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찾아 떠난 소년, 꿈을 이룬 것에 대한 보답

*아너소사이아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

"부유한 집에서 자라서 별 고생 없이 살았어예.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 뿐입니더. 그렇다고 뭐 표나게 내세울 것도 없어예. 인터뷰 깜도 안 되는데…."

지난 5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기부를 약정하면서 53번째 경남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이용진(62) 금정농장 대표. 양산지역 최초의 회원이다. 거창한 일도 아니며 평범한 사람이라 내세울 것도 없다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의 나눔에 대한 생각은 남달랐다.

"그냥 뭐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양산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는 이용진 대표. 그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3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사업을 하시던 할아버지, 아버지 덕에 그는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냥 무난하게 자랐지예. 아버지께서 할아버지가 하시던 아이스크림 회사를 물려받아서 운영했는데 덕분에 잘 살았어예. 초량동에서 나고 자랐는데 당시에도 문만 열면 아스팔트가 포장돼 있는, 부산에서도 말 그대로 부촌에서 살았어예. 어린 시절 특별히 힘들었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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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금정농장 대표./박일호 기자

그는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부산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출신학교 이력을 보면 특별할 것이 없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수재였거나 특출한 재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산업화로 바뀌는 시기에 그것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 혜택을 받았다면 고위 관료나 사업가, 법률가, 의사 등 유망 직종을 선택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그는 농부가 꿈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축을 키우는 축산 농부. 일반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유별난 꿈일 수밖에 없다.

"그냥저냥 공부해서 부산대 물리학에 억지로 들어갔지예. 공부를 못했어예. 졸업을 했지만 물리에 대해 아는 거는 전혀 없습니더. 그거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는 마이소. 허허. 저는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농부가 되고 싶었어예. 딱히 왜 농부가 되고자 꿈을 키웠는지 그 계기는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더. 그냥 동물이 너무 좋았어예. 특히 말이나 소, 돼지처럼 큰 동물이 좋았습니더.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친가나 외가, 먼 친척 중에도 축산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었어예. 주변 친구집도 물론이고예. 막연한 기대나 향수, 노스탤지어 뭐 이런 거였나? 허허.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끌리더라고예. 수의사나 이런 쪽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축산을 하고 싶다는 데 꽂혀 있었습니더. 허허. 남들도 이해를 못하지예."

그는 농과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결국 성적과 부모님 기대에 맞춰 타협한 것이 부산대학교 물리학과였다.

"아무래도 농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자율적인 의사를 존중해주던 집안 문화 때문이라는 생각은 듭니더. 저희 형제들만 봐도 경영학과, 가정학과, 체육학과 등 다 자신이 원하는 학과로 갔습니더. 근데 제게는 농과대학 진학은 안 된다고 하셨어예. 그래서 성적에 맞춰 타협해서 간 데가 부산대입니더."

이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진로문제를 두고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학교 졸업하고 군대를 갔습니더. 군대도 부산에서 편하게 복무했어예. 그때는 고등학교·대학교에서 교련을 하면 그만큼 군 복무 기간이 단축됐는데…. 저는 1년 조금 넘게 복무하고 제대를 했지예. 보통 군대 마치고 대학 졸업하면 27살이잖아요. 저는 초등학교도 1년 일찍 들어간 덕에 제대를 하니 24살이더라고예. 그런데 그때부터 뭘 해야 할지 다시 고민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도 갈등을 좀 겪었지예."

꿈을 찾아 떠난 길

이 대표는 고민 끝에 자신의 꿈을 따르는 길이 옳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축산 농부의 꿈. 아버지 반대가 있었지만 그 꿈을 위해 발을 내딛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덕분이었다. 젊었기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었고 망해도 아버지라는 기댈 언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단이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지금 양계장이 있는 이곳 땅을 64년인가에 사 두셨어예. 재테크 차원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한 10만㎡(3만 평) 정도 됩니더. 아버지에게 '젊을 때 꼭 해보고 싶다'고 사정을 했습니더. 부모님은 고생길이 뻔한데 자꾸 가려 하니 속이 탔겠지예. 실패하면 아버지 뜻대로 직장을 찾겠다고 약속해서 설득했습니더. 결국 제 선택을 믿어 주시더라고예. 그렇게 해서 무턱대고 시작을 하게 된 것이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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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금정농장 대표./박일호 기자

