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해주는 가족

휴일이 이어지면 안절부절 못한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마치 해야 할 숙제를 하지 않고 미뤄둔 느낌이랄까.

특히 연휴가 사흘 이상 이어지면 그 중 하루쯤은 반드시 모터사이클을 타고 콧바람을 쐬어야 한다. 안 그러면 무엇인가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재미있고 즐겁고자 사는 것인데, 나에게 재미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모터사이클을 타고 산하를 누비고 다는 것이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인데, 사흘씩이나 쉬는 기간에 단 하루조차도 나를 위해 쓸 수 없다면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연휴가 이어지면 가족들도 나의 그런 심정을 이해해준다. 아이들도 아빠가 휴일 이틀 중 하루, 혹은 사흘 중 하루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나가서 하루 종일 안 보이게 될 것이라는 걸 안다. 아내도 대략 그렇게 예상하고, 어느 날 모터사이클을 탈 것인지 묻기도 한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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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처럼 걷기에 편안한 노고단 오르는 길. /조재영 기자 jojy@idomin.com

 

이번 여행도 목적지는 지리산이다. 지리산에는 그 큰 덩치만큼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사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리산에 자주 가지만 비교적 큰길 위주로만 다니고, 주로 풍경을 눈으로 즐기며 달리기만 하기 때문에 안 가본 곳이 더 많다.

창원에서 일반도로를 이용해서 지리산으로 갈 때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은 함안, 의령, 산청으로 가는 길이다. 이번에는 출발을 조금 서둘렀다. 평소 산 타는 것을 즐기지 않는 편이어서 등산을 자주 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등산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말이 등산이지 사실을 조금 힘든 산책 수준이다. 지리산 횡단 도로를 따라 성삼재휴게소까지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서, 휴게소에서부터 걸어서 노고단에 올라보기로 계획을 잡았다. 그래서 자켓 안에 등산 티를 챙겨입고 트레킹하기에 편한 운동화를 챙겨 모터사이클 사이드백에 넣었다. 바지는 라이딩 진을 그대로 입고 갔다. 신축성이 좋은 데다 휴게소에 도착해서 무릎보호대만 빼버리면 산행에 전혀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에 올라서 먹을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고, 가는 중간 편의점에서 에너지 보충용으로 간단히 먹을 것도 샀다. 출발이다.

낯선 이름 생비량면

79번 국도를 타고 의령읍까지 가서 20번 국도로 대의면까지 간다. 대의면에서 33번 국도로 갈아타고 산청 쪽으로 달린다.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잠시 쉰다. 특이한 이름이다. 우리나라 행정구역 지명은 대체로 두 글자로 끝나는데 이 지역은 세 글자이면서도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단어로 조합된 지명이어서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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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휴천면의 다랭이논. 여물어가는 벼의 색이 형언할 수 없이 눈부시고 아름답다. /조재영 기자 jojy@idomin.com

 

생비량의 유래는 신라시대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량'이라는 덕망 높은 도승이 이 근방에 암자를 짓고 포교를 했다고 한다. 비량은 언제나 신도들과 주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그들을 돕고자 했다. 세월이 흘러 늙은 비량이 입적하자 주민들은 비량이 영원히 살아있다는 뜻으로 '생비량'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지역이 생비량으로 불렸다고 한다.

생비량면을 관통해서 흐르는 강이 있는데, 양천강이다. 양천강은 의령군 대의면과 산청군 신안면을 잇는 33번 국도와 나란히 달린다. 양천강은 신안에서 경호강과 합류한다. 한창 루어낚시에 빠져 있던 시기에 산청 경호강으로 쏘가리 낚시를 다녔었다. 그때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일반도로를 이용하게 되면 이곳 생비량면을 거쳐 가게 되고, 가끔 양천강에서도 건질만 한 게 있겠다 싶어 낚시질을 했었다.

