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엄마 위해 귀향…억대 농장주로 성장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에 마음이 바빴다. 흐린 하늘에서 곧 비가 떨어질 것 같았다. 강소농 취재에서 농장은 실외 사진이 필수인데 비가 내리면 여간 복잡해지는 게 아니다. 사진을 찍고자 다시 거창을 찾아가기란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아니나다를까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비가 흩뿌리고 그치기를 반복한다. 조마조마하는 마음에 당도한 곳은 거창읍 가지리에서 이수미(46) 사장이 남편 박창구(54) 씨와 함께 가꾸는 '거창 이수미팜베리' 농장이다. 다행히 아직 굵은 비는 내리지 않는다.

1만 4000평 농장서 기르는 베리 5종 세트

급한 마음에 사진부터 찍자고 했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니 이제야 농장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 거창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눈에 담기는 곳 모두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게다가 농장 규모도 엄청났다.

"1만 4000평 정도 되는데 베리 5종을 심었습니다. 복분자가 5000평이고 블랙베리 4000평, 블루베리와 아로니아가 각각 1000평이고 나머지는 산딸기입니다. 보통 6월 중순께 복분자를 시작으로 블루베리와 블랙베리, 아로니아 순으로 수확합니다. 8월 중순이면 끝납니다. 산딸기는 내년부터 수확하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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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규모가 큰 농장이니 수확량이 상당할 듯했다.

"수확량은 매년 다르지만 대략 40t 정도 됩니다. 복분자가 7∼8t쯤 되고, 블랙베리 20∼30t, 블루베리 등을 5∼6t 정도 수확합니다. 판매는 소포장 직거래를 주로 합니다. 우리 베리류를 구매하시던 분들이 매년 찾아오시거나 전화, 인터넷을 통해 주문을 해 주셔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 가톨릭교회 우리농촌운동본부가 운영하는 친환경 유기농 매장인 '우리농'이라는 쇼핑몰을 통해 판매합니다. 블랙베리는 워낙 양이 많아 가공해 판매도 합니다."

'소포장 직거래'가 많다던 이 사장의 말처럼 실제로 인터뷰 중에도 계속 주문전화가 울려 이야기가 끊어지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이 사장 부부가 한 해 동안 올리는 수익은 어느 정도일까?

"인건비를 제외하고 1억 5000만 원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사지으며 억대 연봉을 올리려면 사실 농촌에 파묻혀 살아야 합니다. 한국농업은 인건비 때문에 외국 농산물에 잠식당할 것입니다. 경쟁력 있게 버티려면 부가가치가 높은 것을 재배해야 하죠."

고수익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남편 박 씨가 슬며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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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22세 꽃다운 나이, 잘 나가던 직장 접고 귀향한 까닭

거창이 고향인 이 사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어릴 적 꿈이었던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자 유명 여성의류회사에 입사해 한창 직장생활을 재미있게 했다. 동료나 상사로부터도 제법 인정도 받는 등 장래가 촉망되는 소위 '잘나가는 아가씨'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갑자기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마음의 병을 앓아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됐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은 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빠로부터 온갖 사랑 다 받으며 자랐는데 갑자기 옆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엄마도 무척 힘드셨던가 봅니다. 우울증을 앓으면서 나에게 6개월 동안 전화를 해 '힘들다'라고 했죠. 그 순간 사랑하는 가족이 힘들어하는데 내 꿈만 좇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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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그 길로 과감히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모두 '일 잘하는 네가 왜 그만두려 하느냐'라며 말렸지만 이 사장을 찾는 엄마를 그냥 둘 수 없어 귀향을 결심했단다. 작은 가방 하나만 메고 그 길로 거창으로 내려왔다. 그게 1991년 12월 31일이었다.

고향에서 새로운 시작, 그것은…

"진짜 사랑의 힘은 대단한가 봐요. 내가 거창으로 돌아올 당시만 해도 엄마 얼굴엔 병색이 짙었는데 사랑하는 딸이 옆에 있으니 좋으셨던가 봅니다. 금방 혈색이 돌아오더라고요. 건강해지는 엄마 모습을 보니 서울 생활을 잘 접었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기분이 좋았죠."

이 사장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고교 졸업 후 하루도 쉰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런 그가 집에만 있자니 갑갑했다. 뭔가 일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쉽사리 마음이 가는 일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서울로 갈 형편도 안 됐다. 고민이 계속되면서 서서히 좁힌 생각은 '가축'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돼지를 기르셨어요. 몸이 좋지 않아 대규모로 기를 처지도 안 돼 어미돼지 10마리 정도 기르면서 새끼 낳으면 키워서 팔고 하는 그런 수준이었죠. 어릴 때 자연스럽게 본 모습이다 보니 가축을 떠올렸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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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이 사장은 그러나 무작정 가축을 길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장 현금을 돌릴 수 있는 양계 사업을 하기로 했다. 직장 생활하면서 오빠 뒷바라지하고 남은 돈에 가지고 있던 우리사주를 처분하고, 융자도 받아 6500만 원 종잣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양계장을 지어 딱 6500마리 닭을 넣었다. 그 길로 18년 동안 4만 마리 규모의 양계장을 운영하면서 나름 돈을 벌었다.

