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갖고 귀촌하면 대부분 실패한다

뜻하지 않았지만 귀촌을 새로운 계기로 행복한 삶을 일구는 젊은 부부가 있다. 합천군 적중면에서 딸기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우리 먹거리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교육농장도 운영하는 귀농 14년 차 신미숙(46)·이용철(48) 부부다.

얼떨결에 남편 따라 귀촌한 도시 아내

"지난 2001년 귀촌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창원에서 회사 월급쟁이 생활을 했지만 그렇게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접고 대구에서 과일 사업을 하려고 갔는데 암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상 중에 귀촌하다시피 했습니다."

'하늘땅 별땅' 교육농장 대표인 미숙 씨와 얘기하라며 테이블에 앉기를 사양하던 남편 용철 씨가 먼저 말을 꺼낸다.

어쩔 수 없는 귀촌이었다고 했다. 당시 농사가 많았는데 그걸 어머니 혼자 지으실 것 같은 생각에 고민하다 대구에서 새롭게 시작한 과일사업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귀촌을 결심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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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 씨 부부./김구연 기자

"칠순에 가까운 어머니가 혼자 농사짓기엔 너무 규모가 컸습니다. 그냥 두고 볼 순 없었죠. 내가 맡아야 했습니다."

서른두 살. 용철 씨가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포'했으니 미숙 씨 고민이 깊었을 듯했다. 아니나다를까 미숙 씨 말문이 터진다.

"그때는 귀농·귀촌 개념도 없을 때였습니다. 우리 부부가 딱히 어디에서 어떻게 살겠다고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도시에서 살 줄 알았죠. 생각지도 못했던 남편의 계획이 저에겐 황당했습니다. 한동안 갈피를 못 잡고 '혼자 내려가라', '니가 알아서 해라'며 싸우기도 했죠. 혼자 고민을 하다 그래도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싶어 얼떨결에 따라왔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성격이 모질었으면 안 왔을 겁니다."

어릴 적 외가에 가야 겨우 벼농사 짓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는 미숙 씨는 농촌 실정을 몰랐으니 겁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이 있고, 애가 있으니 가 보자고 마음먹었는데 현실은 너무 달랐단다.

조용히 듣던 용철 씨가 '집사람이 착하다'라고 에둘러 고마움을 표한다. 미숙 씨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뭘 모르니 겁이 없었죠. 시골 실정을 알았더라면 안 왔을 겁니다. 그래도 이곳이 살만하다고 느끼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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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숙 씨./김구연 기자

농촌 생활 어려움 생활개선회 활동으로 극복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에서 생활하다 시댁이라는, 더더욱 낯선 시골에 온 미숙 씨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고역이었다.

"애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오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흙과 산밖에 없었습니다. 동네 주민들을 만나면 나는 그들을 잘 모르지만 그분들은 내가 뉘 집 며느리라는 걸 당연히 알죠. 처신하는 데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런 미숙 씨의 마음을 다잡은 것은 '생활개선회'였다. 시누이(용철 씨 누나)가 인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생활개선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미숙 씨가 안쓰럽게 보여 많이 챙겨줬다고 했다.

"친구도 없는 데다 매일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걸 보고 생활개선회 모임에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시골 정서도 알게 됐죠. 내가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50대가 주축인 시골 마을에서 서른 살 새댁은 그들에겐 딸과 같은 존재였다. 교육에다 봉사활동 등 아주머니들은 새댁을 데리고 다녔다. 정신없이 그들을 따라다니던 미숙 씨는 어느 순간, 이 생활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도 얻을 수 있었고,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단다.

