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온 광대, 예술을 그리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고대 그리스 의사의 말씀은 현실에서 증명됐다. '예술은 배고픈 직업', '예술을 하려면 돈이 많아야…'라는 말은 진실로 자리를 잡아간다.

2011년 서른세 살의 시나리오작가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 하고 세상을 등진다. 배고픈 작가의 죽음을 계기로 예술가 복지법이 마련됐고 2012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문을 열었다. 예술인 복지 지원에 걸음마 단계인 재단에서는 예술인의 창의적인 시각을 통해 지역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문화예술적 수요를 충당코자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2015년 국악 분야로 경남에서 유일하게 뽑힌 예술인. 그는 먼 길을 돌아 예술인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힘들고도 먼 광대의 길을 택한 그를 만나러 창녕군 이방면 장재마을로 향했다.

배부른 예술인보다 배고픈 광대로

미리 인터뷰 약속은 잡았지만, 예의상 도착 전 전화를 걸었다. 태풍 '찬홈'을 뒤로 하고 달려온 길이기에 피곤한 운전의종지부를 찍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아, 미리 전화를 드렸어야 하는데 오늘 장재마을 어르신 풍물교육은 연기됐습니다. 그곳에 초상이 나서요. 마을에 상이 났는데 장구가락 울릴 수는 없잖아요. 경남민예총 사무실에서 뵙죠. 오시면 시원한 곡차 한 잔 드리겠습니다."

창녕군 이방면 장재마을 입구에서 차를 돌려 창원시 명서시장으로 행했다. 예술인이라는 말 대신 광대로 불리기를 좋아하는 노정욱(48) 대표는 맨발 고무신에 개량 한복 차림으로 소주와 캔맥주가 놓인 탁자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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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욱 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나무 대표./사진제공 예술나무

"자 시원하게 목을 축여야 대화도 술술 풀리고, 또 섞어서 먹다 보면 혹시나 폭탄 발언도 할 수 있잖아요. 요즘처럼 1인 10역을 하다 보면 한 번에 두 가지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 멋진 인터뷰를 위하여…."

얼떨결에 건배했지만 내심 그의 취중진담을 바라며 요즘 일상을 물었다.

"뒤에 일정표 보세요. 7월과 8월에 해야 할 일입니다. 메르스가 오는 바람에 5월과 6월 사업과 교육은 죽을 쑤었습니다. 그나마 일정이 연기되어서 오늘같이 인터뷰하는 날이 휴식입니다. 그래서 한 잔 하는 거죠."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메모가 보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함안말이산고분군 시도기획사업(5월~10월), 우포늪생태관광활성화(5월~10월), 지역특성화예술교육(4월~11월), 문화가 있는 날 생활문화동호회 활성화(7월~10월 동읍다호마을), 대방주민회 문화우물 마을만들기(5월~10월), 창원시 주말놀이 창원의집, 노정욱의 예술인파견지원사업(5월~10월), 기타 매월 공연 2~3회 준비.'

2015년 그가 풀어야 할 숙제를 보여준다.

밥벌이가 괜찮으냐는 질문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정색을 한다.

"이 일정이 고스란히 돈으로 이어진다면 배부른 예술인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딴따라로 큰 돈 벌려고 마음먹으면 이 짓 못 합니다. 정말 장구 치고 꽹과리 치는 것이 좋아서 원 없이 자기 일 하고 싶은 거죠. 배고픈 광대가 그래서 즐겁고도 괴롭죠. 요즘 말로 웃픕니다."

아버지 나이에 아버지를 이해하다

노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인터뷰 준비를 하며 그가 SNS에 올려놓은 사진과 글을 검색하던 중 질문 거리를 찾았다.

7월 14일 자 그의 담벼락에는 이런 글이 올랐다.

'여러 여러 이유로…. (중략) 아버지와 어머니의 업보로 가야 할 길이 멀다. 매주 고향 마을에 풍물 하러 가는데…. 상중이라 이번 주는 풍물교육 쉰다. 다음 주엔 꼭 할매한테 들러야겠다. 아버지 대신 나라도 빚을 갚아야지. 아버지 먼 길 가시기 전에 꼭 고향에 왔다 가시소. 못난 아들이지만 아버지 고향 땅에서 당신을 하루만이라도 모시고 싶소.'

노 대표 아버지의 근황을 물었다.

"그분들 삶이 워낙 고단하셔서…. (한 잔을 들이켜고). 제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다 고아로 자라셨죠. 아버지는 장연 노 씨 집성촌인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가 고향인데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하셨고 할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지요. 제 어머니도 한국전쟁이 낳은 기구한 운명이세요. 엄마 고향은 전남 담양이 고향인데 전쟁 중에 부모님이 행방불명되셔서 대구의 최 씨 집안에 입양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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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욱 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나무 대표./사진제공 예술나무

어렵게 꺼낸 가족사는 한숨과 함께 이어졌다. 노 대표 아버지는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20살에 전쟁이 앗아간 가족을 만나듯, 운명처럼 두 살 어린 노 대표 엄마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1남 3녀의 자녀를 둔 혈혈단신, 노 대표 아버지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의 아버지는 1995년 세상 모든 번뇌를 뒤로하고 출가를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깊어질수록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은 끝없이 넓어졌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제 나이 30대 때 다르고 40대가 되고 보니 조금씩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홀로 자라시며 혼자 감당 못 하신 그분의 삶도 존중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었죠. 지금 어느 암자에 잘 계신다고 알고 있어요. 저도 더 열심히 살아서 당당한 모습으로 조만간 뵙고 싶어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죠. 그래도 아버진데 보고 싶죠."