처음 시작은 양계장이 아니라 젖소농장이었다. 성공해서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밑천도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아버지 돈으로 축사 짓고, 소를 사서 시작했지예. 나중에는 한 54마리까지 늘려나갔습니더. 막상 시작을 하니 정신적으로는 편한데 몸이 너무 고단하더라고예. 소똥 치우고, 사료 주고, 젖 짜고 하는 일들이 실제 농촌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는 게임도 아니지예. 그런데 제대로 힘을 써본 적이 없는 제게는 힘든 일이었어예. 처음에 몇 마리만 젖을 짜서 우유를 생산할 때는 경운기로 실어서 원동역에 보내고, 거기서 기차로 구포역에 보내 집유차로 옮겨 부산우유에 납품을 했습니더. 그런데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감당이 안 되더라고예. 들어오시면서 보셨겠지만 농장 앞에 하천이 있잖아예. 그때는 거기에 다리가 없었어예. 그러니 집유차가 못 들어오고 우유를 옮기는 게 힘들 뿐 아니라 운송료 부담도 많고 수지타산이 안 맞지예. 그 이유로 2년 하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하게 됐습니더."

결국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그는 도시로 나가 취직을 하게 된다. 그때는 3년만 하고 다시 추슬러서 농사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그 기간은 점점 늘어만 갔다.

"총각 혼자서 농사짓는데 누가 시집올라 합니꺼. 이런저런 이유로 아버지 시키는 대로 부산에 나와서 현대해상에 취직을 해서 다녔습니더. 그러면서 집사람을 만나서 연애하다 결혼했지예. 아내 이름은 권영귀(59) 입니더. 저보다 3살이 적은데 80년 제 나이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지예.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고 살면서 처음에 3년만 하고 그만두겠다는 것이 5년, 10년이 지나고…. 뜻밖에 직장일도 재미있었고예. 13년 되던 때 제가 차장으로 승진을 했는데, 더 가면 되돌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예. 그래서 1991년 2월 사표부터 냈습니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시던 아버지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퇴직금 받은 게 한 2000만 원 됐나. 소를 키우기에는 턱도 없더라고예. 그래서 돼지를 키우려고 군청에 허가를 내러 갔는데 당시 낙동강 수질오염 논란 탓에 돼지농장은 허가가 안 난다고 하더라고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고, 앞이 막막하더라고예. 며칠 고민하다 다시 찾아가서 물었어요. '그럼 뭐가 가능하냐고?' 그랬더니 양계장만 된다고 해서 궤도를 수정했습니더. 허허. 뭐 닭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됐지예."

그러나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다. 닭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지식도 백지상태였지만, 자금도 문제였다.

"퇴직금에다 집을 담보 잡아 대출하고, 모자라는 돈은 어머니에게 사정사정해서 빌렸습니더. 물론 그때도 어머니는 반대하셨지예.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또 힘든 일 하려 한다니 얼마나 걱정이 되셨겠습니꺼. 그래도 일은 저질러 놓았고 불효인 줄 알지만 돈을 빌렸지예. 그 담에 곧장 오경농장으로 찾아갔습니더. 양산 상북면에 있는 유명한 산란계 대형농장인데…. 막무가내로 찾아가서 가르쳐달라고 졸랐지예. 하나하나 물어보고 또 일도 도와주면서 배웠습니더. 허허. 체면이고 뭐고 있습니꺼. 벼랑 끝에 선 놈이 뭘 따지겠습니꺼."

쉽지 않은 현실의 벽

1991년 3월 그는 결국 양산시 원동면 원리에서 닭 1만 마리로 양계농장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사실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고난의 시작이라고 표현했다.

"어떻게 어떻게 주먹구구식으로 배우고 겨우 시작할 만큼의 돈으로 농장을 꾸렸지예. 당시에 최신식으로 양계장을 지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완전 수동이지예. 손으로 계란을 줍고, 닭똥도 다 삽으로 치우고…. 한 부부를 고용해서 그 사람들이 전적으로 일을 도와줬지만 그래도 참 힘들더라고예. 그것보다는 더 문제는 돈이었어예. 바로 소득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한동안 납품처를 뚫어야 하니….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더라고예. 농사를 지으러 온 것인지 돈 빌리러 다니는 빚쟁이 되려고 온 것인지….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지인들에게 돈을 융통하러 다니기 바빴습니더. 맘고생이 심했고, 편하게 자라서 그런지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예."