"열심히 따라다니며 일했습니다. 그땐 내가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으니까요. 그 모습이 예뻐 보였던지 적중면 생활개선회 임원을 맡게 됐고, 나중에는 합천군 생활개선회 사무국장으로 추천하더군요. 그렇게 사무국장을 맡은 것이 벌써 7년째입니다.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활달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자 같던 내 존재가 뚜렷해졌고, 분위기가 점차 내 위주로 움직이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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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숙·이용철 부부./김구연 기자

3000평 딸기농장, 하늘이 농사 반 지어

부부는 약 1만㎡(3000평) 비닐하우스 9개 동에서 딸기를 수경재배한다. 9월에 모종을 심어 이듬해 5월 말까지 수확한단다. 벌이는 괜찮을까?

"많은 돈을 벌고자 농사짓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찾아다니면서 농사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벼농사는 아예 짓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수익은 제법 됩니다. 2억 원 정도. 투자비를 빼도 억대를 넘을 것입니다."

물음에 한동안 웃음으로 얼버무리던 용철 씨가 농사는 하늘이 반 이상을 지어준다며 재미있는 말을 한다.

"이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올해처럼 태풍 등 자연재해가 없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죠. 여긴 다른 지역보다 유독 돌풍 등 자연재해에 취약한 곳이더라고요. 다른 지역은 멀쩡한데도 이곳은 돌풍이 잦아 한 번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면 하우스가 주저앉곤 했습니다."

누구나 쉽게 고소득을 올릴 것이라는 헛된 꿈을 갖고 귀농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용철 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경제적으로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귀농해 채 기반도 잡기 전 5년 사이에 태풍을 세 개나 맞았습니다. 2003년 매미부터 루사 등으로 하우스가 폭삭 내려앉았죠. 당시엔 토마토를 재배했는데 막 수확하려는 찰나 태풍이 닥쳐 한 푼도 건지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부 태풍피해 지원(보상)은 시설비 50%만 해 줄 뿐 농작물 피해보상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는 전부 빚이었죠. 빚이 수억 원이 됐습니다."

당시를 떠올린 용철 씨가 잠시 말을 멈추자 미숙 씨가 이야기를 잇는다.

"내가 자연재해를 막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안타까운 마음에 태풍이 몰아치는데도 밖에서 발만 동동거렸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주저앉은 비닐하우스 밑으로 익은 토마토가 보이기에 아까워 따냈더니 남편이 구박을 하더라고요. 그걸 뭣 하러 따느냐고…. 가슴이 아렸습니다."

"지난 2008년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멜론을 심었는데 갑자기 우박이 떨어졌죠. 비닐하우스이다 보니 우박이 멜론을 그냥 때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멜론이 멀쩡한데 부딪히는 충격에 멜론에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죠. 이런 멜론은 상품으로 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고스란히 우박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몇 년간 태풍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토마토보다 가격변동폭이 덜한 딸기로 작목을 바꾼 것도 주효했다. 덕분에 작년에서야 그동안 졌던 빚을 겨우 다 갚았지만 또 어느 해에 태풍이 올지 알 수 없어 마음 졸일 수밖에 없단다. 용철 씨가 '농사는 하늘이 반 이상 짓는다'라고 말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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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숙·이용철 부부./김구연 기자

판로 고민하다 교육농장까지 연결

농작물은 아무리 잘 지어도 판로를 뚫지 못하면 소득과 연결될 수 없다. 용철 씨 사정은 어땠을까?

