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역사와 풍요로운 자연을 느끼는 명소

모터사이클을 타고 길은 나서는 것은 작은 모험이다

언제부터인가 '길'을 생각했었다. 멀리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굴곡진 길을 더듬어가는 과정이다. 또 가까이 보면, 먼 길이든 가까운 길이든 길 위에 선다는 것은 편안함과 익숙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행까지는 아니지만 불편함이 따른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길을 나서는 것일까? 길을 나서면 새로운 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인간의 마음, 혹은 호기심이 길을 나서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도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져다 붙이기는 좀 멋쩍지만 아주 작은 도전이자 모험인 것은 맞다. 달려가서 보고 느낀 뒤 집까지 무사히 복귀해야 이 작은 도전과 모험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더위가 찾아왔을 때 거창을 향해 떠났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모터사이클 시동을 걸고 잠시 예열을 하는 동안 전후좌우를 살펴본다. 공기압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외견상의 문제는 없는지. 안전한 라이딩을 위한 최소한의 점검이다.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아파트를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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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사이클 오디오에서는 영국 가수 아델(Adele)이 부르는 'Someone Like You'가 흘러나온다. 아델의 목소리는 정말 매력적이다. 음치박치인 내가 따라부르기엔 '넘사벽'인 노래이지만 한가한 도로에서 머릿결을 흔드는 바람을 느끼면서 흘러가는 풍경과 함께 듣는 'Someone Like You'는 참 좋다. 오디오에 꽂혀있는 USB에는 다른 곡도 세 곡이 더 있지만, 이 노래를 자꾸만 반복해서 듣게 된다.

길을 사람을 이어주기도 하고 끊어지게도 한다

목적지는 거창 수승대였다. 수승대로 가려면 2번국도를 타고 진주로 가서 시내를 관통해서 3번국도를 따라 올라가거나 함안-의령을 거쳐 산청으로 가로질러 가서 3번국도를 타고 올라가는 코스가 있다. 이번에는 진주로 가지 않고 의령을 거쳐 산청으로 가로질러 가는 코스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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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읍을 지나 20번 국도를 타고 대의고개를 넘는다. 대의고개에 새 길이 뚫렸다. 정확하게는 고개 아래에 터널이 뚫리고 4차로로 확장과 함께 꼬불꼬불하던 선형도 펴졌다. 고개는 예나 지금이나 길손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새 길이 뚫리기 전까지 대의고개는 길손들의 쉼터였다.

고개마루 길 양쪽에 쉼터가 있다. 한쪽에는 주유소와 조그만 매점이 있고, 길 건너편에는 음식점이 있었다. 이곳을 지나다니는 모터사이클 라이더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곳에서 잠시 쉬어간 기억이 있을 만큼 라이더들이 애용하던 곳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새길로 달리지 않고 일부러 옛길을 따라 대의고개를 넘기로 했다. 예전에는 이 고개 오르기를 힘겨워하는 저속차량이 있어 그 뒤를 따르는 차량 대열 꽁무니에서 매연을 맡으며 고개를 오르기가 일쑤였는데 새길이 뚫린 덕분인지 통행하는 차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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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서 있어서 가을에는 아주 운치가 있는 길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바람따라 흩날리는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고갯마루에 도착해서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다. 자세히 보니 문을 닫았다. 매점도, 주유소도, 음식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 통행이 끊어진 곳에는 사람이 없다. 주유소 쪽은 굳게 닫힌 문이 폐업을 알리고 있었고, 음식점 쪽에는 주인이 펼침막에 폐업인사를 써붙여 놓았다.

"대의고개 쉼터는 1997년 가을에 개업하여 약 17년간의 긴 세월을 고객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성원에 힘입어 성황리에 운영되었습니다. 설날 전후, 봄놀이 갈 적에, 여름 휴가철, 성묘철, 추석 명절에는 휴게소 주차공간이 부족하고 북적대던 그런 날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중략) 엄마 아빠 손잡고 졸망졸망 걸음마 하고 따라다니던 어린아이들은 벌써 키가 훤칠한 성년이 되어버렸습니다. 천황봉을 전망할 수 있는 곳, 쉬어가기 딱 좋은 대의고개 쉼터는 이제 작은 역사속으로 사라져가는가 봅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대의고개 쉼터 가족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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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없이 문 닫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건만, 주인장은 친절하게도 이렇게 인사말을 남겨놓아 단골 고객들의 아쉬움을 위로한다. 고객들의 아쉬움도 크지만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생업을 해온 주인장의 아쉬움은 더 얼마나 클까? 길은 길을 잇고 사람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사람 관계를 끊어지게도 하는구나 싶다. 길 위에서 만나는 단상이다. 사진 한 장에 이 모습을 담고 다시 길을 달린다.

