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거제에 들어와 20여 년을 살면서 견내량을 수없이 드나들었건만 정작 대문 빗장 한 번 열어보지 못했구나.
바다를 건너 오른쪽 시래산 그늘이 움직이는 대로 어슬렁 걷다 보면 맞은편 우두봉 아래 바람막이숲을 두른 마을이 껄떡산, 이남등, 집등앞닥산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밖으로 에워싸 제법 큰 들을 차지하고 앉았다.
거제의 관문 오량성(烏壤城)이다.
뭍과 가장 가깝고 재물을 보관하고 길손이 거할 만한 곳이다. 조선 초 성에 오량역원을 두고 찰방이 관리하였으며 거제현과 고성현의 각 40리 지점 중간으로 중마 5필과 하마 5필에 역리 20명의 거제에서 유일한 역참 마을이다. 성은 석성이고 연산 6년에 오량보를 두어 축성하였으며 둘레 1122m, 높이가 7.4m이며 지방기념물 109호로 지정되었다.(거제지명총람, 거제문화원 발행 1996). 지금은 오량(烏良)으로 한자를 바꾸어 쓰고 있지만 한자 말뜻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안장이나 길마를 소나 말 위에 지울 적에 움직이지 않게 배를 둘러 조르는 줄을 뱃대끈 또는 오랑이라 한다. 역참의 제일 마지막이고 시작인 이곳에서 역마를 교체하고 다시 안장과 갈마를 장착하여 나서는 곳이라는 뜻에서 오랑을 한자어 오량(烏壤)의 음을 빌려 쓴 것이다.
그럼 이제 성돌이를 나서 볼까?
섬에 들어 처음 마주치는 곳이 오량성 서문이다. 영기(令旗)를 매단 파발마가 들이닥치며 "영을 받들라!"고 소리쳤을 성루는 간데없고 성벽 높이만큼 포장된 아스팔트 신작로가 휑하니 뚫려있다.
"옛날 어떤 나무꾼이 나무를 한 짐 지고 껄떡산을 들숨 날숨 오르다가 바위너설에서 도끼를 떨어뜨렸더란다. 짐을 받쳐놓고 아무리 찾아도 도끼가 없어. 그래 다시 짐을 지고 가려는데 저 아래 쪽에서 '떨거덕 떨거덕' 도끼가 걸어가더란다. 짐을 내려놓고 가보니 온데간데없어 체념하고 올라와서 짐을 지고 가는데 또 저 밑에서 떨거덕거리고 가는 거라 밤새 나뭇짐을 졌다 벗었다 하는 통에 기진해 쓰러진 사람을 새벽에 들일 나갔던 사람이 보고 살렸다는데 그 뒤로 저기 저 산을 껄떡산이라 하고 저기 저 바위너설 보이제? 저기를 떨거덕 너설이라 했단다."
어르신은 꼭 당신이 며칠 전에 직접 겪었던 일인 양 열연하신다. '저 밑에' 한 마디도 '저어~밑 개골창 너설 어둑선한데' 하시며 표정까지… 오소소 소름 돋게 실감 난다.
남문을 지나 동문 쪽으로 가면 성곽의 원형은 남아 있지만 높이가 낮고 잡초가 우거져 논둑인지 얼핏 보면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여기도 근현대사의 아픔이 배어있다. 한국전쟁 때 포로수용소를 짓기 위해 성곽을 허물어 그 돌을 고현으로 가져갔단다. 큰 돌은 땟마(전마선)로 작은 돌은 사람이 이고지고 날랐다. 서문으로 들어와 동문으로 나가는 큰길은 절골을 지나 고현으로 통한다. 그 길로 부역에 동원되어 마을의 성을 헐어 날랐다고 했다.
북문 쪽의 성벽은 높이도 높고 대체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성 안쪽은 계단식으로 쌓아 수비하기 용이하게 만들었다. 성을 함께 돌던 마을 이장 김광조(76) 씨는 서문을 통해 뭍으로 물자나 사람이 드나드는데 이곳에서 남문으로는 거제, 둔덕, 남부면으로 닿고 동문으로는 고현, 옥포, 장승포를 이으며 북문으로 하청, 장목진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요지였다고 자랑한다.
성내마을 골목길을 되짚어 나온 동문 옆 성곽 위에서 풍구질(풍구로 곡물에 섞인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을 하는 할머니가 검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할무이 지금 뭐하십니꺼?"
"보모 모리나. 불매질 한다 아이가."
"아이고, 그거 추슬러서 한 됫박도 안나올 건데 뭐하러 이 고생을 하십니꺼."
"그 아재 되잖은 소리 마소. 북디기 털어서 삼정승 육판서 낸다는 옛말이 있소."
인사 붙임으로 한 마디 건네다가 된통 맞는다.
"거 옛날 이약 해도라 하면서 사진은 뭣할라 박소?"
그건 아니고요. 거제도 지명에 얽힌 전설 어쩌고저쩌고 장황하게 늘어놓는데 한 마디로 오금을 박는다.
"참, 팔자도 좋소."
성함과 연세를 물었더니
"그런 거 알아 뭐할라고? 아나 사진이나 박아가라. 요기에 옛날 이약이 다 씌여 있다 아이가."
할머니 농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량성을 나와 14번 국도를 따라 북문 앞으로 넘어가는 오성골 고개를 오르면 굴 양식장의 부표 꽃밭이 만발한 바다에 마치 여인의 앞가슴과도 같이 생긴 나란히 떠 있는 섬이 있다. 지나가면서 계속 보고 있으면 위치에 따라 섬 모양이 여러 가지로 바뀌는 재미있는 섬이지만 애틋한 전설도 간직한 섬이다.
"아주 먼 옛날, 맞은편 마을에 형제가 살고 있었더란다. 형제에게는 홀어머니가 있었는데 불치의 병으로 여러 해 앓고 있었더래. 옛날이야기가 다 그렀듯 이 집도 몹시 가난해. 봄이 왔는데 먹을 건 없고 어머니는 아프고 하니 이 형제 둘이 뭍으로 동냥을 간 거라. 섬보다야들이 너른 뭍이 양식 구하기 났겠다 싶어 쪽배를 타고 고성으로 건너가 용케도 보리쌀 한 자루를 구걸해서 돌아오는데 이때가 음력 2월로 용왕 먹이는 달이라 해서 바다가 험하고 거제 똥바람이 장난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