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자랑스러운 지리산 촌놈 출신입니다"

지난 6월 7일 기자는 '뉴스펀딩.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1회 기사로 한국현대사 최악의 학살자 중 한 사람인 자칭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에 대해 다뤘었다. 그 기사를 보고 중년의 남성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지리산 산골에서 김종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으며 김종원이 저지른 학살이 더 있으며 필요하면 자신이 모아둔 학살의 상세한 정황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제안에 반신반의 하던 중 그가 다음 블로그 '지리산 배꼽마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기자는 김종원 기사를 쓸 때 그의 블로그에 올라온 논문도 참조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블로그는 지리산 관련 온갖 상세한 얘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제법 유명한 블로그였다.

기자가 넌지시 '혹시 지역 향토사학자이십니까?' 라고 묻자, 그는 '아닙니다. 초등학교 교장입니다'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뭐 하는 사람일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가 교장으로 일하고 있는 거제 외포초등학교는 작은 학교였다. 작은 어촌 마을에 자리잡은 학교는 아담한 단층 건물과 규모에 비해서 조금 넓은 운동장을 갖추고 있었다. 방학이라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김용규(57) 교장은 한 마디로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교장실에 앉자마자 의례적인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바로 한국전쟁 얘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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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외포초등학교 김용규 교장./임종금 기자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는 3개 마을로 이뤄져 있어요. 저는 기암마을이 고향이고, 함양 학살이 일어난 마을은 점촌입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빨치산 대대장과 대대장 비서인 여자 빨치산 1명이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빨치산이 방을 쓰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형님, 누나가 집에서 남은 방을 쓰면서 살았습니다. 부엌에서 같이 밥을 해먹었습니다. 빨치산 대대장이 있으니 꼼짝을 못했습니다. 5일 장에 사람이 갈 수가 있나, 바로 강 건너에 국군이 있었는데 알릴 수가 있나…. 우리 아버지는 당시 거창경찰서 마리면지서에 근무하던 경찰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인근 지역 경찰의 주임무는 빨치산 토벌이었다. 자신은 빨치산 토벌을 하고 있는데, 고향에 있는 가족은 빨치산에게 감금되다시피 한 상태였으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의 시대였다. 다행히 그의 가족은 전쟁에서 희생자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58년 그가 태어났다. 그가 자랄 때 그의 아버지는 경찰을 그만두고 창호지 생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온 집안이 창호지 생산에 매달렸다. 겨울에 아랫집, 뒷집 사람들과 함께 수매해 온 닥나무 껍질을 벗기면서 전쟁과 학살, 지리산 골짜기에 서려 있는 얘기를 숱하게 들으면서 자랐다.

◇교육은 아이 눈 높이에서

-학교 선생님이 되셨는데, 계기가 있나요?

"저는 사실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참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지리산 산골에서 볼 수 있는 직업군이 몇 개나 되겠습니까만, 제가 어릴 때 참 좋은 학교 선생님을 만난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은사님 가운데 강봉기, 박기범 선생님이 참 기억에 남는데 말 그대로 페스탈로치였습니다. 연도 만들어주고 팽이도 만들어주고 아이들이 좋아하고 따르고. 그래서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마음을 굳혔습니다. 나는 커서 선생님이 되겠다."

-그럼 대학은 어디를 나오셨나요?

"진주교대 76학번으로 입학했고, 대구대학교 사범학과에 편입했습니다. 사실 중·고등학교 교사도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교사에 비해 중·고등학교 교사가 호봉이 더 셌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등교원자격을 딸 때 호봉 단일화를 해서 메리트가 없어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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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외포초등학교 김용규 교장./임종금 기자

그는 교직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제가 21살 때부터 교직에 들어와 지금 38년째입니다. 저는 요즘 학생들이 그냥 '샘'이라고 부르는데 마음이 그렇습니다. 선생과 선생님은 같은 뜻이지만 전혀 다르게 저는 느껴집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교장이 되셨는데 어떤 방향으로 학교를 이끌고 싶으십니까?

"교직에 첫 발령될 때 다짐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오는 것이 즐겁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가장 강조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노는 것도 최선을 다해라. 이런 소신이 있어도 실제 일선 교사시절에는 별 힘이 없습니다. 자기가 맡은 반에만 잠시 영향을 미칠 따름입니다. 그런데 관리자(교장)이 되고 나서는 다릅니다.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현장에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거제 외포초등학교는 변화가 좀 있었나요?

