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리 갯길 따라 걷는 거제 섬이야기]

사람 살 곳 못 되는 유형의 땅

40여 년 가까이 나고 자란 고향 진주를 떠나 거제도에서 살아온 지도 20년이 다 되어가니 고향살이 절반 세월이 흘렀다. 무슨 피난 가듯 무작정 찾아들었던 곳, 참 낯설고 물설었다. 정붙이려 애를 쓰다 보니 인력 시장에서 손에 익지 않은 막노동일로 거제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주워듣고 본 것이 이제 반 거제사람을 만들었다.

해마다 휴가철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부대끼지 않는 거제의 절경을 소개해 달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런 곳이 있다면 나부터 찾아 쉬고 싶다는 퉁을 주면서 바다를 끼고 갯길따라 섬을 한 바퀴 돌아보라고 권한다.

제주도보다 크기는 작은 섬이지만 호떡같이 생긴 제주도보다 뜯어놓은 수제비처럼 생긴 거제도가 해안선의 길이는 훨씬 더 길다. 그렇기에 숨은 절경과 아린 역사, 잊힌 옛이야기들을 쉼 없이 만날 수 있다.

거제도의 섬, 마을이나 산, 들판의 이름을 보면 다른 지방에서 같은 이름들을 쓰는 곳이 많은데 이는 모두 거제 사람들의 아픈 삶이 배어있는 이름들이다. 바다와 산, 들녘이 모두 풍족한 곳이지만 조선 초기까지 여기는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유형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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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도 갯길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땅에 속했으며 독로국이라 부르고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지만 둔덕, 사등, 일운면 등지에서 발견된 많은 고인돌 유적으로 보아 선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터를 일구고 살았다. 신라시대 문무왕 때에는 여덟 폭의 치마같이 아름답다하여 상군(裳郡)이라 하였으며, 신문왕 때에는 상주군(尙州郡)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때 처음으로 바다 건너 큰 섬이라는 뜻으로 거제군(巨濟郡)이라 이름 하였다. 고려 성종 때에는 동쪽으로 국사봉, 남쪽으로 노자산, 북쪽으로 대금산으로 지맥이 세 갈래로 나누어진 지형지세에 따라 기성현(岐城縣)이라 하였는데 거제현(巨濟縣)으로 다시 불려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원종 때 왜구의 침범이 심하여 거제현이 거창군 가조현으로, 명진현이 진주목 영선현으로 피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무려 수십 차례에 걸친 왜구 침범으로 이 섬은 그들의 소굴이 되어 폐허가 되었다.

조선시대 태종 14년 피난 중 거창현과 합쳐 제창군(濟昌郡)이라 이름하였으며 1419년(세종 원년) 상왕 태종이 왜적의 침공을 없애기 위해 이종무를 대마도에 출정시켜 왜구와 해적을 정벌하였다.

지금은 부산과 연결되는 거가대교가 있어 섬으로 들어오기가 한결 쉬워졌지만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인근의 진주나 마산에서조차 두세 시간씩 걸리는 머나먼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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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거제대교 외쪽 가조도와 멀리 칠천도가 보이고 굴 양식장의 하얀 부표들이 바다에 핀 목화꽃처럼 흐드러졌다.

앞으로 얼마가 걸릴지 쉬엄쉬엄, 기막힌 경치 보면 게서 막걸리 한잔 하고 기막힌 길동무 만나면 또 게서 막걸리 한잔 하며 '옛이야기 너울지는 갯길 칠백 리'를 톺아보련다. 가장 가까운 뭍인 통영에서 이곳 섬으로 건너와 쫍조름한 바다 내음에 취하고 산새 전해주는 지저귐을 들으며 떠나 보자.

한산대첩의 일등공신 견내량

땅끝에서 섬을 바라보고 섰다. 전설처럼 바닷속에서 솟아오른 것인지 어디서 떠내려오다 저곳에 자리 잡은 것인지 섬이 저만큼에서 봉우리 두엇 뽑아 올린 산자락을 뭍으로 내밀어 바라보고 있다.

끝내 뭍 기슭에 산자락을 잇지 못한 섬은 갇혀버린 유형의 땅, 보호받지 못한 잊힌 땅이었다. 뭍을 동경하는 마음이사 훌쩍 건너갈 것 같은데 그러나 바다가 흐른다. 섬을 만든 바다가 울부짖으며 세차게 흐른다. 견내량(見乃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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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으로 내민 산자락이 미처 뻗치지 못하고 섬끝이 된 거제 견내량마을.

지금은 부산을 잇는 거가대교와 신·구 거제대교가 있어 뭍으로 섬으로 내달리고 있지만 불과 40여 년 전에는 뗏목이나 도선을 이용해 뭍으로 오가던 길목이다. 뭍과 가장 가까이 있는 좁은 바닷길인 견내량은 물살이 거칠고 험하지만 부산, 마산 쪽에서 한바다로 돌아 나가지 않고 남해, 호남 쪽으로 빠질 수 있는 지름 물길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잔잔해 보이지만 방파제 끝 빨간 등대 앞에 서면 엎치고 뒤집히며 소리 내어 흐르는 물길이 호호탕탕하다.