당시 양계농업도 산업화, 고도화하면서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 앞다퉈 규모를 키워가던 시기였다. 당연히 재래식으로 달걀을 생산하는 농가는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표도 이러한 급류 속에서 살아남고자 지속적인 투자를 해야 했지만 자본력이 부족한 그에게는 두 배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말까 발버둥 치는 시기에 양계농업에도 변혁기가 찾아온 겁니더. 예전 방식으로는 남는 게 없는 실정이었지예. 물론 처음 시작할 때 점점 대규모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시작했지만, 제 계획에 따른 게 아니라 환경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 더 힘들지예. 번 돈은 아끼고 아껴서 생활비 정도 충당하고 나머지는 계속 투자하고, 그것을 담보로 또 대출하거나 리스로 시설을 확대해 나갔습니더. 한 10년까지는 정신없이 지냈어예. 돈이 쪼들리다 보니 언제 어떤 일이 터질까 항상 살얼음판이었지예. 정확히 계산을 안 해봤지만 시설에 최소 10억 정도 투자한 것 같습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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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금정농장 대표./박일호 기자

그의 말처럼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고난이 아니다. 문제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뭔지도 잘 몰랐지예. 그런데 2003년인가 양산에서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했습니더. 상북면 일대에 산란계 농장이 밀집해 있는데 그곳에서 발생을 했어예. 여기서 한 20㎞ 정도 떨어진 곳인데…. 소비가 급격히 줄면서 달걀값이 엄청나게 떨어지더라고예. 한 18개월 적자가 계속됐는데 말도 못 합니더. 사룟값 감당은 안 되지, 조류인플루엔자 예방하느라 밤낮으로 방역해야지…. 대출금을 제때 못 갚으니 조합에서 사고처리 하겠다고 하더라고예. 딱 죽겠더라고예. 막말로 나중에는 차라리 조류인플루엔자 걸렸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대예. 지금도 그렇지만 조류인플루엔자 걸려서 매몰 처리해서 보상을 받아도 손해는 안 나거든예. 그렇다고 자식 같은 닭 수만 마리를 산 채로 묻는 것은 더 못할 짓이지예. 그때는 꿈에서도 돈 빌리러 다니고, 또 어떻게 하면 돈을 빌릴 수 있을까 자면서도 생각을 하고 그랬어예. 허허."

그렇게 18개월 연속 적자 이후 농장은 안정세를 찾았고 그동안 고통을 견뎌낸 '보상'을 받게 된다.

"그때 양산에도 리스 비용·대출금 회수 못 견디고 손든 사람이 많습니더. 딱 18개월 어려움을 견디니 달걀값이 예전보다 더 오르면서 반대로 18개월 연속 흑자를 냈습니더. 다시 소비가 회복되는데 조류인플루엔자 때 묻은 닭이 많다 보니 공급량을 달리면서 그렇게 됐지예. 그때는 재미 좀 봤습니더."

이 대표가 운영하는 금정농장은 현재 닭 10만 마리를 키운다. 하루 평균 5만 8000개 달걀이 생산된다. 농장 설립 이후 24년이 지난 지금 한 해 매출은 20억 원에 이른다. 생산된 달걀은 부림농장 계란이라는 상표로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있다. 특히 이 대표는 달걀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지난 5월에는 농협이 선정한 우수 농장이 됐다.