"제가 외포초등학교에 온 게 2014년 3월 1일입니다. 당시 학생 수가 불과 34명이어서 폐교까지 거론되는 학교였습니다. 지역사회에서 많이 도와주고 해서 지금은 학생 수가 100명이 됩니다. 처음 학교에 왔을 때 '나는 뭘 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즐겁고, 실력(성적)도 조금 뒷받침해주면 좋고, 학부모들도 만족하면서 내 경영 철학을 녹여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학교는 방과후 학교 활동이 모두 무상입니다. 학교에 있는 트램플린을 400만 원 주고 샀는데 아이들이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텃밭을 이용해서 체험학습도 많이 합니다. 운동장에 숲속 교실을 만들고 학교 바깥에는 벽화를 그리고 학교 운동장을 정비하고 학교 밖을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해서 자동차들이 학교 밖에 주차를 하거나 속도를 못 내도록 했습니다. 학교 뒤편 대나무 밭도 깨끗하게 정비했습니다. 이게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것 같아 보여도 학교 예산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면 다 가능한 일입니다. 이 덕분에 학생 수도 늘고 전학 상담도 제법 들어오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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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을 하는 외포초등학교 학생들./외포초등학교 제공

아마 불과 1년 사이 그는 정말 많은 것을 바꿔 놓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뭔가 막연했다.

-아이들이 학교 오는 것을 즐겁게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나요?

"아이들에게 '하지 마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학교 뒤편에 대나무 밭이 있는데 아이들이 거기서 잘 놀죠. 그런데 대나무 밭이 위험합니다. 찔릴 우려도 있고. 그럼 놀지 마라고 하는 게 아니라. 놀아라. 대신 여기가 좀 위험하니까 선생님과 어른들이 좀 정리를 할 테니 잠시 비켜달라, 정리하고 나면 얼마든지 놀아라. 실내화를 교실 밖에 신고 다니면 흙도 묻고 비오면 실내화가 엉망이 되니까 선생님들이 잔소리를 합니다. 저는 학생들이 다니는 동선을 파악해 그곳을 시멘트로 깔아 버렸습니다. 그러면 실내화에 흙도 안 묻고 아이들에게 잔소리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이들 중에 성격이 거친 아이가 있습니다. 유리창을 깹니다.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이야~ 너는 정말 힘도 좋고 용감하네. 선생님과 같이 유리창 깨는 것 보다 다르게 활용할 방법 찾아보자'고 달래는 겁니다. 이게 먹혀들었는지 나중에 제자들에게 전화도 많이 오고, 저희 집에 대소사 있을 때 많이 찾아옵니다."

-요즘 교육 현장에서 성폭력이니 학원 폭력이니 말이 많은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학교는 모든 중심을 아이를 최고 주인으로 앉혀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행정이나 관리들도 아이를 최고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놓고 아이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생각에서 생각해보면 학교 폭력과 여러 문제가 해결됩니다. 성격이 거친 아이에게 관악기를 불도록 하고 북을 치도록 하니까 자연히 치료가 됩니다. 또 모든 걸 아이들과 같이 해야 합니다. 교장이라고 군림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동화되고 밥도 함께 먹고 풀도 함께 매고 해야 합니다. 말로 지시해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어쩔 수 없이 평가한다면 성실, 도전, 창의, 인성, 적응력 등이 평가의 중심이 돼야 합니다. 이래야 나중에 간판이 아니라 정말 내면에 깊은 중심이 선 실력 있는 인재들이 양성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제 처는 '당신은 이상적이다'고 그럽니다. 이런 게 이상적이라 느껴지더라도 선생은 인간을 교육시켜야 하니까 늘 앞서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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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하는 김용규 교장./거제 외포초등학교 제공

-문인으로 등단도 하셨다는데, 시는 어떻게 배운 겁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 문학 써클을 했고, 학도호국단(총학생회) 문예 부장을 했습니다. 그러다 시조시인으로 등단을 했습니다. 주로 고향을 주제로 시조를 씁니다. 어쨌든 등단을 하니 글짓기 대회, 독후감 대회 등 제가 지도할 일이 참 많고 입상을 제법 시켰습니다."

◇산골 촌놈,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

김용규 교장의 블로그(blog.daum.net/yk8968 지리산 배꼽마당)을 보니 거의 다 고향 얘기다. 이는 의외다. <피플파워> 인터뷰이 중 기자에게 넌지시 전화를 해서 고향 얘기나 어린 시절 얘기는 좀 줄여 달라고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재밌고 좋은 얘기고 다 지나간 일인데 뭘 그러십니까'라고 웃고 넘어갔지만, 50~60대에게 어린 시절 고향 얘기는 추억은 될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놓기에는 부끄럽거나 아찔하게 다가오는 듯 했다. 그러나 김용규 교장은 정 반대였다. 오히려 고향 찾기에 나서고 자신의 부끄러웠던 추억도 과감히 내놓았다.