"어느 농축산물이든 안 그런 게 있겠습니까만 특히 계란은 신선도가 생명인데 곤란한 경우가 참 많았죠. 1주일만 되면 계란이 수만 개가 쌓입니다. 그런데 업체에서 제때 계란을 가져가지 않으면 60평 창고가 가득 차 버립니다. 그러면 가슴이 타죠.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했겠습니까?"

양계 사업 키우고자 삼고초려로 산 땅

"계란을 생산해도 당시엔 내가 직접 팔 수 있는 루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소위 '갑'이 되어, 내가 주인공이 되어 계란을 팔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첫 단계로 양계장을 크게 짓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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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이 사장이 지금의 농장 터를 본 것은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92년이었다. 거창읍내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땅을 보고는 '언젠가는 나도 이런 땅을 가져봐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단다. 그리곤 마음속에 묻어 두었는데 2006년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다시 그 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엔 땅 주변에 변화가 일고 있었다. 빨간 깃발이 꽂혀 있고 개발이 진행 중이었다. 다음날 곧바로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아갔다. 알고 보니 주인 할머니께서 십여 년간 매물로 내놓았다가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를 직접 만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고민이 많았던 할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팔기를 거부하더라고요. 밤 농사지어 자식들 교육시킨 땅이었는데 쉽사리 마음을 정할 수 없었던 것이죠. 일단 우리 의사를 전달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그리곤 며칠 뒤 연락이 와서 두 번째 흥정이 있었습니다. 잘 진행이 될 것 같더니 이번엔 '자식들이 팔지 말라고 한다'고 해 두 번에 걸친 할머니와의 흥정은 끝나고 말았죠."

부부는 두 번의 거래 실패로 마음을 비우려 했단다. 부부와 인연이 없는 땅으로 여겼다. 그런데 몇 날이 지났을까? 이 사장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 같이 밭에 일하러 가자고 끌더란다. 하도 꿈이 이상해 다시 할머니 집에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해 드렸다. 그리곤 며칠 뒤 할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계약하자'는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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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흥정은 끝났지만 돈이 문제였습니다.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했는데 등기가 먼저 돼야 대출이 될 게 아닙니까? 돈을 받기도 전에 누가 등기를 먼저 해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할머니는 우리를 믿었던지 흔쾌히 동의해 줘 대출을 받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 땅이 우리에게 왔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닭 키우기 아까운 땅, 베리류 농장으로

'삼고초려'로 정말 꿈속에서나 그렸던 넓고 전망 좋은 땅을 산 부부에게는 이제 계획대로 70만 마리를 기르는 대규모 양계장을 짓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농장이 자리 잡은 위치가 투자비용이나 주변 환경 등을 볼 때 양계장을 짓기에는 아까운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양계장은 과감히 접기로 했다. 그게 2010년, 꽃다운 나이에 시작해 18년 동안 양계장을 했다.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있었다.

"한 번 보십시오. 여기에 양계장이 들어섰더라면 지금 풍경이 어땠을까요? 당시엔 양계장을 하다 보니 더 넓은 땅을 찾게 됐겠지만 이곳은 양계장을 지을 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고민 끝에 베리 종류를 심어보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일을 진행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이 좋은 땅에 왜 돈도 안 되는 베리를 심을까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단순히 돈벌이를 목적으로 베리를 심은 것은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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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삶의 질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돈을 더 많이 벌고자 했다면 거창에서 고소득 작목으로 꼽히는 사과나무를 심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부부는 사과나무를 심지 않은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베리는 경남보다 전북 고창 등지에서 훨씬 많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대량 생산하는 곳과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죠.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 몸에 맞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요? 지역에서 생산한 신선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바로 소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장점이죠."

이 사장은 수확 철 일하는 사람 구하는 문제도 장점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고창 등지에서는 베리 수확 철이면 도회지까지 나가 승합차로 인부들을 실어 날라야 하는 실정이란다. 그런데 거창엔 사과가 유명한 지역이어서 베리를 한창 수확하는 시기엔 인부들이 남아 서로 일을 하려고 줄을 설 정도라고 한다.

고물상에서 찾아낸 보물 남편

부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두 사람의 궁합이 아주 잘 맞다. 부창부수(夫唱婦隨)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입은 옷도 커플 티다. 천생연분을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더구나 양계장 일이 바빠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는 이 사장 이야기는 인터뷰 내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계장 일을 하면서 주경야독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는데 연애할 시간이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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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결혼 이야기는 남편 박창구 씨가 풀어낸다.

"하루는 모리재(거창 출신 조선 중기 문신 정온이 은거했던 곳에 지은 사당)에 갔는데 한 아가씨가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아가씨 얼굴 주위로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끼더라고요. 외진 곳에서 만난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해 말을 걸었죠. 그런데 몇 마디 나눠보니 아가씨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것 같더군요."