대의고개를 넘어가서 5분쯤 달리면 막다른 삼거리를 만난다. 왼쪽으로 가면 산청군 생비량면, 오른쪽으로 가면 합천군 삼가면이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생비량면~신안면 20번국도 꼬불꼬불 2차로도 상당한 구간이 4차로 확장과 함께 선형개량이 이뤄졌다. 덕분에 목적지까지 달리기가 훨씬 수월해졌고, 시간도 줄게 됐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 옆에 강을 끼고 돌면서 달리는 여유로움은 포기해야 한다.

산청군 신안면에서 3번국도로 갈아탄다. 여기서부터는 한참 동안 고속도로처럼 쭉 뻗은 왕복 4차로 길을 달리게 된다. 산청읍, 오부면, 생초면을 지나 함양군 수동면, 안의면까지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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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은 푸르고 맑은 하늘에는 군데군데 하얀 구름이 떠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등을 밀어준다. 속도에 맞춰 음악 소리를 높여주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이런 기분을 누가 알까? 길은 어느새 거창으로 접어든다. 곧장 달리면 거창읍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목적지가 수승대이기 때문에 마리면에서 위천면 방면으로 꺾어든다. 꺾어진 길을 따라가면 무주, 김천 방면으로 가게 된다. 그 중간에 위천면 수승대가 있다.

아이들의 천국, 여름 수승대

수승대는 우리 가족이 매년 여름 휴가 때마다 찾아와서 캠핑을 하는 휴양지다. 시원한 숲에서 캠핑을 할 수 있고, 바로 앞에 위천이 흐르기 때문에 여름 휴양지로는 그만이다. 특히 위천에 가동보를 설치해 수위를 조절한다. 그 수위가 아이들에게도 그리 위험하지 않을 만큼이어서 초등학생 이하 아이가 있는 가정에는 안성맞춤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 가족도 이곳을 해마다 찾고 있다. 아이들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냇물을 들어가 놀다가 식사 때 밖으로 나왔다가 잠시 쉬고 또 물에 들어가서 논다. 물놀이가 지겨워지면 뒤쪽에 있는 물썰매장에 가서 썰매를 탄다. 아이들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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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대의 여름은 또 하나 볼거리가 있다. 국제연극제가 열린다. 낮에는 매일 오전 오후 위천에 설치된 무대에서 특별공연·연주가 펼쳐진다. 물과 숲에서 이 공연을 볼 수 있다. 밤에는 주변에 설치된 특설 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이어진다. 이들 공연은 유료다. 낮에는 피서를 즐기고 밤에는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올해도 '2015 거창국제연극제'가 준비되고 있다. 7월 24일부터 8월 9일까지 열릴 예정이라고 예고되어 있다.

수승대 관광지 숲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캠핑을 하고 있고, 그중 일부는 6월 초임에도 더위를 참지 못하고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무 밑에 모터사이클을 주차하고, 그늘에 자리 잡은 벤치에 앉아 오후의 산들바람을 즐긴다.

오랜만에 찾아온 수승대 관광지를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수승대가 있는 곳은,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백제의 국세가 약해져서 멸망할 무렵 백제가 사신을 보낼 때 이곳에서 보냈는데, 다시 돌아오지 못 할 것을 슬퍼하며 송별했다 해서 '수송대'라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퇴계 이황이 요수 신권 선생에게 이곳의 이름을 '수승대'로 고칠 것을 권해 수승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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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대는 그 모양이 큰 거북이와 닮아서 '암구대'라고도 했다. 수승대를 가운데 두고 한쪽에는 구연서원이 있고, 건너편에는 요수정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요수정 쪽에서 본 수승대가 거북이 모양과 꼭 같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구연서원 쪽에서 보는 옆모습이 더 거북이와 흡사했다.

수승대는 집채보다 더 큰 바위다. 그런데 어디 한 곳 빈틈이 없이 한문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래전부터 글 줄이나 읽은 선비들이 지은 시를 새겨넣은 것이겠지만, 과문한 내가 보기에는 참 꼴불견이었다. 누구는 '소중한 문화유산' 타령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자연물에 온갖 글귀를 새긴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

 옆에 있는 구연서원의 대문에 해당하는 관수루에 올랐다. 관수, 물을 본다는 뜻일 테다. 그 물이란 수승대 앞을 흐르는 위천을 말함일 것이다. 선비들은 이곳에서 위천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지었을 테다. 당시 선비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해보고자 눈을 감아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두었다. 관수루의 특징은 누각을 떠받친 기둥이다. 나무를 일정한 모양으로 깍은 것이 아니라 비틀어지고, 휘어진 모양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했다.

 계곡에서 내려온 바람이 관수루를 지나가자 누각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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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스스슥 몸을 떤다. 용트림하듯 휘어져 올라간 관수루 기둥 사이로,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철마 BMW R1200R 모터사이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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