"사실 처음엔 저도 어린 시절과 고향이 조금 창피했습니다. 촌놈이고 빽없고 가난한 것을 감추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직생활을 하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제 고향이 제법 괜찮은 곳이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고향 찾기'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찾은 걸 좀 정리해 주십시오.

"많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자문위원을 했는데 지금 4~5구간인 금계~동강~수철 마을 구간을 제가 지도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4~5구간이 제주 올레길 보다 2년 앞서 시범구간으로 지정된 전국 최초 둘레길입니다. 사단법인 숲길에서 전화가 왔는데 둘레길을 내야 한다. 둘레길이라는 게 뭐냐. 둘레길은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면 좋고, 이야기가 있고 사람사는 냄새와 혼이 느껴지는 길이면 좋다고 해서 길을 안내해줬습니다. 중간에 사유지가 있거나 길을 내기 어려운 곳도 알려줬습니다. 제가 알린 것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공개바위, 용유담과 가사어, 선녀굴, 상래봉, 이억년 이조년의 후손들이 있는 위승 엄천리 백년 마을 등 많이 있습니다."

-지리산에 빨치산 얘기도 있지만, 산이 깊으니 호랑이나 짐승 얘기도 많이 있을 것 같은데.

"공식적으로는 남한 마지막 호랑이가 1924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것이라 하지만 지리산에는 그 이후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한국 마지막 호랑이는 지리산 천상굴에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1970년대까지 호랑이 혹은 표범을 목격한 사례가 있고, 1940년대 말에 호랑이 새끼를 만진 사람이 지금도 생존해 계십니다. 호환(호랑이가 사람을 물어간 것)이 있었는데 어디서 무슨 살점이 떨어져 있었는지 생생한 증언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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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규 교장의 고향인 함양 엄천골./김용규 교장 제공

-이렇게 모은 자료를 블로그에 다 올리시는데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반응은 많이 있던가요?

"제가 13살 때부터 객지생활을 했는데, 어머니 때문에 잠시 고향에서 근무할 때가 있었습니다. 살펴보니까 하나하나 새삼스러운 겁니다. 나만 알고 있으면 그렇다 싶어 2002년에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운영하다가 돈이 많이 들어서 2005년 전후로 야후 블로그로 갈아탔습니다. 특히 통영 사량도 분교에서 근무할 때 저녁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 이야기 올리고, 제가 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그것도 올리고 하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방문했습니다. 야후 블로그가 2년 전 없어졌는데, 2800만 명이 방문했습니다. 사람들이 댓글도 많이 달고, SBS <세상에 이런 일이>, KBS <무한지대 큐> 같은 데서 촬영 협조 요청도 들어오고 하니까 재미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마다 고향에 가서 사람들에게 알릴 만한 아이템을 찾는 겁니다. 이걸 하다 보니까 이젠 일상이 됐습니다. 이걸 내 제자들이나 자식과 손자들도 볼 수 있으니 현대 문화가 주는 최고의 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블로그를 권합니까?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권장을 했었습니다. 네 생각을 넣어봐라, 쉽게 만들 수 있다. 또 아이들에게 제 카메라로 사진 찍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함양군 휴천면이 고향이신데, 거기 지금 지리산댐이 논란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교육공직자니까 누구 편을 들기가 참 그렇습니다. 일단 저는 무조건 개발하지 말자고 반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개발이 필요하면 해야지요. 그런데 지금 지리산댐은 이대로 개발하면 여러 문제가 생길 겁니다. 예를 들어 용유담, 실상사도 수몰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또 지금 지리산댐 상류로 귀농하거나 펜션을 짓거나 카페를 차리는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리산댐이 부산시민 식수원을 확보하기 위한 건데, 그러면 이 사람들이 영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부터 반발을 할 겁니다. 이 말고도…. 저번에 <경남도민일보>에서 잘 정리해서 보도해 주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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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교장이 널리 알린 '공개바위'./김용규 교장 제공

지리산에 가로 896미터, 높이 141미터나 되는 소양강댐 2배가 넘는 초대형 댐을 짓고 그걸 무엇으로 연결해 저 멀리 부산까지 식수를 공급한다는 지리산댐 계획. 그는 이 댐의 무모함에 대해 아는 듯 했지만 공직자라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었다.

이렇게 그와 인터뷰가 마무리됐다. 그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의 장점을 먼저 찾고, 다음으로 내 집의 장점을 찾고, 내 고향의 장점을 찾아간 사람이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행복의 기준은 물질적으로 얼마만큼 갖췄느냐 보다 '희열'을 느끼며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고향을 찾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희열을 느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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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용유담 모습./김용규 교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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