양천강을 따라가다 보면 장란마을 앞에 강을 가로질러 보가 설치되어 있다. 장란보다. 장란보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오랜 옛날에도 양천강에는 보가 있었다. 하지만 물살이 너무 빨랐다. 보를 만들어 놓아도 큰 비만 내리면 번번이 물살에 휩쓸려 가버렸다. 어느 날 운창 이시분 선생의 꿈에 도인이 나타나 "나는 이곳 텃신인데 너희들이 실패를 거듭해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 가상하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의 숙원이 이뤄지도록 도와주겠다"며 강의 한 곳을 가리키며 그곳에다 보를 만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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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전설이 얽혀있는 장란보. /조재영 기자 jojy@idomin.com

 

다음 날 운창 선생이 강에 나가보니 도인이 가리킨 자리에 하얀 서리가 내려 마치 줄을 그어놓 듯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표지를 세우고 공사를 시작했지만 빠른 물살 때문에 보를 설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도깨비들이 마을에 몰려와서 메밀죽을 내놓으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집집이 메밀죽을 끓여서 도깨비들을 대접했다. 그랬더니 도깨비들이 달려들어 큰 바뒷돌을 굴려서 며칠 만에 폭 100m가 넘는 보를 만들었다. 그 뒤로 마을사람들은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고 잘 살게 되었다. 그런데 보의 한 지점에서만 꼭 탈이 났다. 아무리 큰 비가 와도 다른 곳은 멀쩡한데 그곳만 쉽게 물살에 떠내려갔다. 도깨비들이 마을 사람들한테 메밀죽을 대접받을 때 혼자 메밀죽을 얻어먹지 못한 도깨비가 심통이 나서 보를 만들 때 돌 한 개를 빼버렸는데, 항상 그곳에서 탈이 난 것이다. 그래서 인근에서는 이 보를 '도깨비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란보에서 잠시 쉬고 다시 지리산을 향해 달린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하늘은 높아지고 공기는 상쾌해진다. 산청 단성면에서 3번 국도로 바꿔 타고 경호강을 옆에 끼고 거슬러 올라가며 지리산 주변 풍경을 둘러보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사람 눈보다 좋은 카메라는 없다

생초에서 3번 국도에서 내린다. 세계한방엑스포가 열렸던 금서면을 지나 함양군 휴천면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지리산길 라이딩이 시작된다. 산모롱이를 돌고 돌고 또 돈다. 한 모롱이를 돌아나갈 때마다 눈 앞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그래서 지리산이 좋은가 싶다. 건너편 다랭이논에 나락이 익었다.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이다. 녹색도 아니고 연두색도, 노란색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황금빛이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황금빛처럼 탁하지 않다. 밝고 투명하게 빛나는 색이다. 눈이 부실 지경이다.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자란 실력 탓에 카메라에 담긴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못했다. 변명이지만 아무리 좋은 카메라도 사람 눈만큼은 못하다. 거기다가 사람은 가슴이라는 눈이 하나 더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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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휴게소와 노고단 중간쯤에 있는 대피소. 물과 간식을 구입하고 조리도 할 수 있다. /조재영 기자 jojy@idomin.com

 

함양 마천 지나고 전북 남원시 산내면으로 접어든다. 달궁, 심원마을을 거쳐 성삼재휴게소에 가까워졌는데 앞서 가는 차들이 거북이가 되었다. 사정을 보니 연휴에 성삼재에 지리산 구경 온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 성삼재 관통 도로 양방향이 엉켜버렸다. 도로 양쪽에 주차되어 있어 양방향 통행이 막혔고, 모터사이클도 빠져나갈 수 없는 형편이다. 하는 수 없이 길가에 모터사이클을 주차하고 등산 채비를 했다. 자켓과 부츠를 벗어 탑박스와 사이드백에 집어넣고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모자 쓰고 카메라 가방에 생수를 챙겨 넣었다. 트레킹 준비완료다.

알프스를 닮은 노고단

12시쯤에 휴게소에서 노고단을 향해 출발했다. 슬렁슬렁 걷는다. 약간 더운 듯했지만 상쾌했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은 자동차가 다닐 만큼 넓고 구불구불한 임도였는데 중간중간에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지름길이 설치되어 있다. 어차피 천천히 걷기 위해 온 것이니 바쁠 것도 없어 계단으로는 오르지 않고 편한 임도길을 따라 걷는다. 노고단 대피소에 이르기 전에 무넹기 전망대를 만난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계단을 타고 올랐기 때문에 이곳을 보지 못하고 가게 되는데 나는 느린 길을 선택한 덕분에 무넹기 전망대를 볼 수 있었다.