"햇딸기를 수확할 땐 그나마 괜찮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어느 정도 수확을 하고 나면 팔 곳이 마땅찮았습니다. 판로를 다변화하지 못한 탓이었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귀농 전 도시에서 알던 사람들에게 연락해 따 가라고 하면서 체험농장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체험농장이라고 하지만 초기엔 도시 사람들에게 그냥 따 가라고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애지중지 기른 딸기를 마냥 따 가라고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적은 액수지만 체험비를 받아보자'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면서 수원 농촌진흥청의 2년 과정 심화과정까지 받고 현지심사를 통해 지난 2010년 농림부가 지정하는 농촌교육농장으로 인증받아 본격적으로 체험농장을 운영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경남에 체험농장이나 교육농장이 별로 없어 괜찮았죠. 유치원 등지에서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이 워낙 산골인 데다 대도시 주변에도 체험할 수 있는 교육농장 등이 많이 생기다 보니 재미없습니다. 미리 체험비용을 받는 게 아니다 보니 언제 체험하러 오겠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다 보면 중간에 다른 곳으로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지리적 여건 탓이었다. 지금은 합천지역과 기존에 알던 도시 유치원 등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수익은 별로 많지 않단다. 그나마 내년부터 중학교에 자유학기제가 시행되는 데다 요즘 초중고 기본 교육과정에 체험관련 프로그램이 많아 연계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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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숙·이용철 부부./김구연 기자

미숙 씨 마음속에서 옅어져 가는 '탈농촌'

"모든 일은 마음먹기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 오고 3년쯤 되니 고비였습니다. 그런데 그 3년을 지내고 5년가량 지나니 마음이 바뀌었죠. 어차피 여기에 왔고, 살아가야 하며, 나갈 방법이 없는데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습니다. 이럴 바에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농사에도 적극적으로 덤벼들었습니다. 공부도 하고 농촌진흥청 사이버 작물교육도 받고…. 나를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때부터 시골과 타협을 했죠. 내가 널 보듬어줄 테니 나를 좀 도와달라고."

그렇다고 미숙 씨 마음속에서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힘든 시절 미숙 씨는 종종 용철 씨를 졸라 '탈농촌'을 했단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남편을 졸라 나갔던 곳이 마산 창동시내였습니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그들의 일원이 되어 쏘다니고 나면 그때는 속이 뚫리는 느낌이었죠. 당시만 해도 도시에서 다시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이 남아있어 대리만족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미숙 씨의 '외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만큼 농촌생활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었다는 방증이었다.

"어느 시기부터였는지 내가 도시로 나가는 것이 스트레스를 풀러 가는 것이 아닌, 잠깐 일을 보러 갔다가 급히 되돌아오는 사람이 돼 있더군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에 가도 이전처럼 큰 설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지금은 도시로 나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사는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겠죠. 무게 추로 따지자면 이곳 농촌생활이 더 무겁게 다가와 있는 것 같습니다."

미숙 씨는 농촌생활에서 새로운 재미를 얻었다. 애들이 학교를 마치고 농장에 와서 딸기를 따 먹으며 '엄마가 농사지은 딸기가 가장 맛있다'라고 말할 때 귀촌을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또 부부가 기른 딸기를 다른 사람들이 맛있다고 전화해 줬을 때 가장 좋단다. 농사를 지으면서 얻게 된 일종의 보너스였다.

귀농·귀촌, 처음부터 분명한 합의 있어야

"농사는 공산품처럼 물건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변수가 많은 상품이죠. 간혹 귀농·귀촌하는 분들이 간과하는 게 있는데 도시에서 전화 주문하면 즉시 배달되는 치킨이나 피자 같은 상품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도시 사람들은 자기 돈 주고 사 먹으니 똑같은 개념일 수 있겠지만 농사는 마음먹은 대로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긴 시간 동안 참고 견디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인터뷰 말미에 용철 씨에게 귀농·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이 참고할만한 점을 들려달라고 했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때와는 달리 정색을 하며 말한다.

"많은 사람이 시골에 와서 적응 못 하는 경우를 봅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한 사람의 고집으로 귀농·귀촌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가족끼리, 부부끼리 반드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준비기간을 거쳐 현장에서 경험해 보는 게 제일 좋습니다. 연고지역이 아니면 더더욱 그렇죠. 사람도 사귀고 작물을 배워야 실패가 없습니다. 돈만 가지고 와서 농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우린 특별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사람이 분위기상 크게 반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미안하죠."

다시 용철 씨가 미숙 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내보인다. 마주 보는 미숙 씨와 용철 씨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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