"달걀 사료에서부터 생산, 보존, 유통의 전 단계 해로운 요소를 관리하는 해썹(HACCP) 인증과 친환경 무항생제 농장 인증을 받았습니더. 이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식구가 먹는 먹거리라 생각하고 정말 안전하고 품질 좋은 달걀을 생산하고 있습니더. 당연히 맛도 좋고예.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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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 금정농장 대표./박일호 기자

"그동안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죠"

이용진 대표는 지난 5월 20일 경남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2012년부터는 자신과 같은 꿈을 가진 농학도를 위해 부산대학교 농과대학에 매년 100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최근에는 밀양에 있는 부산대 농대 쪽에 장학금을 조금씩 보태고 있습니더. 농사를 지어본 사람으로서 농업의 중요성을 잘 알지예. 그런데 국가가 관심을 적게 두면서 크게 발전을 못 하고 있습니더. 농업도 옛날과 달리 생명자원산업이라 중요하거든예. 그런데 선진국하고는 너무 격차가 심합니더. 농업이 우리 사회에서 주목을 못 받으니 당연히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도 힘들고예. 그래서 후배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차원에서 장학금을 전하고 있습니더."

그는 아너소사이어티 가입과 장학금 전달에 대해 평소에 가져온 소신이었다고 밝혔다.

"뭐 거창한 뜻은 없습니더. 그렇다고 제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예. 저희 농장 정도면 중상급 규모에 해당합니더. 그냥 계란 가격이 좀 괜찮으면 약간 이익이 생기는 그 정도지예. 꼭 이유를 찾는다면 그동안 제가 받았던 것에 대한 보답입니더. 저는 남들보다 유복한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고, 농장도 주변 지원을 받아서 시작한 거고…. 제가 한 것이라고는 안 망하고 지킨 것 정도 뿐이지예. 허허. 그러니 지금까지 잘 살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입니더. 주위에 분들과 가정, 사회 모두 도움을 받았으니까예. 특히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셨지만 부모님에게는 불효였지예. 편안한 길 마다하고 고집을 피우니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항상 맘을 졸이지 않았겠습니꺼. 이제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그에 대한 보답의 뜻도 있고예. 그런 도움으로 제가 하고 싶었던 꿈을 이룬 것 아닙니꺼. 물론 남들이 보면 많이 미흡하겠지만…. 뭐 그 정도 입니더. 대단한 뜻도 없고예. 그런데 어떻게 보답하고 도움 줄지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니 전문기관인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전달했습니더. 신문에서 보고예."

담백하고 겸손하게, 꾸밈없이 대답했지만 그는 작은 도움들이 모여 더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부모님을 비롯해 제가 만약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이만큼 이룰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합니더. 그만큼 없는 사람들은 기회도 얻지 못 하고 소외받고 힘들겠지예. 그러니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고예. 제가 충고할 입장은 못되지만 그 힘든 시기를 잘 이기고 다시 발판을 마련해 시도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분들입니더. 그런 과정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나누는 것이고…. 또 도움을 받아 성공한 사람들이 다시 힘든 이웃을 돕고 그렇게 하면 좋은 세상이 안 되겠어예?"

그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이 조금씩 모였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한동안 달걀값도 괜찮아 양계농장 하시는 분 중에도 돈을 억수로 벌었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예. 자랑만 하지 말고 봉사도 좀 했으면 합니더. 이런 이야기 하면 욕먹으려나 허허. 제가 양산에서는 첫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라 들었는데 양산지역에서도 이어졌으면 합니더. 아무튼 주변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남아서, 자기 보람만 느끼고자 하는 건 아니잖아예. 그분들 다 나보다 더 바쁜 사람 아닙니꺼. 시간을 쪼개서 하는 거지예. 그러니 몸으로 하든, 지식으로 하든, 돈으로 하든 각자 위치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기부하고 봉사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더."

그는 이번 기부에 대해 '이제 시작을 해본 것'이라며 여력이 된다면 꾸준히 확대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기부, 봉사, 나눔 뭐 이런 것에 대해 잘 모릅니더. 저도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시작해본 것이니까예. 양계장 운영에 큰 타격 없이 이윤이 생긴다면 계속해서 남을 돕고 싶은 생각입니더. 그리고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아들이 농장을 맡아서 가업을 이었으면 하는데…. 그놈은 별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더. 국제변호사 돼서 나름의 방식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하는데…. 저는 농장 해서 돈 더 많이 벌어 실천하라고 말을 하지예. 제가 여행을 참 좋아하거든예. 그런데 여기 묶여 있다 보니 잘 안 되더라고예. 허허. 여생은 아내와 봉사하고 여행 다녔으면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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