그날 만남이 인연이 돼 박 씨는 그 후 길이 닳도록 양계장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양계장 일이 좀 바쁜가. 놀러 갔지만 놀지는 못 하고 대신 양계장 일만 도우는 셈이었다. 한 번 마음을 뺏긴 박 씨에게는 양계장 일이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연애를 하다 결혼하게 됐단다.

듣고 있던 이 사장이 한마디 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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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당시 남편은 어디에서 뭘 했는지 아세요? 고물상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남편을 고물더미에서 찾아낸 것이죠. 그런데 나 같은 여자를 만난다는 게 큰 행운인데 오히려 시댁 식구들은 처음 우리 결혼을 반대했어요. 엄마가 아프다는 것이 이유였겠죠. 사실 맘고생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다들 제게 너무 잘 해주는 시누이들이지만 당시엔 참 힘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경제학과를 졸업한 박 씨는 사실 몇 년을 놀았다. 처음엔 가족들이 뭘 해도 할 사람이라 여기고 기다려주더니 점차 이상하게 보더란다. 그래서 밑바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일하는 것을 배우고자 스스로 고물상을 찾아갔다고 했다. 애초 계약은 2년 동안 일을 하기로 했는데 이 사장을 만나는 바람에 1년 11개월 만에 그만두고 양계장 일을 하게 됐단다.

큰 고통 딛고 일어서면 기쁨은 배가 되고

이 사장 부부가 베리를 재배하면서 억대 농가 반열에 오르기까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약 10년간 항생제를 최대한 적게 사용하면서 계란을 생산했던 이 사장은 베리를 심으면서 무농약을 고집했다. 스스로 힘든 길을 자처한 셈이었다. 무농약인 탓에 눈 돌리면 농장을 파고드는 잡초와 싸워야 했고, 또 병해충과도 싸워 이겨야 했다. 당연히 노동력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농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기농에 도전해 마침내 인증을 받았다.

"무농약 인증은 화학비료 등을 기준치 이하로 쓰면 되지만 유기농 인증을 받으려면 3년 동안 일절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주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제초 방법이라곤 손으로 뽑거나 풀이 나기 전 비닐로 땅을 덮어 풀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또 천연 제초제를 만들어 쓰기도 하고요. 해충을 막으려고 해충 기피제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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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어느 해 겨울, 거창에 영하 20도 이하 기온이 연일 이어지는 매서운 나날이 있었단다. 어린 나무들이 동해로 제대로 자라지 못해 죽기 직전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실망의 나날을 보내는데 방치하듯 강하게 키운 덕인지 나무들이 스스로 냉해를 딛고 깨어나더라는 것이다.

"처음엔 가슴이 아렸습니다. 1년 농사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됐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고통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 고통을 견디고 나니 더 큰 기쁨이 왔던 것이죠. 만약 제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월급 받고 편안한 직장생활을 했다면 지금 이 땅을 살 수 있었을까요? 여성으로서도 자연에 살면서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 만들어 먹고, 퀄리티 높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자 자랑거리입니다."

완공 앞둔 체험관서 소비자 교육 등 계획

이 사장 부부는 요즘 농장 체험관을 만드느라 바쁘다. 역시 농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2층 건물을 지어 실내 공사가 한창이다. 더 넓은 가공실이 필요해 2층 절반은 가공실로 만들고, 한쪽엔 판매장 겸 카페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1층엔 소비자 교육실을 겸한 체험실이 들어선다. 부부가 체험관을 짓게 된 것은 단지 먹거리 생산에 머물지 않고 문화를 생산하는 농촌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산한 먹거리를 이곳에서 가공해 판매까지 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 정부가 발효액을 만들 것을 권장하지만 판로까지 열어 준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찾아오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내가 만든 음식을 판매하려는 것이죠. 다양한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교육장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유기농과 무농약 인증을 모르는 소비자들도 참 많습니다. 이런 소비자들에게 '거창 이수미팜베리'에서 생산하는 베리류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는지 생생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결국 믿음, 신뢰죠. 내 이름을 달고 판매하는 제품에 소비자들이 믿음을 갖는다면 굳이 이곳 농장에 와서 보지 않더라도 도심 속에서도 '이수미 표 베리'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엔 도심 속에도 이런 공간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추천이유 - 경상남도농업기술원 강소농지원단 경영전문가 예권해

2011년 강소농에 가입한 거창 이수미팜베리 이수미 대표는 4.5㏊ 면적에서 친환경 유기농으로 베리류를 재배·생산하는 지역의 핵심 농민입니다. 이 대표는 처음 양계사업을 하다 특수 소득작목으로 과감히 전환해 복분자, 블루베리, 불랙베리, 아로니아 등 수확기가 겹치지 않는 작목(베리류)을 선택, 고용 인력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친환경으로 생산한 과일과 가공제품을 전량 직거래로 판매해 유통비용 절감과 농가수취 가격을 올리는 대표적인 부부 강소농입니다. 부부는 앞으로 체험교육 및 소비자 대상 교육농장과 도시민 휴식·힐링공간으로 발전시킬 중장기 비전을 실현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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