목소리는 떨렸고 시선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대구, 창녕, 부산 그리고 창원으로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창녕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성장했다. 생업에 쫓긴 부모님은 그를 친척집에 부탁을 했던 것이다. 부모님이 부산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며 가족은 한지붕 아래 모였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을 '잃어버린 유년기'라고 잘라 말했다.

"생일도 12월이지만 어릴 적에 너무 작아서 이듬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창녕 깡촌에서 자라다 부산이라는 도시 환경이 너무 낯설었어요. 자존감도 없었고 만약에 중학교 2학년 때 짝지를 만나지 않았으면 청소년기도 없었을 거예요. 고1 때까지 같은 반 짝지를 했어요. 박근효, 이 친구가 제 인생의 첫 번째 귀인이죠."

아버지의 반대로 문과 대신 이과를 택하면서 친구와의 동행은 거기까지였다. 대학에 진학하여 사학을 배우고 싶었던 노 대표의 향학열도 점차 식어갔다. 1987년 대학입학을 위해 창원으로 왔다. 처음 온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창원대로를 따라 창원대학교에 가며 그는 진학을 결정했다.

"당시 61번 버스를 탔는데 창원대로도 그렇고 창원시청 앞 동그랑땡(시청 앞 광장)에 눈이 쌓여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멋지더라고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원서를 냈죠. 전체 3번째로 접수했어요. 물론 국립대학이라 등록금도 저렴하고 제가 그 당시 장학금을 노리고 입학을 했죠."

6500원만 납부하고 진학한 장학생 노 씨의 학업은 입학과 동시에 멈췄다. 전공으로 선택한 전기공학보다 북소리와 장구 소리가 그를 끌어당겼다. 창원대 풍물패 '한마당'은 그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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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욱 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나무 대표./사진제공 예술나무

"한마당에서 장구 치고 북 치고 꽹꽈리 치며 사회 현실에 눈을 떴죠. 학생 운동도 자연스럽게 접했죠. 군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노정욱의 풍물인생 황금기를 보냈죠. 농활 문화선전대 대장을 두 번이나 했어요. 그리고 4표 차로 공과대학 학생회장도 해보고, 돌이켜 보면 전기공학 전공은 애초에 물 건너갔죠. 입학 동기들은 졸업하는데 한 학기 더 다닌 9학기를 다니고도 64학점 이수에 평점 1.42 정말 대단한 방어율이죠. 아직도 대학졸업은 진행형입니다. 허허(웃음)."

우포늪에 빠졌던 노숙자

학생운동과 관련된 한총련 재정 사업을 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그의 30대는 순탄치 않았다. 풍물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고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그의 두 번째 귀인 김수환(2000년 작고) 씨는 창원퇴촌농악을 이끌려 그의 풍물 실력에 예술을 가미해 주었다. 대학 시절 익혔던 국악 가락에 날개를 단 것이었다. 그러나 시련은 멀리 있지 않았다.

"2000년에 수환이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 녀석 보내고 (꽹꽈리) 채를 놓고 한 3년 개인사업을 해보았는데 다 실패했어요. 사람이 폐인 되는 것은 순식간이더라고요. 우포늪에 가서 물에도 빠져 보았죠. 무슨 운명인지 물에서 떠오르더라고요. 서울시청 지하철역에서 노숙자로 생활도 해 보았죠. 삶에 의욕이 단 1%도 없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실종 신고를 하시는 바람에 연락이 되었죠. 그리고 저를 정신 차리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암 재발이었어요. 6개월간 어머니 병시중하면서 인간답게 살겠다고 기도했죠. 창원 가음정 엄마 분식점에서 배달을 하며 새롭게 시작했어요. 문화해설사, 지역사, 관광 가이드 공부를 했죠. 그때 배워둔 것을 이제 써먹네요."

늦게 차린 정신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낮에는 배달, 저녁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었다. 도내 정치권. 그는 학생운동을 하며 맺은 인연을 통해 통합진보당 합당에 참여하고 경남도당 사무처장으로 잠시 외도를 했다. 숱한 구설에 오르내리고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정치판은 그가 머무를 곳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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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욱 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나무 대표./사진제공 예술나무

"제가 워낙 직설적이라 욕도 많이 듣고 아직도 듣고 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꾼과 광대 사이에 있는 노정욱에 대한 간극을 알아주시더라고요. 이상만 갖고 정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크게 깨달았죠."

흔들리며 방황하던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것은 사람이 아닌 '문화패 어처구니', 그 인생의 세 번째 귀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광대, 문화사각지대에 서다

"어처구니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와 문화, 삶과 예술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큰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저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사도, 제가 행했던 젊은 날의 방황도 참 흔치 않은 인생이죠. 별별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때문인지 이제는 정말 좋아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자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작년에는 민예총 창원시지부장도 흔쾌히 승낙했죠. 2년 임기 동안 내가 배우고 체험한 민중예술을 펼쳐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는 전통시장을 택했다. 우리 삶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노 대표는 살아가면서 부대끼고 울고 웃으면서 그 속에 광대는 성장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문화예술 사각지대에 놓여 고단한 예술인의 길을 걷는 선·후배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나무를 올해 1월에 설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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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욱 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나무 대표./사진제공 예술나무

"배고픈 예술인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건강한 문화생태계를 조성해야 광대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더디게 가더라도 여럿이 천천히 한 발 한 발 가자. 2011년에 돌아가신 최고은 작가 이후로도 2012년 정아율 씨, 2013년 김수진 씨, 2014년 우봉식 씨가 생활고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난 6월에도 김운하 씨와 판영진 씨가 돌아가셨고요. 어렵고 힘들지만 더 이상의 비극을 막는 것이 광대 노정욱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광대의 삶을 안주 삼아 캔맥주 12개와 소주 3병을 비웠다. 그제서야 '취중진담'이란 뜻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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