런 게 필요하고, 또 환경 훼손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지금까지 성장을 추구해왔고 또 뭐 솔직히 이율배반적으로 성장의 물결 속에서 환경단체도 생겨나고 성장할 수 있었죠. 성장의 과실을 나눠 먹은 것은 분명합니다. 난 그리 생각해요. 옛날에 내가 환경운동 할 때와 지금 환경운동 하는 것만 비교해봐도 다 그만큼 성장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국민소득 3만 달러 4만 달러 시대로 성장하면 뭐가 좋아질까 생각해보세요. 잘 사는 만큼 평화로워져야 하고 행복해져야 하는데 경제 성장이 그걸 담보해주지는 않습니다. 얼마만큼 더 가면 더는 성장을 안 해도 되느냐. 3만 달러 시대가 되면 하루 마흔 몇 명이 자살로 죽는데 그게 30명대로 줄어들 것이라는 객관적 근거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없어요. 그럼 미국 모델을 보자고요. 미국은 더 성장 안 해도 되잖아요.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은 성장을 멈추어라. 그렇지 않은 개도국이나 이런 데서 성장해야 하므로 더는 성장하지 말라고 얘기할 수 없다는 거죠. 지역으로 봐도 그래요. 시골이 이제 성장해야 하니 서울이나 대도시는 성장을 멈추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끝없이 성장해 가는 겁니다. 끝없이. 그러니까 녹색당, 내가 녹색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누구도 더는 성장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 이제는 버리고 갖지 않고 살자고 주장하는 시민단체도 개인도 없는 시댑니다. 녹색당이 그런 얘기를 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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