어디서나 그렇듯 견내량도 차를 타고 볼 수 없다. 걸어야 물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고 이야기도 보인다. 14번 국도를 따라 거제로 향하다 신 거제대교 입구 통영타워 주차장에 차를 두고 전망대에 오르면 좌측의 거제 가조도, 칠천도에서 우측의 통영 한산도 일대까지 견내량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비릿한 바닷바람 맞으며 건너는 신 거제대교 왼편 바다 위로 굴 양식 부표들이 메밀꽃밭 같다.

섬에서 다시 구 거제대교를 건너온다. 다리가 낮고 통행량도 적어 걸음 구경하기는 딱 좋다. 거제 사등면의 견내량 마을에는 수산물 가공장이나 치어·치패 양식장이 있어 마을은 활기 넘치는데 정작 초등학교는 비어 있다.

통영 용남면 이름 요상한 유방 마을, 지금은 견유 마을로 바뀌었지만 유방산, 유방횟집, 유방선착장 등의 옛 이름 흔적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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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견내량의 견유(유방)마을. 구 거제대교와 전설속의 방파제.

"어르신, 동네 이름이 와 유방…입니꺼?"

선착장 입구에서 호래기 안주로 술추렴을 하던 동네 분들이 왁자하니 웃는다.

"사진기도 없는 거 보이 신문쟁이도 아인거 같은데 그거는 와 묻소?"

"예… 그 왜 하필 유방이라 캤는지…"

"젖퉁이 동네라 할 수는 없다 아이가."

"옛날 옛적 갓날 갓적에 저기 동네 뒷산을 짊어지고 '갯내량'을 훌쩍훌쩍 뛰넘어 댕기던 '유방'이라카는 장사가 여게 살았더란다. 그 장사가 한 날부터 갯내량에 한 발 담구고 한 팔을 뻗어 오가는 배를 막아놓고는 통행세를 걷기 시작했는데 그 통행세를 뭘로 받았는고 하니 돈도 쌀도 아니고 볏섬만 한 돌덩거리를 하나썩 바치라 캤는기라."

"돌덩거리 받아 머할라꼬예?"

"어허~ 여름 홑이불에 풋좆 튀나오디끼 나서지 말고 들어바라. 유방 장사가 통행세로 걷은 그 돌로 저 앞에 방파제를 쌓아 여게를 포구로 만들어가 풍랑을 만난 배들이 이리 들어와 피하기도 하고 뱃일도 걱정 없이 하도록 해준기라. 저 봐라 올매나 얀다무치게 쌓았으면 언제적 이야긴지는 몰라도 이 거센 갯내 물길에도 까딱없다 아이가. 그래 이 동네를 그 장사 이름 따서 유방이라 하고 저 뒷산을 유방산이라 했단다."

오랜 전설을 뒤로하고 견내량 가운데 작은 섬 해간도로 간다. 예쁘장한 빨간 다리를 건너 들어간 해간도는 견내량 서쪽 통제영 앞바다에서 떠내려간 섬이라 해서 '간섬' 또는 '딴간섬'이라 불리어지기도 한다. 해간도에서 해무가 깔린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를 보니 이순신 장군의 한산 대첩은 유인 물길인 견내량이 일등 공신이지 싶다. 서쪽으로 나아가려는 왜선 앞에서 후퇴하다가 빠른 유속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적선을 해무 속에서 한산도 앞 너른 바다 가운데 학익진으로 에워싸고 두들겨 부시는 장면이 그려진다.

부패와 향락에 빠져 정중부의 난으로 거제 폐왕성으로 유폐되어 가는 고려 의종이 건넜다고 해서 전하도(殿下渡)라고도 불리는 견내량을 거제나 통영의 어르신들은 '갯내량'이라고 말한다. '갯내'는 바다 냇물이란 뜻이다. 즉 바다가 냇물처럼 빠르게 흐르는 곳이다. 재미난 것은 통영 분들은 '토영 갯내량'이라 하고 거제 분들은 곧 죽어도 '거제 갯내량'이다. 통영 어르신 앞에서 거제 갯내량 어쩌구 했다간 불벼락 맞는다. 1999년 신 거제대교 명칭을 두고도 통영과 거제가 티격태격했던 기억도 난다. 차라리 '갯내큰다리'가 더 어울리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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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으로 내민 산자락이 미치지 못하고 발이 잠기었다. 견내량 건너 거제 둔덕면 견내량 마을.

차에 올라 견내량을 뒤로하고 거제로 들어가며 유방마을 전설이 되짚어진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국민이 쌔빠지게 일해서 내는 세금, 유방 장사처럼 제대로 올바르게 쓰고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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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거제대교 왼쪽으로 가조도와 멀리 칠천도 사이로 굴 양식장의 하얀 부표들이 목화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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