1929년 구례군 마산면에 큰 저수지를 준공했지만 물 유입량이 적어 저수지를 채울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저수지 아래 들녘에 흉년이 들었다. 구례 마산면 주민들이 그 이듬해인 1930년 노고단 아래 해발 1300m 고지의 물줄기 일부를 돌려놓았다. 전북 남원 쪽으로 내려가는 물줄기 중 일부를 전남 구례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가도록 유도수로 224m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구례군 마산면 일대는 지금도 매년 풍년 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서 물을 넘긴다는 뜻으로 무넹기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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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정상에서 보면 왼쪽에 반야봉, 정면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조재영 기자 jojy@idomin.com

 

무넹기 전망대에서 잠시 쉬었다가 부지런히 걷는다. 이마에 땀이 맺힌다. 노고단 대피소를 통과하면 방송송신탑이 코앞에 보여 금세 정상에 다다를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높이 오를수록 나무의 높이가 낮아져서 나중에는 사람 허리 높이 이상 키 큰 나무가 거의 없다. 시야가 확 트인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선명하다. 그래서 마치 작년 6월에 지인들과 함께 다녀온 스위스 스쿠올에서 알프스 트레킹을 하는 듯한 느낌, 딱 그 느낌이다.

대략 성삼재휴게소를 출발한 지 1시간 30분 만에 노고단에 도착했다. 그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노고단(길상봉)은 해발 1507m다. 1915m 천왕봉, 1732m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 3대 봉우리 중의 하나다. 옛날 지리산 신령인 산신할머니(노고)를 모시는 제단이라고 해서 노고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은 고산지대로서 전망이 매우 좋고 시원해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의 심신 수련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건물을 짓고 여름을 보냈다고 한다. 노고단 지역은 한여름에도 기온이 서늘한 아고산 지대이며 약 30만 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 원추리 군락과 각종 고산식물이 자라는 곳이다.

노고단 돌탑은 신라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탑과 단을 쌓고, 천지신명과 노고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화랑들이 쌓은 탑과 단은 1000여 년이 세월이 지나면서 초석으로 추정되는 몇 개의 큰 돌만 남았다. 지난 1961년 7월 갱정유도(1928년 창교된 민족종교)가 다시 축조한 것이 지금 있는 돌탑이다. 매년 음력 9월 9일이 되면 갱정유도가 국태민안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산신대제를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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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정상 돌탑. 노고단의 상징 같은 존재다. /조재영 기자 jojy@idomin.com

 

사람들이 돌탑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섰다. 돌탑 뒤로 돌아가면 훌쩍 건너뛰면 닿을 듯한 곳에 반야봉이 보이고, 저 멀리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보인다. 산 아래 골짜기와 구례들, 섬진강을 내려다보면서 커피와 간식을 먹는다. 이쪽으로 봐도, 저쪽으로 봐도 참 맛있는 풍경이다.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중학생 딸을 데리고 왔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부모'인 모양이다.

실컷 경치를 즐기고 사진도 찍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길을 내려온다. 같은 길이지만 아무래도 내려오는 시간이 올라가는 시간 보다는 덜 걸렸지만 노고단에서 쉬고, 사진 찍고 얼쩡거린 시간이 꽤 된 모양이어서 성삼재휴게소에 도착해서 확인한 시간은 왕복 3시간 30분이었다.

성삼재휴게소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1만 원. 원래 맛이 그런 건지, 시장이 반찬이어서인지 모르지만 주문하자마자 바로 나온 음식치고는 먹을 만했다. 내가 갔을 때는 단풍이 겨우 시작되는 듯했지만, 이 글이 책에 실려 나올 즈음이면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 마다 단풍으로 불타고 사람으로 불타겠다. 또 지리산에 가고 싶다. BMW R1200RT 모터사이클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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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돌아오는 길. 노을이 아름다웠다. 의령군 가례면 20번 국도. /조재영 기자 jojy@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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